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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배신을 알지 못하여-13화 (13/138)

013화

“약이 써도 쭉 들이키세요. 다 드시고 나면 사탕 드릴게요.”

검은색 물이 담긴 잔을 테사가 내려다보기만 하자 마니가 어린 아이를 달래듯 구슬 사탕을 흔들어 보였다. 그걸 옆에서 지켜본 케니스가 청진기를 비롯해 약병들을 정리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니 씨, 부인은 어린애가 아니에요.”

“어머, 선생님. 그리 말씀하셔도 제게는 어린애 같으신 걸요?”

“하여간 마니 씨는 그게 문제라니까요. 아무리 그러셔도 다 큰 여인을 그리 대하면 되겠어요? 그리고 부인께서는 어서 약 드세요. 색이 좀 그래 보여도 몸에 좋은 거예요.”

케니스가 아직도 잔을 들고만 있는 테사에게 엄한 투로 말했다. 그제야 테사는 순순히 약을 들이켰다. 보이는 것처럼 약은 몹시 썼다. 눈살이 절로 찌푸려질 정도로. 테사가 자연스럽게 미간을 찌푸리자 마니가 재빠르게 그녀의 입에 사탕을 넣어주었다.

테사는 마니에게 옅게 웃어 보였다.

헤르트와 정사를 치르고 난 뒤의 기억은 없었다. 눈을 떠보니 테사는 다시 별관의 방 안에 누워 있었다. 침대는 푹신했고 방안은 훈훈하다 못해 벽난로의 열기로 후끈했다.

더불어 잠옷은 새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전보다 천도 박음질도 더 좋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늙은 하녀인 마니가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마니는 테사가 깨어나자 바로 의사를 불러왔다. 지금 그녀의 옆에서 마니와 옥신각신 다투는 여자가 바로 그 의사였다. 테사도 일전에 종종 보았던 인물이기도 했다.

“아참, 이 약도 드린다는 걸 깜박할 뻔했네요.”

가방을 잠그려던 케니스가 가장 안쪽 주머니를 뒤적여 품이 넓은 통 하나를 꺼냈다. 그녀는 그것을 테사의 손에 꼭 쥐여주었다. 이건 뭐지? 뚜껑을 열자 하얀 고체약이 보였다.

“하루에 한 번 내지 두 번. 씻고 나서 발라주세요. 바깥쪽부터 천천히 안쪽까지 넓게. 많이는 말고 적당히 발라주면 됩니다.”

테사는 이 약이 무엇인지 물어보려다가 이내 약의 용도를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흡사 도둑질이라도 하다 발각된 기분이었다. 들켜선 안 되는 걸 들켜버린. 무엇보다 이 약을 제게 주었다는 건 자신과 헤르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녀는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기사 후작가의 귀부인을 주로 담당하는 의사인 그녀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특히 지금의 테사는 그녀의 환자이기도 했으니, 어쩌면 그날 테사와 헤르트에게 있었던 일을 그들 다음으로 케니스가 가장 잘 알지도 몰랐다.

테사는 고개가 절로 수그려졌다. 당장 땅으로 파고들어 가고 싶었다. 케니스는 자신을 무어라 생각할까. 지아비를 잃자마자 바로 남자를 홀린 막돼먹은, 그런 여자라고 생각할까? 뻔뻔하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생각해 보면 헤르트는 유테르트 후작을 죽인 자였고, 테사는 제 남편을 죽인 자와 붙어먹은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래도 다행이에요.”

“……네?”

“당분간 자리를 비운다고 들었거든요. 그러니 부인께 다행이죠. 하여간 남자들이란 여자를 배려할 줄 모른다니까요.”

안 그래요? 케니스가 테사를 향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덕분에 테사는 그녀가 저를 안심시키기 위해 부러 그런 말을 꺼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머지않아 케니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테사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거. 식사 꼭 하시고 푹 쉬세요. 그래야 하루 빨리 회복할 수 있어요. 괜히 움직이려고 하지 마시구요, 부인.”

“네, 네…….”

“그럼 내일 뵐게요. 무슨 일 있으면 마니 씨를 통해서 절 부르세요. 저도 별관에 머물고 있으니까, 금방 달려올게요.”

“네, 감사해요…….”

테사는 케니스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케니스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마니의 배웅을 받으며 케니스가 방을 나서는 동안 테사는 받은 약을 베개 밑으로 숨겨놓았다. 테사가 약을 받는 것을 마니도 보았지만, 그럼에도 대놓고 약을 가지고 있기에는 부끄러웠다.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지만 이런 것들은 테사에게 익숙하지 않았다.

“에구머니나, 부인. 벌써 주무시게요? 제가 콩스프 좀 가져왔는데 그것만 드시고 다시 주무세요. 그대로 주무시면 속 쓰려요.”

케니스를 배웅하고 온 마니가 마침 약을 숨기느라 이불 속으로 꾸물꾸물 들어가 있는 테사를 발견하고선 잔소리에 가까운 말을 했다. 네, 그럴게요. 제 발이 저린 테사가 급히 이불 속에서 나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요, 침대에 딱 붙어 계세요. 제가 갖다드릴 거예요. 아까 선생님 말 못 들으셨어요? 되도록 움직이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하지만…….”

“어허, 가만히 계시래두요.”

마니는 테사가 침대 위에서도 편하게 식사할 수 있게 작은 탁상 위에 스프를 얹어 가져왔다. 딱 먹기 좋게 적당한 온도로 식은 채였다. 테사가 진단을 받는 동안 마니가 시간에 맞춰 준비한 듯했다.

“자, 여기 숟가락이요. 힘에 부치면 말씀하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감사해요.”

테사는 마니가 내미는 은숟가락을 받으려 손을 뻗었다가 묵직한 무게에 하마터면 떨어트릴 뻔했다. 요 며칠 먹지도 않고 누워 있느라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은 탓이었다.

이를 보고 마니가 테사에게서 다시 숟가락을 거두어갔다.

“그냥 제가 해드릴게요. ……자, 아 하세요.”

마니가 적당히 스프를 떠서 테사의 입가에 내밀었다. 테사는 잠시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누군가 저를 이렇게 살뜰히 간호하고 도움을 주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마지막으로 제대로 된 간호를 받은 게 언제였지?

테사는 이윽고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헤르트도 이렇게 해줬는데…….’

고아원에 있을 적, 테사는 1년에 한 번씩 몸살을 크게 앓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헤르트는 밤새도록 그녀를 간호해 주었는데 덕분에 테사는 며칠 가지 않아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아프지 마, 테사.’

그동안 잊고 있었던 다정한 목소리에 테사는 코가 찡해 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애써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으며 마니가 내민 숟가락을 입에 집어넣었다. 따뜻하고 구수한 스프가 입 안을 기분 좋게 데워주었다.

“맛있죠?”

“……네, 맛있어요.”

“이거 먹고 푹 주무시고 일어나면 씹을 수 있는 음식을 준비해 드릴게요. 드신 게 통 없어서 선생님께서 처음에는 이런 스프가 좋다고 하셨거든요. 뭘 좋아하세요?”

“좋아하는…… 거요?”

마니의 물음에 테사는 저도 모르게 당황하고야 말았다. 이곳에 온 뒤로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사실 그보다도 테사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을 자격이 있는지가 의문이었다. 자신이 ‘좋아’한다고 해서 그것을 요구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란 것을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런데 좋아하는 걸 말해 보라니…….

테사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가자 마니가 걱정스런 얼굴을 했다.

“부인, 괜찮으세요? 안색이 다시 안 좋아지신 것 같은데…….”

“……마니는 제게 왜 이렇게 잘해주세요?”

테사는 오래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 물음에 마니가 잠시 두 눈을 껌벅거렸다. 이런 질문을 받을 줄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저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매번 제게 잘해주시니까…….”

모진 학대로 테사가 성에서 철저히 고립되어 가고 있을 때, 마니는 그녀에게 도움을 준 몇 되지 않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늘 테사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리고는 자신이 도울 수 있는 곳까지 도우려고 애를 썼다. 그것을 테사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일개 하녀면서, 자칫하면 이 성에서 쫓겨날 수도 있는 처지면서 마니는 매번 테사를 위해 음식을 챙겨주었다. 밤에 테사가 성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때도 직접 촛불에 불을 밝혀 방까지 안내를 해주기도 했다.

“마니, 저는…… 당신의 호의를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베풀 줄도 모르는…… 무능한 사람인 걸요.”

“부인, 왜 그런 말을 하세요. 저는 이곳의 하녀인 걸요. 무언가를 바라지 않아도 부인의 시중을 드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하지만…….”

‘나 때문에 이미 한 사람의 인생이 망가졌어요. 당신도 나와 엮이면 나 때문에 불행해질지도 몰라요.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요.’

내뱉지 못한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테사는 이런 제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지레 겁을 먹는 이유는, 자신이 원장이 말했던 것처럼 멍청하기 때문이리라. 그렇지만 이 또한 어쩔 수 없었다.

마니는 심성이 고운 사람이었다. 테사는 그런 사람이 불행하지 않기를 바랐다. 만에 하나 작은 확률이라도 자신으로 인해 그녀에게 불행이 닿지 않았으면 했다. 언제 또 이 멍청함으로 제 주변인들을 지옥에 빠트릴지 모르니까.

죽고 싶을 만큼 힘든 건 자신 하나만으로 족했다.

그 때 마니가 단호히 대답했다.

“그리고 저뿐만이 아니에요. 이제 이곳의 모두가 부인을 성심껏 모실 거예요. 그래야만 하고요.”

“그게 무슨…….”

“이곳의 주인이 되신 새 영주님께서 그리 하라 지시하셨으니까요.”

테사의 고개가 곧장 들려졌다.

“헤르……. 기사님께서요?”

“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선생님 말대로 몸을 회복하는데 신경 쓰시도록 하세요. 영주님께서 돌아오시면 좋아진 모습을 보여드려야죠.”

“하, 하지만 기사님은 저를…….”

헤르트는 나를 증오하는데…….

테사는 헤르트의 의중을 알 수 없어 불안해졌다.

역시 골골대는 여자를 안는 건 별로였나. 그래서 몸을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헤르트가 배신자인 자신에게 잘해줄 이유가 없었으므로 테사는 자꾸 그쪽 방향으로만 생각하게 되었다.

과거에 테사는 헤르트에게 지울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 그로 인해 지옥으로 떨어진 그는 그곳에서 살아 돌아왔고, 테사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 자리까지 왔다.

누가 보더라도 배신자에게 이런 배려를 해줄 필요는 없었다. 지하감옥에 가두지 않는 것만으로도 테사는 헤르트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제게 왜 이런 편의를 베풀어주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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