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화
농담조로 웃으면서 덧붙이는 랑그의 말에 헤르트는 조용히 반지를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았다. 그리고는 상자를 닫아 창밖으로 휙 던져 버렸다. 어쩌면 말을 열 필도 넘게 살 수 있는 물건을 아무렇지도 않게 버려버리는 상관의 행동에 랑그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걸 왜 버리십니까! 분해해서 잘만 팔면 분명 돈 될 텐데!”
“그거 팔아서 몇 푼이나 한다고.”
“재수 없어!”
랑그가 다급하게 창가로 다가가 아래에 있는 병사에게 지시해 상자를 수색하는 동안 헤르트는 마저 책상을 뒤졌다.
마침내 그의 눈에 작은 가죽수첩 하나가 들어왔다. 묶여 있는 끈을 풀고 안을 살펴본 헤르트는 이내 수첩을 잘 갈무리해서 품 안에 집어넣었다.
사실상 유테르트 영지쟁탈전은 이 수첩 하나를 손에 넣기 위해 벌어졌다고 봐도 무방했다. 보르웬 후작이 수첩을 찾아 오라며 영지쟁탈전을 벌일 것을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이 모든 것이 미친 짓거리라 생각했던 헤르트는 이젠 후작의 숨은 의도를 깨닫고 기가 찬 상태였다.
‘미친 여자.’
헤르트는 지금쯤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을 후작을 상기하며 자리에서 벗어났다.
“하아, 그것보다 별관의 귀부인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사이 병사를 시켜 겨우 반지 상자를 찾아낸 랑그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물었다. 헤르트는 문가로 다가가 문고리를 잡았다.
“보고 후 처분을 기다려야겠지. 특별한 지시가 없으면 알아서 처리해야 할 거고.”
“아, 그러면 경께서 아시는 그 귀부인도…….”
문고리를 잡은 손에 순간 힘이 들어갔다. 헤르트는 자신이 손대자마자 구석에서 울부짖으며 몸을 떨던 여자를 떠올렸다. 화가 나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간 첫날 이후로 헤르트는 테사를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부하에게 그녀가 앓아 누웠다는 것만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
사실 요 며칠 성을 정리하고 보르웬 후작과 연통하느라 테사에 대해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녀를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도.
가라앉았던 화가 다시금 머리를 들쑤신다.
“말 한번 잘 꺼냈네.”
헤르트는 힘을 주어 문을 열며 랑그에게 지시했다.
“그 여자, 깨어나는 대로 내 앞에 데려다 놔.”
***
안개 서린 마냥 시야가 희뿌옇다. 테사는 한동안 멍하니 허공만 응시했다. 뒤늦게 테사가 깨어난 걸 눈치챈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에구머니나. 부인, 정신이 좀 드세요?”
“무, 물…….”
테사는 일단 물부터 찾았다. 목이 아플 정도로 메말랐고, 머리가 무겁고 어지러웠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여자로 보이는 누군가가 테사를 일으켜 물을 건네주었다.
“천천히 마셔요, 천천히…….”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힘겹게 물 한 모금을 삼키고 나니 조금은 살 것 같았다. 그제야 테사는 조금씩 주변을 둘러봤다.
현재 테사가 있는 곳은 그녀의 방도, 마지막으로 보았던 방도 아닌 또 다른 낯선 방이었다. 이어 평소 그녀를 안쓰럽게 보던 늙은 주방 하녀, 마니가 옆을 지키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왜 여기에? 그리 생각하기 무섭게 주름진 손이 테사의 이마를 조심히 짚었다.
“일단은 무리해서 움직이지 마세요. 아직 열이 다 내리지 않았어요. 의사 선생님께서도 안정을 더 취해야 한다고 하셨구요.”
“……여, 기는…….”
“아, 별관이에요. 부인께서 쓰러져 계시는 동안 가문 사람들은 모두 여기 별관으로 옮겨졌어요. 그보다 물 좀 더 드세요. 목소리가 말이 아니시네요.”
쩍쩍 갈라지는 테사의 목소리에 마니가 호들갑을 떨며 물 잔을 다시 내밀었다. 테사는 일단 그녀의 말대로 물을 좀 더 마시기로 했다. 깨어나긴 했지만 아직도 속이 메슥거리고 머리가 빙빙 돌았다. 정신을 차리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테사가 물을 조금씩 마시는 동안 마니는 머리맡에 놓인 젖은 수건을 정리하며 묻지도 않은 현재 상황에 대해 주절주절 떠들어대었다. 테사는 입을 다물고 늙은 하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유, 요 며칠 말이 아니었어요. 남자들은 모두 잡혀서 불려가고……. 우리 여자들은 여기 별관에 갇혀 있다시피 있고. 말도 마세요. 처음엔 다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데요. 다행히도 지금까지 별다른 일은 없지만.”
“…….”
“아무래도 그 새 영주님이 소문대로 마냥 잔학무도한 존재는…….”
헤르트일 것이 뻔한 사내가 언급되자 테사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내리 깔았다. 그래, 이제부턴 헤르트가 유테르트 영지의 새 영주가 되는구나. 그러면 나는…….
“어머, 부인? 세상에 몸을 떠시네!”
어느새 몸을 떨고 있는 테사를 발견한 마니가 목소리를 높이며 근처에 놓인 숄을 가져와 어깨를 덮어주었다. 다시 한번 테사의 이마에 손을 대어 열을 확인한 그녀는 아까보다 열이 내려가지 않고 오히려 더 들끓자 부리나케 의사를 찾았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선생님을 불러올게요! 알았죠?”
테사가 붙잡기도 전에 마니는 급히 방 밖으로 달려 나갔다. 덕분에 홀로 방에 남게 된 테사는 흐려졌다 맑아졌다 반복하는 시야를 느끼고선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녀는 몸을 둥글게 말았다. 몸이 점차 뜨거워지는데도 이상하게도 추웠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확실히 제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 긴장이 풀려서 참아왔던 몸살이 온 것 같았다. 사실 멀쩡하면 그게 더 이상했다. 쓰러지기 전까진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으니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분명 앓아누웠을 터다.
‘그보다 헤르트는…….’
몸을 덮은 숄의 매듭 부분 끝을 만지작거리며 테사는 화가 단단히 난 채 문을 박차고 나간 헤르트를 떠올렸다. 쓰러지기 직전까지 그를 거부해서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는 점이 못내 가슴에 남았다. 또한 그가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과거와 너무나 달라진 헤르트와의 재회는 테사를 혼란스럽게 했다. 사실 테사는 그가 왜 자신을 죽이지 않고 살려두는지도 알 수 없었다.
더군다나 의사의 치료와 제 수발을 일일이 들어주는 하녀라니. 이건 늙은 남편이 살아 있을 때도 받아본 적 없는 호의와 특권이었다. 어쨌거나 배신자에게 베푸는 배려치고는 분에 넘치는 대우임은 틀림없었다.
‘헤르트는 내게 뭘 원하는…….’
그 순간 테사는 제 아랫도리를 거칠게 더듬던 커다란 사내의 손이 생각났다. 그가 분노에 차 제게 쏟아내었던 말들도. 테사는 어쩌면 헤르트가 제 몸을 원하는 건지도 모른다고 짐작했다.
‘놀라울 것도 없어. 헤르트도, 나, 남자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소년 시절은 이미 지나간 지 오래다. 헤르트는 더 이상 테사가 알던 소년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어엿한 기사 작위를 가진 사내였다. 그런 그가 여자를 상대로 욕정한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지금이 가장 혈기왕성할 나이 아니던가.
다른 부인들이 말했다. 등이 굽고 말 더듬는 백치라도, 단순히 침대를 데우고 하룻밤의 욕구를 풀기 위한 여자라면 거리낌 없이 안는 게 남자라고. 지금은 죽어버렸지만 테사의 늙은 남편도 그 쪼그라든 성기로 쉼 없이 아랫도리를 놀리지 않았던가.
심지어 헤르트의 입장에서 테사는 배신자이기도 했으니, 취하고 싶은 건 다 취하며 복수하고 싶을 터였다. 말마따나 아직 몸을 취하지 않아 죽이지 않고 살려놓은 걸 수도 있었다. 곧 죽을 것처럼 골골대는 여자를 안는 건 그라도 내키지 않을 테니까.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헤르트가 제게 죽음 말고도 다른 걸 원하고 있다는 것이.
설령 그것이 몸이라도 테사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나는 이제…… 잃을 것도 없는 걸.’
숫제 테사는 헤르트가 저를 실컷 취한 다음 죽여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죗값을 치렀다는 마음으로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테사는, 다시 헤르트를 만나게 된다면 이번에는 그를 거부하지 않겠다 생각했다. 아니, 차라리 자신이 먼저 그에게 제안할 생각이었다. 그게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속죄의 기회라고 여겼기에.
눈꺼풀이 다시금 서서히 감기려는 순간이었다. 일순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머지않아 문이 발칵 열리면서 병사 하나가 마니를 밀치며 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잠이 달아난 테사가 깜짝 놀라 두 사람을 쳐다봤다.
“지금 이게 무슨…….”
“부인, 지금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병사는 테사를 슥 쳐다보며 무성의한 투로 입을 열었다. 그 앞으로 내동댕이쳐진 마니가 힘겹게 다시 일어나 병사에게 항의했다.
“아니, 아직 다 낫지 않으셨다니까요! 아프신 분을 데리고 어딜 간다는 거예요. 대체 어느 신사가 귀부인을 이리 무례하게 대한 답니까!”
“저는 그저 명받은 대로 움직일 뿐입니다. 자꾸 이러시면 무력을 행사해 끌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병사가 위협하듯 테사가 있는 침대로 다가가는 시늉을 하자 마니가 급히 근처 난로를 뒤적이는 불쏘시개를 들었다. 여차하면 그것을 휘둘러 병사를 밀어내겠다는 모습이었다. 이에 테사는 일이 커지기 전에 그녀를 말렸다.
“마, 마니! 저는, 저는…… 괜찮아요!”
“하지만요, 부인! 지금 저 파렴치한 작자가……!”
“이유가 있어서…… 불, 렀을 거예요. 정말 저는…… 괜찮아요.”
여전히 몸은 무거웠고 열이 끓어올랐지만 테사는 애써 웃어 보이며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누가 그녀를 불렀는지는 뻔했다. 이곳에서 전 영주의 부인을 아무렇게나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새로이 영주가 된 자, 헤르트.
그러니 테사는 꼭 가야만 했다.
하지만 바닥에 서는 순간 테사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이며 넘어질 뻔했다. 마니가 서둘러 잡아주지 않았다면 바닥에 적연하게 코를 박고 엎어졌을 터였다. 추태도 그런 추태가 없었을 것이다.
“보세요, 아직 부인께서는 혼자 서 있는 것도 힘들 정도로 아프시다고요! 정말 너무한 거 아닌가요?”
비틀거리는 테사를 보란 듯이 마니가 병사에게 소리쳤다. 병사도 생각보다 테사의 몸 상태가 심상치 않자 곤란한 기색을 내비추었다. 자신도 그저 명받은 대로 움직였을 뿐인데 귀부인의 상태가 저럴 줄은 어떻게 알았겠는가.
“마니, 괜찮아요. 저 갈 수 있어요. 아니, 가야만 해요…….”
테사가 후들거리는 다리로 똑바로 섰다.
“세상에, 부인! 그 상태로 어떻게 가시겠단 거예요. 가시다가 큰일 나요. 게다가 옷을 제대로 갖춰 입으시지도 않았잖아요!”
마니의 말대로 숄을 걸쳤다지만 테사는 여전히 잠옷 차림이었다. 그 말에 병사가 테사를 흘긋거리다가 마니에게 들켜 눈 부라림을 당했다. 병사가 큼 흠흠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럼 옷 갈아입을 시간 정도는 드리죠. 하지만 오래는 못 드립니다.”
“아니에요, 이대로 갈게요. 숄을 걸쳤으니 괜찮아요.”
테사가 앞으로 한 발자국 나서며 대답했다. 옷차림은 중요하지 않았다. 헤르트는 그녀가 무엇을 입고 있든 신경 쓰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에게 중요한 건 배신자 테사지, 배신자가 입고 있는 옷이 아니었으니까.
“네에? 부인, 아무리 그래도……!”
“마니, 도와줘서 고마워요.”
테사가 단호하게 나가자 마니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좀체 테사를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결국 마니는 잡았던 테사의 팔을 놓아주었다. 테사는 아슬아슬했지만, 그래도 이제는 넘어지지 않고 똑바로 설 수 있었다.
“이제 절 안내해 주세요.”
테사는 병사에게 다가가 힘을 주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