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화
잠시 두 사람의 사이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건 눈도 마주치지도 못한 채 몸을 움츠리고 있는 배신자뿐이었다.
“…….”
또다시 헤르트에게는 형언할 수 없는 화가 솟구쳤다.
“하…….”
기가 찼다. 인내심이 극에 다다랐다. 입을 꽉 다물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테사가 가증스럽기만 했다. 심지어 아까 전에는 저를 농락하듯 대놓고 남편의 초상화를 보며 슬퍼하지 않았나.
헤르트는 당장이라도 그녀의 목을 잡아 분질러버리고 싶었다. 머릿속으로는 이미 몇 번이고 테사의 목을 조르고도 남았다. 그의 앞에 있는 여자는 제 인생을 나락까지 끌어내린 배신자였으니까.
‘대체 나는 뭘 위해서…….’
동시에 속이 쓰렸다. 헤르트는 제 자신이 멍청하게만 느껴졌다. 돌아오질 않을 답을 기다리며 또 한 번 여자에게 기회를 주었던 자신이 이토록 얼간이 같을 수가 없었다. 병신 같은 새끼. 그리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렸나. 헤르트는 자조하며 말았던 주먹을 풀었다.
지금만큼 비참할 때가 없다.
결국 헤르트는 사납게 말을 쏟아냈다.
“또 그런 식이지.”
“…….”
“넌, 네가 내게 무슨 짓을 했는지는 기억이나 해? 아니, 한 번이라도 내게 미안함을 느낀 적이 있어?”
사내의 상체가 위협적으로 기울자 허옇게 질린 얼굴의 여자가 그제야 고개를 들어 헤르트를 쳐다봤다.
“사람을 병신으로 만드는 것도 한두 번이지! 어떻게, 매번…….”
무의식적으로 여자의 팔을 잡아 움켜쥐려고 했던 헤르트는 뼈밖에 남지 않은 팔뚝을 보고 손을 내렸다.
“……날 비참하게 만드는데!”
찬바람이 부는 겨울이었다.
그가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던 소녀는 느닷없이 그를 검투사노예로 팔아넘겼다. 그리고 그 대가로 부유한 늙은 영주의 부인으로 들어가 호의호식을 누렸다.
그가 가축만도 못한 노예가 되어 매일같이 살기 위해 검을 들었을 때 그녀는 좋은 옷을 입고 따뜻한 잠자리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산 것이다. 그것을 헤르트는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처음, 자신이 검투사노예가 된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이건 거짓이라고. 그녀가 제게 이런 짓을 벌였을 리가 없다고. 일이 잘못된 거라고. 무언가 오해했음이 분명하다고.
그러나 값비싼 드레스를 입고 웃는 얼굴로 스스로 마차에 올라서는 그녀를 지하에 갇혀 좁은 창 너머로 보았을 때. 자신을 팔아넘긴 서류에 믿었던 그 이름이, 그녀의 지장까지 찍혀져 있는 걸 보았을 때. 마지막으로 글을 배워 그녀가 제게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를 읽었을 때.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자신을 버렸노라고. 배신했노라고.
그 뒤로 몇 번이고 자살 충동에 휩싸였다. 좆 같은 삶. 더 살아봤자 뭐가 좋다고. 어차피 그에게 주어진 것은 검투사노예의 삶이었다. 상대방을 베고, 또 베고……. 죽을 때까지 남들 앞에서 광대처럼 칼을 휘둘러야 하는 삶.
그냥 스스로 목숨을 끊고 편해지고 싶었다. 계속 살아가기엔 이 모든 것들이 지긋지긋했다. 희망도 행복도 보이지 않는 무저갱. 그 안에서 헤르트는 지쳐 가고 있었다.
하지만 자살을 시도하려 할 때마다 테사가 생각났다. 그리고 알고 싶어졌다. 왜 자신을 배신했는지. 무엇 때문에 이리 제게 잔인하게 굴었어야 했는지. 정말 자신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는지.
그래서 살아남기로 했다.
끔찍한 나날들이었다. 사람이 어디까지 비참해질 수 있는지, 살아 있는 지옥이 어떤 것인지 그간의 시간을 통해 헤르트는 알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가장 끔찍한 건, 한때 자신이 그 여자를 가족 그 이상이라 생각하며 진심으로 믿었다는 것이었다.
웃기지도 않지.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했다는 게.
“널 죽여버리고 싶어.”
“헤, 헤르…….”
“근데 또 죽이고 싶지는 않아. 이상하지?”
헤르트는 천천히 테사에게 다가가 그녀를 막다른 곳까지 몰아넣었다. 벽에 다다라 더 이상 뒷걸음질도 하지 못하게 된 테사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얼굴로 바들바들 떨었다.
“이런 내가 앞으로 널 어떻게 해야 할까.”
“…….”
“어? 말해 봐. 내가 널 어떻게 해야 하지?”
위압스런 말투에 테사의 가슴께가 불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거렸다. 그녀는 코가 벌게진 채로 헤르트를 올려다봤다. 사내는 첫날처럼 금방이라도 목을 조를 듯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테사는 덜덜 떨며 나지막이 겨우 입을 열었다. 그리곤 여기에 오는 내내 생각했던 것을 말했다.
“……하세요.”
“뭐?”
“워, 원하시는 대로…… 저를……. 제, 죄를 모두 가, 갚을 수는 없겠지만…….”
“죄를 갚겠다고? 네가 어떻게.”
코웃음이 절로 났다. 헤르트는 죄를 갚겠다고 말하는 테사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지옥에서 보낸 지난 7년을 그녀가 무슨 수로 갚겠다는 건가. 심지어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과부가 된 이 상황에서 어떻게 갚겠다는 건지.
그러나 이어지는 상황에 헤르트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테사가 몸을 낮춰 무릎을 꿇더니 그의 바지춤에 손을 댔기 때문이었다. 버클이 제대로 풀어지기도 전에 헤르트가 반사적으로 테사를 밀쳐냈다.
테사는 그대로 바닥으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쓰러졌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도 헤르트처럼 당혹이 묻어나 있었다. 그가 왜 자신을 밀쳐 냈는지 알 길이 없다는 모양새였다.
“너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어처구니없음에 헤르트의 목소리가 잠시 높아졌다. 테사가 이전보다 벌게진 얼굴로 우물쭈물거렸다.
“가, 갚으려고…….”
갚아? 황당무계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내 헤르트는 짧은 헛웃음을 들이켰다. 테사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알아차린 까닭이었다. 갚겠다는 게 이런 식으로 갚겠다는 거였어?
“너 진짜…….”
헤르트는 어이가 없었다. 그와 동시에 테사가 괘씸했다. 직전에는 제 손이 닿는 것조차 싫다고 그리 버둥거렸으면서 이제 와서?
“웃기지마, 지금 나랑 장난해?”
“……이걸 원하시는 게…….”
“날 싫어하면서, 내 손이 닿는 것조차 불쾌해 하면서 나와 그 짓을 하겠다고? 그리고 누가 언제 이딴 짓 하라고―”
“……하, 할 수 있어요!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헤르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테사가 다급히 대답했다.
사실 테사는 헤르트에게 해명하고 싶었다. 그날 널 거부한 건, 네가 싫어서가 아니라고. 네 손이 닿아도 불쾌하지 않다고.
일찌감치 여기에 오기도 전에 마음을 굳게 다잡은 테사였다. 헤르트가 제게서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내어주자고. 그것이 이 하찮은 몸뚱이라고 할지라도. 테사는 그것을 증명하려 재차 헤르트의 바지춤에 손을 댔다.
하지만 긴장을 해서인지, 아니면 서둘러 입증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버클이 생각만큼 쉽게 풀어지지가 않았다.
테사는 떠는 손으로 어떻게든 바지춤을 풀어헤치고자 끙끙거렸다. 문제는 그 절박한 손길이 헤르트의 심기를 더욱 거슬렀다는 것이다.
‘결국 이런 식으로 나오겠다?’
헤르트는 자신이 그녀가 생각한 대로 행동하지 않자 그녀가 귀족으로서의 편안한 삶을 보전하려 다른 꾀를 쓰는 게 분명하다고 여겼다. 때문에 불쾌감이 치솟았다. 테사가 자신을 이용하려고 이런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누굴 색욕에 미친 자로 아나.
물론 첫날에 그녀를 덮치려고 했던 것은 순전히 충동적인 사고였다. 끝까지 배신의 이유를 말하지 않고 버티는 테사의 모습에 분노에 이성이 잡아먹혀 냉정하게 생각할 틈이 없었다.
그저 자신은…….
거기까지 생각한 헤르트는 주춤했다.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고? 단순한 충동이라고?
헤르트는 필사적으로 제 바지춤에 매달려 버클을 푸는 테사를 내려다봤다. 섬세하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의 허벅지와 골반을 붙잡고 중심을 더듬거릴 때마다 속에서 알 수 없는 느낌이 그를 자극했다. 심지어 잠옷 사이로 보이는 여체의 가슴골에 금세 아랫도리에 피가 몰리기 시작했다.
‘젠장, 이러면…….’
사실 헤르트는 여태껏 여자를 안아본 적이 없었고, 여자와 살을 맞대본 경험 또한 전무했다.
물론 동정을 뗄 기회가 완전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굴렀던 전장은 하루에도 수십, 수백 명이 죽어나가는 곳이었다. 처음에는 멀쩡한 병사들도 몇 달씩이나 생사를 넘나들며 피비린내를 맡고 있으면 미쳐 가기 일쑤였다.
그런 그들을 위해 군 사령부는 일부러 논다니들을 전장까지 끌고 온 적이 더러 있었다. 그러면 병사들은 짐승같이 여자를 안으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러나 헤르트는 그러지 않았다. 그 선까지 넘으면 정말로 자신이 짐승이 될 것 같은 기분이었기 때문이리라. 어쩌면 신념에 가까웠다. 무엇보다도 그는 여자들을 볼 때면 누군가가 떠올라 제대로 눈을 마주하지도 못해 동료들 사이에서 고자새끼라고 불릴 정도였다.
그런데 이제 와보니 억울할 따름이었다. 자신이 뭐라고 동정 따위를 지키고 있었나. 영원히 함께할 거라 생각했던 여자는 저를 배신하여 늙은 놈의 부인이 된 지 오래였고, 그것을 알고 있었는데. 심지어 지금은 먼저 제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유혹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충동적으로 말했다.
“……좋아. 한번 해보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