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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배신을 알지 못하여-4화 (4/138)

004화

그 때 헤르트가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잡아챘다. 그 우악스러운 힘에 테사는 크게 비명을 지르며 손톱끝으로 벽을 긁었다. 다시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한 탓이었다.

“시, 싫어, 싫어요! 놔주세요, 제발!”

언제나 그랬다.

테사는 구석으로 도망쳤고, 그다음은 억센 손길에 붙잡혀 다시 끌려갔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매서운 손찌검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끌려가지도 손찌검이 이어지지도 않았다. 테사가 비명을 지르기 무섭게 손이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테사는 아주 잠시 충동적으로 뒤를 돌아보려다가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다시 고개를 수그렸다.

“……너, 내가 무서워?”

헤르트는 제 앞의 여자를 내려다봤다. 구석에 얼굴을 처박고 어린애처럼 엉엉 우는 여자는 누가 보아도 겁에 질린 상태였다. 그는 이쯤에서 그만해야 한다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으나, 알 수 없는 분노가 다시금 그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배신자 주제에 이런 모습을 하는 건 반칙이잖아.

테사가 저를 밀치고 구석으로 도망을 갔을 때, 헤르트는 반쯤 나갔던 정신이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가슴은 뜨겁다 못해 저릿했다.

빌어먹을. 헤르트는 손을 말았다 폈다 하며 이를 꽉 악물었다.

이윽고 그는 어깨를 옹송그리며 최대한 구석으로 더 파고들려 하는 테사를 가만히 응시했다. 온몸이 배신감으로 들끓었다.

헤르트는 참지 못하고 따지듯이 입을 열었다.

“말해 봐, 손대면 소름 끼칠 정도로 내가 무섭고 싫어? 그래서 지금 나한테 보란 듯이 이러는 거지? 어?”

“흐윽, 죄, 죄송, 흑, 끅…….”

그러나 패닉에 빠져 정신없이 울고 있는 테사에게 헤르트의 말이 닿을 리가 없었다. 잠시간 테사를 내려다보던 헤르트는 화를 참지 못하고 근처에 있던 가구를 발로 찼다. 우당탕탕! 가구 위에 있던 물건들이 일제히 바닥으로 나동그라지면서 소란을 자아냈다.

“씨발!”

고작 저 꼴을 보자고 그 지옥에서 살아 돌아왔나.

헤르트는 여전히 울며 덜덜 떠는 테사가 가증스럽기 그지없었다. 자신을 팔아 한 자리 차지했으면서 지금처럼 피해자인 척할 건 무엇인가. 누가 보면 그들의 사이에서 상대를 배신한 이는 헤르트일 줄 알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그를 화나게 만드는 것은…….

그가 알던 소녀의 모습이 좀처럼 보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차마 더는 테사에게 손댈 수 없었던 헤르트는 참아왔던 말을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넌 정말 나쁜 년이야.”

그 말을 끝으로 헤르트는 문짝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문을 세게 박차고 나가 사라졌다.

“…….”

방 안에 조용한 적막이 찾아오고 나서야 테사는 조금씩 울음을 그쳤다. 하지만 눈가에선 계속해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손등과 옷자락으로 쏟아지는 눈물을 닦아내며, 테사는 다시 한번 더 참을 수 없는 비참함을 느꼈다.

‘죽고 싶어, 역시 나 같은 건…….’

이제는 정말로 헤르트에게도 버려졌다. 테사는 꾸역꾸역 몸을 말아 웅크리며 훌쩍였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기분이었다. 씁쓸한 후회도 밀려왔다.

반항하지 말 걸. 이 몸뚱이 따위가 뭐라고, 그에게 싫다고 말했을까. 그럴 자격조차 자신에게는 없는데. 그냥 참고 인내할 걸.

테사는 헤르트가 제게 한 말들을 잊을 수가 없었다.

배신자, 나쁜 년.

틀린 말이 없었다. 한계까지 밀어붙여진 테사는 올라오는 토기와 자괴감을 견디지 못하고 정신을 놓기 시작했다. 시야가 점차 흐릿해졌고 천장이 빙빙 돌았다. 어둠이 그녀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테사는 이대로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그날 이후로, 언제나.

<2. 죄와 벌>

‘순진하긴.’

원장은 화려한 공작새털이 달린 깃펜으로 장부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 늙은 여자의 시선은 아까부터 줄곧 장부에 고정된 상태였다.

테사는 자신이 그날의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것이 진창으로 처박혔던 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했던 자신.

그것을 증명하듯 꿈속의 테사는 새파란 얼굴로 온몸을 떨고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이런, 안타까운 일이구나.’

죄책감이라곤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뻔뻔한 원장의 작태에 테사는 숨이 막혔다. 충격이 컸던지라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런 테사에게 원장은 너스레를 떨며 웃어 보였다.

‘왜 그런 얼굴이야? 결국 결정한 건 넌데. 계약서 안 읽어봤니?’

‘이, 이건 저, 정당하지, 않, 은…….’

‘멍청한 년. 아직도 그 짝이니 읽지도 못하는 계약서에 순순히 지장이나 찍었겠지.’

냉소적으로 중얼거리는 원장의 말이 아직도 선명했다.

낮은 음높이. 끝이 올라가는 발음. 잇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비웃음과 호선을 그리는 새빨간 입술. 가축을 보는 듯한 개암빛의 눈동자와 주름이 자글자글한 눈가.

테사는 단 한 번도 이날을 잊은 적이 없었다. 애당초 잊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왜, 왜…… 대체 왜…….’

‘내가 원망스럽니? 나보단 네 멍청함을 원망하렴.’

어느새 테사는 서서히 멀어지는 원장의 얼굴 뒤부터, 주변이 온통 암흑으로 물들어 가는 것을 알아차렸다. 가지 마요, 가지 마! 원장을 붙잡기 위해 손을 뻗어보았지만 으레 그랬듯이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번에도 테사는 암흑 속에 홀로 남겨졌다.

얼마 후 저 멀리 익숙한 장소가 그림자 속에서 흐물흐물 그려지며 그녀에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테사가 오랫동안 지내왔던, 낡은 교당을 수리하여 만든 곳. 붉은 벽돌 위로 흐드러지게 피어난 넝쿨꽃이 아름다웠던 피츠럴드 고아원.

테사와 헤르트가 함께 자란 곳이었다.

‘또 시작이야.’

테사는 맨발로 덩그러니 서서 고아원을 누비는 아이들을 쳐다봤다.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를 악몽이었다. 어느새 태평한 얼굴들과 재잘거리는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질거렸다. 그리고 그중에는 테사의 시선을 사로잡는 두 명의 아이가 있었다.

구불거리는 진저빛의 머리카락을 높게 묶은 여자애와 얼굴에 상처를 가득 달고 있는 남자애.

여자애는 넘어진 남자애에게 손을 뻗어 일으켜주고 있었다.

‘내 이름은 테사야. 너는?’

‘……헤르트.’

‘멋진 이름이네!’

여자애의 경쾌한 웃음에 남자애가 고개를 푹 숙이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남자애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헬이라고 불러도 돼.’

그 말을 끝으로 두 아이가 암흑 속으로 사라지고 테사는 왈칵 눈물을 터트렸다. 평범하다면 평범했던 첫 만남. 다른 아이들보다 한 발 늦게 고아원에 들어와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헤르트를 테사가 도와주면서, 두 사람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싫어, 그만해. 보기 싫단 말이야!’

테사는 고꾸라지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잖아…….’

고아원 시절에 테사와 헤르트는 어디를 가든지 늘 함께하곤 했다. 테사가 있는 곳에 헤르트가 있었고, 헤르트가 있는 곳에 테사가 있었다. 딱히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서로가 가장 편했기에 함께였다. 돌이켜보면 그때만큼 행복했던 날들 또한 없었다.

테사는 그 행복함이 오래도록 계속 이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당장은 아무것도 없지만 조금씩 사정이 나아질 거라고. 훗날에는 마음껏 웃으며 서로의 꿈을 이루는 날도 분명 올 거라고.

이뤄질 수도 있던 꿈이었지만 그때는 몰랐다.

한낱 자신의 선택이 두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줄을.

테사는 제 무지와 순진함이 가져온 미래를 알기에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저를 부르셨다고 들었어요.’

그해 겨울은 혹독한 가뭄이 들어 모두가 배를 곯았다. 사람들의 후원금으로 운영되던 피츠럴드 고아원도 재정난에 시달리던 참이었다. 당시 테사는 평소 몇 번 보지 못한 원장이 자신을 호출하자 불안함과 동시에 초조해졌다.

여태까지 고아원에서는 아이들이 일정 나이가 되면 독립하기를 종용해 왔고, 그해 테사와 헤르트는 고아원생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았다. 그들이 독립하기로 예정된 시기는 다음 해 봄이었지만 상황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었다.

테사는 한겨울에 쫓겨날까 두려웠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은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테사, 좋은 자리가 들어왔단다.’

원장실에 도착한 테사는 먼저 원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중개인에게 일자리를 제안받았다.

고아원을 후원하던 남작이 아픈 딸과 함께 왕도로 올라갈 말동무 하녀를 구하고 있는데 해보지 않겠냐고. 남작영애께서 자신과 같은 진저빛 머리카락을 가진 하녀를 원한다면서. 심지어 테사가 영애의 하녀가 되면 헤르트를 가문의 견습기사로 받아준다고도 했다.

그건 하잘것없는 고아 계집에게는 분에 넘치는 좋은 기회였다. 더불어 원장은 테사에게 그간 말을 잘 들어주었기에 좋은 일자리를 주선해 주는 거라며 그녀를 추켜세워 주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아. 어차피 내년 봄에 독립해야 하는데 잘 생각해야 하지 않겠니?’

돈도 많이 받을 수 있다는 말에 테사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따금씩 덤벙대는 자신에게 헤르트가 신중하라고 종종 언질을 주긴 했지만, 테사는 이 기회만큼은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무엇보다 자신은 물론이고 헤르트까지 견습기사로 받아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린 시절부터 줄곧 기사가 되기를 꿈꿔왔던 헤르트였다. 테사는 그런 헤르트를 도와주고 싶었다. 또한 테사는 그의 검 실력을 믿었다. 열일곱밖에 되지 않았지만 헤르트는 웬만한 성인보다 검을 잘 다뤘다. 그는 가르침만 받으면 금방 기사로 활약할 수 있는 인재였다.

테사는 헤르트를 위해서라도 제안을 수락했다.

중개인은 두 장의 서류를 내밀며 지장을 찍으라고 했다. 물론 제대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테사는 당연히 까막눈이었고 서류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는 아무리 들여다봐도 알 수가 없었다. 그녀의 주변에서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곤 원장과 일부 지도사들뿐이었다.

원장은 형식상의 절차라며 서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테사는 큰 의심 없이 서류에 지장을 찍었고, 중개인은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해야 한다는 당부와 함께 히죽 웃으며 떠나갔다. 원장 또한 지금껏 보아온 중 가장 상냥한 웃음을 지으며 잘했다고 속삭였다.

헤르트에게도 비밀로 해야 한다는 점이 수상쩍기는 했으나, 테사는 그저 귀족과 얽힌 일이기에 철저하구나, 하고 말았을 뿐이었다.

이제 와 보면 멍청하기 짝이 없는 순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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