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화
그다음 날부터 원장은 영애께 누가 되지 않도록 기본 예법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테사를 하루에 한 번 제 방으로 불러냈다.
인사하는 법, 식사하는 법, 뒷정리하는 법, 차를 우려내는 법 등등의 귀족식 예법은 외울 것도, 주의해야 할 것도 많아 단기간에 배우기에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테사는 즐거운 마음으로 열심히 임했다.
남작영애의 하녀로 어느 정도 품위를 지켜야 한다는 원장의 말과 더불어, 훗날 기사가 될 헤르트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헤르트에게는 고아원의 맏이로 원장의 일을 돕게 되었다고 둘러대었다. 때문에 둘이 같이 있는 시간이 줄어들자 헤르트는 섭섭해 했지만, 테사는 애써 모른 척했다.
자신도 한 사람 몫을 해내고 싶었고, 헤르트에게는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은 서로를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언제까지고 헤르트의 도움만 받으며 살 수는 없었으니까.
한 달 뒤, 중개인이 다시 찾아왔다. 중개인은 테사에게 서류 하나를 내밀며 이번에는 헤르트의 지장을 찍어 오라고 했다. 그가 견습기사로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서류라고 했다.
테사는 순순히 서류를 받아 들고, 헤르트가 잠자는 사이에 그의 지장을 몰래 찍어 중개인에게 건네주었다. 서류를 챙긴 중개인은 일주일 후에 다시 찾아올 터이니 비밀을 엄수하며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다시 사라졌다.
중개인을 배웅하고 방으로 돌아가던 테사는 저를 미심쩍은 얼굴로 쳐다보고 있는 헤르트와 맞닥트렸다.
‘너 내 방에 몰래 들어왔더라?’
‘어? 어, 그게……. 저, 전에 두고 간 물건이 있는 것 같아서. 미안, 나 때문에 깼어?’
‘수상한데. ……테사, 너 나한테 뭐 숨기고 있는 건 아니지?’
‘뭐? 아, 아냐. 그럴 리가 없잖아.’
이후에도 헤르트는 집요하게 캐물었지만 모든 것이 확정된 날 깜짝 선물로 알리고 싶었기에 테사는 그의 물음에 시치미를 뗐다. 그와 상의하지 않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으나 흔치 않은 기회이니 분명 헤르트도 좋아할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테사는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일주일 후, 약속대로 중개인은 아주 예쁜 드레스를 들고 테사를 찾아왔다. 그날 테사는 난생처음으로 몸에 맞춘 드레스라는 것을 입어보았다. 원장까지 힘을 보태어 테사를 귀족 아가씨처럼 꾸며주었다. 옷이 날개라는 말처럼 테사는 달라진 제 모습을 보고 놀라워했다. 그녀는 중개인의 제안을 수락하기 잘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은 이다음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드레스를 입은 테사에게 중개인은 갑자기 오늘 당장 떠나야 한다고 했다. 예정에도 없던 통보에 테사는 당황했으나 중개인은 이유도 말해 주지 않고 재촉만 할 뿐이었다. 심지어 헤르트는 원장의 심부름 때문에 부재중이었다.
‘하, 하지만 헤르트에게 말도 못 했는데…….’
‘어차피 거기서 만날 건데 뭘 그리 꾸물거려. 아가씨, 얼른 가야 한다니까? 높으신 분들은 우리를 기다려주질 않아요!’
할 수 없이 테사는 헤르트에게 편지라도 남기고 가기로 했다. 원장은 글을 모르는 테사 대신, 그녀가 말하는 것을 빠르게 적어주었다.
그렇게 테사는 헤르트에게 편지 한 장을 남기고, 마차를 타고 고아원을 떠났다. 마음 한편으로 불안함을 느꼈지만 모든 것이 잘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마차에서 내려 남작가의 사람들을 만난 테사는, 이 모든 것이 거짓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너 진짜 멍청하구나? 너 같은 고아를 왜 내 하녀로 쓰겠니. 넌 그저 내 대신일 뿐이야.’
테사는 남작영애의 하녀로 간 것이 아니었다. 늙은 영주의 첩으로 팔려가게 된 남작영애의 대용품이었다. 콕 집어 진저빛 머리카락의 하녀를 구한다는 소리도 그것 때문이었다.
중개인과 원장은 철저히 테사를 속이고 남작에게 그녀를 팔아넘겼던 것이었다.
더불어 그녀가 속아 넘어간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말도 안 돼…….’
테사가 헤르트 몰래 그의 지장을 찍었던 서류는, 평민으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검투사노예로 파는 것에 동의하는 것이었다.
테사가 목숨을 걸고 남작가에서 탈출하여 원장을 찾아갔던 날, 원장은 대놓고 테사를 비웃었다. 멍청한 년이라고. 남은 한 가닥의 희망마저 사라지자 테사는 절망했다.
아니라고. 그럴 리 없다고. 이건 다 거짓이라고 부정하고 싶었다. 대체 왜? 이런 일이 제게 벌어졌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테사는 제 손으로 헤르트를 팔아넘겼다는 사실에 더욱 미칠 것 같았다.
‘내가, 헤르트를, 헬을……. 아니야! 아니라고!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못 가, 난 못 가! 헬! 헬……!’
뒤늦게 남작가에서 온 하수인들에게 질질 끌려가면서 테사는 울부짖다 결국 졸도했다.
이 뒤로는 지옥의 연속이었다.
테사는 남작가에서 가장 높은 방에 갇혔다. 아무리 내보내 달라고 소리치고 문을 긁어도 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으면 헤르트를 찾아내어 죽여버릴 거라고 협박했다. 대신, 순순히 유테르트 영주의 후처가 되면 헤르트의 뒤를 봐줄 수도 있다고 했다.
당장 아무 대책도 힘도 없었던 테사는 결국 남작영애를 대신하여 늙은 영주에게 팔려가는 것을 선택했다. 그렇게라도 헤르트를 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헤르트의 사망 소식이었다. 검투사노예로 팔렸으니 당연한 거라고, 소식을 전하러 온 남작가의 하인이 그리 말했다.
그날 테사는 기절하기 직전까지 울음을 토해내고 또 토해내었다. 온몸이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하염없이 울었다.
나 때문이야. 나 때문에 헤르트가 죽었어.
내가 헤르트를 죽인 것이나 다름없어.
내가, 헤르트를 죽였어.
테사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그러나 세상은 끝까지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헤르트를 따라가기 위해 몇 번이나 시도를 했지만 번번이 죽는데 실패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헤르트는 그리 쉽게 죽어버렸는데 정작 그를 죽게 만든 자신은 죽지 못한다니. 테사는 하늘을 원망하고 저주했다.
‘제발 나 좀 데려가요, 제발…….’
반복되는 자살 소동에 침대에 묶이고 나서야 테사는 더 이상 죽으려 하지 않았다. 문득 이 모든 것이 멍청하여 헤르트의 인생을 망친 제게 내려진 벌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자신은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살아서 이 죗값을 달게 받아야 하니까.
이후 죽지 못해 사는 것을 택한 테사는 낮에는 영주의 아들이 이유 없이 휘두르는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폭력을 받아내야 했고, 밤에는 주기적으로 남편의 쪼그라든 성기를 구역질 날 정도로 빨고 핥아야 했다. 꿈에서는 증오의 낯을 한 헤르트가 그녀를 찾아와 원망 서린 말들과 함께 목을 졸랐다.
‘네가 날 노예로 팔았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아아…….’
‘죽어, 죽어버려!’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나날의 연속이었다.
테사는 매일 아침 눈을 뜨기가 두려웠고, 매일 밤 잠에 들기가 무서웠다.
‘흐윽…….’
간혹 말을 듣지 않아 독방에 갇힐 때면 테사는 과거를 회상했다.
오래전, 볕이 가득 내리쬐는 들판을 뛰어다니며 놀았던 때. 그녀와 헤르트는 화관을 하나씩 만들어 서로에게 씌워주고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먼 훗날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곤 했었다.
‘헬, 너는 나중에 뭘 하고 싶어?’
‘……기사. 기사가 되어서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거야.’
‘그거 아주 멋진데? 꼭 동화 속에 나오는 기사님 같잖아.’
‘그러는 테사, ……너는?’
‘음, 나는…… 그냥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그래서 이 고아원을 나가 작은 집에서 내 마음대로 하며 살 거야.’
‘혼자서?’
‘아니, 당연히 너랑 같이 살 건데?’
그 말에 당시 헤르트가 무어라 대답했던가.
‘그래, 꼭 그렇게 살자.’
테사는 울음을 반사적으로 토해냈다.
한때는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부모에게도 버림받은 밑바닥 인생이지만 언젠가는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그리 희망을 가졌다. 가족이나 다름없는 헤르트가 옆에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주제넘은 착각임을 이제는 안다.
테사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바닥에 웅크렸다.
‘넌 정말 나쁜 년이야.’
숨이 막혔다. 뜨거운 열기에 잠식되는 기분이었다.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기도 했다. 테사는 몸부림을 치며 끊임없이 도리질을 쳤다. 아니야, 헬. 그러지 마. 나도 내가 원한 게 아니었어.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았어.
나는 너를…… 배신하지 않았어.
‘테사.’
다정했던 소년의 목소리.
정말 죽고 싶을 때마다 언제나 간절히 다시 한번 듣고 싶었던 부름이기도 했다. 그러면 조금은 더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지 못해 살아왔다고 하지만, 사실은 남들처럼 행복하게 살고 싶어 살아왔던 것이다. 그렇게 지금까지 이 부질없는 목숨을 이어왔다.
‘테사.’
찬란한 금발에 눈이 부셨다. 짙푸른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테사는 저를 어루만져 주는 따스한 손길에 길고 길었던 꿈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은 암흑이었다.
***
성을 정리하는 일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전 영주의 최측근들은 이미 달아난 지 오래였고 성을 지키고 있던 건 별 볼일 없는 하수인들이 대부분이었다.
헤르트는 보르웬 후작이 제게 붙여준 재정관을 불러 왕에게 공물로 진상할 것들만 추려 목록을 만들라 지시했다. 어차피 이외의 것들은 약속받은 대로 모두 그의 것이 될 예정이었다.
헤르트가 집무실 책상 서랍을 뒤지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갈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앳된 얼굴의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1년째 헤르트의 밑에서 일하고 있는 부사관, 랑그였다.
각 잡힌 발걸음 소리에 비해 가벼운 음성이 이어졌다.
“부사관 랑그 제프리, 보고드립니다. 현재 별관을 제외한 본관과 부관의 수색 및 간자 색출을 완료하였습니다. 이외 특별 사항 없으며, 이상입니다.”
“소후작은?”
헤르트는 고개 한 번 들지 않고 서랍을 마저 뒤지며 물었다. 그의 손이 닿는 족족 서랍 안이 엉망진창 어지럽혀졌다. 랑그는 반듯하게 서서 답하면서도 제 상관이 찾는 것을 유심히 바라봤다.
“아직 추적 중입니다. 멀리 가진 못했을 테니 반나절 내면 잡힐 겁니다. 무엇보다 보슈 경이 투입되었으니 시간문제겠죠. 그보다 뭘 찾고 계십니까?”
이제는 서랍을 통째로 빼서 그 안의 물건들을 책상 위로 와르르 쏟아내는 헤르트를 보며 랑그가 눈썹을 들썩였다. 중요한 물건이나 문서들은 이미 수색조가 한 차례 털어간 후였다. 구태여 다시 뒤질 필요가 없었다.
“신경 꺼. 개인적인 거니까.”
“아, 네.”
차가운 대답에 랑그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헤르트는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벨벳 소재의 상자를 발견했다. 상자를 열자 줄지어 정리되어 있는 반지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섬세히 세공되어 있는 값비싼 반지들이었다. 어렴풋이 수를 헤아리니 일곱 개였다.
이를 본 랑그가 고개를 흥미롭게 주억거렸다.
“결혼반지네요. 하긴 별관에 있는 부인들만 해도 여럿이니 반지도 여러 개가 되겠군요.”
“나도 알아.”
안타깝게도 반지들은 그가 찾는 것은 아니었다. 헤르트는 생각 없이 상자를 닫으려다가 중간에서 작은 에메랄드가 박혀 있는 반지를 발견했다. 다른 것들에 비해 링 자체가 가늘고 보석 하나만 있는 볼품없는 반지였다. 보석 또한 하등품으로 질이 낮아 보였다.
헤르트가 그 반지 하나만 들어 보이자 랑그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손버릇이 나쁘십니다. 아무리 그래도 결혼반지는 좀…….”
“안 가져. 줘도 가질 생각 없거든.”
“취향이 좀…….”
보다 못한 헤르트가 노려보고 나서야 까불대던 랑그가 제 상관의 눈치를 살폈다. 그럼에도 그는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근데 의외네요.”
“뭐가.”
“그 반지 말입니다. 결혼반지인데 너무 성의 없지 않습니까. 왜, 그렇잖아요. 상대가 유테르트 후작인데 저런 반지를 결혼반지로 골랐다는 건……. 여자 쪽 수준이 바닥이지 않고서야 선택하기 어렵죠.”
그들이 사는 므슈 왕국에서는 결혼할 때 남녀가 각자 서로의 반지를 준비해 오는 것이 관습이었다. 즉 헤르트가 현재 들고 있는 반지는 죽은 영주의 수많은 부인들 중 한 명이 결혼하면서 가져온 반지란 소리였다.
헤르트는 다시 한번 반지를 살펴봤다. 확실히 후작 정도 되는 귀족의 결혼반지치고는 상당히 급이 떨어지는 모양새였다.
“반지만 보면 여자 쪽이 팔려 온 줄 알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