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화
헤르트는 테사의 멱살을 잡았다. 테사가 반사적으로 미약하게 반항했지만 그것이 무색하게도 그녀는 힘없이 그에 손길에 휘둘렸다. 목이 죄여 숨이 더욱 막혔다. 심장이 당장이라도 터질 듯이 두방망이질을 해댔다. 무서워. 테사는 막 태어난 사슴 새끼마냥 숨을 헐떡댔다.
“좋은 말 할 때 눈 떠. 똑바로 날 보라고.”
헤르트의 협박에 테사는 억지로 눈을 떴다. 그러다 쏟아지는 아득한 노기에 몸을 떨었다. 사내는 얼굴을 사정없이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분노를 주체할 수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떨리는 눈동자가 상처받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테사는 저 혼자만의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제게 상처받을 일이 무엇이 더 있겠는가.
헛된 희망이 만들어낸 환상일 것이다. 제 자신이 헛것을 보는 것은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으니.
‘테사.’
간혹 테사의 정신이 한계까지 몰리면 헤르트는 때때로 앞에 나타나 그녀를 원망하기도 했고, 위로하기도 했으며, 애원하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을 죽여 데려가 달라는 테사에게 따끔하게 혼을 내며 꾸짖었다가 안쓰러워했고 어느 순간은 갑자기 증오하기도 했다.
그러니 잘못 본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은 또다시 헤르트에게 상처를 준 꼴이 되는 거니까.
“죽이라고? 너를?”
별안간 어처구니가 없다는 목소리와 함께 헤르트가 윽박질렀다.
“지금 상황 파악이 덜 되었나 본데, 너한테 선택할 권리라도 있는 줄 알아? 누구 마음대로 죽을 생각을 해!”
선택할 권리. 그 말에 사시나무 떨듯 요동치던 테사가 우뚝 굳었다. 올리브빛의 여린 눈동자 또한 단숨에 빛을 잃었다. 테사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넋을 잃은 얼굴로 헤르트를 응시했다. 그 공허한 눈빛에 헤르트가 잠시 움찔한 사이 테사는 힘을 빼고 온몸을 늘어뜨렸다.
잠시 잊고 있었다.
제게 선택할 권리 같은 게 있을 리가.
애초부터 한낱 고아인 테사에게는 날 때부터 선택할 권리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다. 그건 테사가 인생을 통틀어 뼈저리게 깨달았던 것들 중 하나였고, 변하지 않을 현실이기도 했다.
유테르트 영지에서 살아온 지난 7년 동안 테사의 생각과 의지는 언제나 거세당했다. 다른 이가 똑바로 세워주지 않으면 매가리 없이 고개를 툭 떨구며 바닥에 머리를 처박는 인형. 그것이 이곳에서 테사의 역할이자 존재의 이유였다.
그러니 날 때부터 없던 것이 지금에 와서 갑자기 생겼을 리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인형과 다름이 없었고, 그저 남들이 원하는 대로 소모품처럼 평생 휘둘리는 삶을 살 운명인 것이다.
제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없는 노리개로.
그래, 그렇게나 잘 알고 있던 사실이었는데…….
헤르트가 앞에 있으니 예전으로 돌아간 듯 저도 모르게 헛된 꿈을 꾸고야 말았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그때로, 둘이 함께였기에 가장 행복했던 그 시절로.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날로.
“……죄, 송해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테사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뭐 하자는 거야?”
테사의 반응에 헤르트가 발칵 화를 냈다. 선택할 권리가 없다는 소리를 하자마자 여자가 몸을 축 늘어트린 채 다 포기한 사람마냥 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이상하게도 헤르트의 심기를 몹시 거슬렀다.
이 반응은 대체 뭔데.
왜 네가 이런 모습을 하는 건데.
결국 헤르트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사납게 입을 열었다.
“하, 웃기지도 마. 그렇게 나오면 내가 널 동정하기라도 할 것 같아? 불쌍한 척은 집어치워! 널 쉽게 놔줄 생각이었으면 그 지옥에서 아득바득 살아 돌아오지도 않았어. 내가 어떻게…… 어떻게 살아 돌아왔는데!”
살육이 난무하고 온갖 배반과 악행이 들끓었던 진창 속에서 헤르트는 미칠 것 같은 정신을 가까스로 부여잡고 살아남았다. 오직 단 하나, 저를 배신한 소녀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 그리고 그 이유를 묻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제 앞의 여자는…….
“빌어먹을……! 넌 내게 대가를 치러야 해. 그러니 그딴 같잖은 모습은 집어치워. 이제 와 동정을 바라는 거면 소용없을 테니까.”
어득한 사내의 분노에 테사는 흠칫 몸을 떨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인내하고 모두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헤르트의 말대로 그녀는 그에게 대가를 치러야 했고, 그는 그녀에게 그럴 자격이 충분했으니까.
“젠장!”
헤르트가 돌연 욕을 내뱉었다. 무언가 단단히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새였다. 그는 화풀이를 하듯 테사를 바닥으로 밀치고 제 허리춤에 손을 대었다. 테사는 저를 향할지도 모를 쇠붙이를 생각하며 두 눈을 감았다.
그러나 이어 들려오는 것은 그가 허리춤에 달린 무기들을 통째로 바닥으로 내동댕이치는 소리였다.
무기들이 바닥을 구르며 내는 쨍한 소음에 테사는 헤르트의 의중을 알 수 없어 낮게 호흡하며 기다렸다. 무엇을 하려는 걸까. 그리 생각할 쯤이었다.
헤르트가 처음처럼 테사의 팔을 우악스럽게 쥐고 일으켰다. 그리고는 탁자 쪽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내 마음대로 하라고?”
헤르트는 테사를 거칠게 탁자 위로 밀어붙였다. 윽, 턱이 탁자와 부딪히며 그 반동으로 입술이 조금 찢어지자 따끔한 아픔과 함께 비린 피맛이 났다. 입 안이 텁텁했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커다랗고 차가운 손이 슬립 형태의 잠옷을 들추고 허벅지 안쪽을 거칠게 만지자 테사의 몸이 굳었다. 당혹스러움에 그녀의 입이 자연스럽게 열리며 소리가 새어 나왔다.
“뭐, 뭐 하는……!”
“내 마음대로 하라며?”
허벅지 안쪽을 파고들었던 손이 더욱 위로 올라갔다. 이윽고 헤르트의 손이 은밀한 부위에 닿자 테사가 퍼득거리며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버둥거렸다. 시, 싫어, 싫어! 생소한 감각에 몸이 본능적으로 거부 반응을 보였다. 특히 상대방이 헤르트라는 점이 한몫했다. 그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기에.
“가만히 있어. 왜, 이건 예상 못 했나 봐? 고작 그 정도 패기로 나한테 마음대로 하라고 지껄인 거야? 아니면 귀족 마님으로 고상하게 사느라 이런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나 보지.”
“그, 그게 아니, ……악!”
헤르트가 반항하는 테사의 상체를 탁자 위로 눌러 붙였다. 테사는 크게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손을 뻗었다. 잠옷에 가려진 등의 상처가 쓰라리며 섬뜩한 고통을 자아냈다.
물론 테사의 상처를 알 리 만무한 헤르트는 제 손길에 그녀가 거세게 몸서리치자 눈매를 치켜떴다. 화가 더욱 크게 솟구쳐 올랐다.
“그래, 이제 나 같은 새끼는 손이 닿는 것도 싫겠지.”
“아, 아냐, 그렇지, 윽!”
“근데 그거 알아? 넌 처음부터 내 거였어. 다 죽어가는 그 늙은이가 아니라, 네 옆에 있어야 할 건 나였다고……!”
으득, 어금니를 악문 헤르트는 여전히 테사의 등을 꽉 눌러 그녀가 반항하지 못하게 고정했다. 때문에 테사는 아픔에 몸을 비틀면서도 그에게서 벗어나질 못했다. 얼마 가지 못해 그녀는 탁자에 엎어진 채 헤르트에게 엉덩이를 내민 꼴이 되었다.
“여길 벌려 들어가는 것도, 씨를 뿌리는 것도 처음부터 내가 되었어야 했어.”
커다란 손이 손쉽게 속옷을 부득 찢어냈다. 꽉 다물린 붉은 음부가 차가운 공기 중에 그대로 노출되자 테사는 잠시 고통도 잊고 벌벌 떨었다. 이다음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를 정도로 그녀는 아둔하지 않았다. 애당초 남에게 밀부를 보여준다는 것은 그 행위를 의미했다.
‘이건 아니야, 이건…….’
이런 경험은 테사에겐 전혀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
테사는 결혼하여 늙은 남편을 얻었지만 그 영감하고는 좀처럼 배를 맞대어 본 적이 없었다. 억지로 쑤셔 넣다시피 했던 첫날을 제외하면 유테르트 후작은 구역질이 날 때까지 펠라티오를 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서 사정하고 잠에 빠져들었기 때문이었다.
헛구역질 나는 구토감과 비릿하고 역한 백탁액.
테사의 성경험은 그것이 다였다.
간혹 후작이 테사를 죄 벗겨 세워놓고 그녀의 몸을 희롱하며 구경하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멋대로 속옷을 뜯어내진 않았다. 테사 또한 제 아래를 제대로 살펴본 적이 없었다. 음욕을 알기도 전에 아녀자가 되었고, 색정에 빠진 늙은 영주는 웃기게도 제 부인들에게는 정숙을 요구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테사가 다시금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싫어, 싫어! 하지, 하지 마!”
“닥쳐, 뒤진 네 늙은 남편한테는 몇 번이고 다릴 벌린 주제에……. 역시 나 같은 천한 놈이랑은 더러워서 못 자겠어?!”
얼마 가지 않아 급히 버클 푸는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테사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고 안색이 파리해졌다. 그녀의 예상과 다르지 않게 곧 엉덩이에 두껍고 뭉툭한 무언가가 닿았다.
뒤돌아보지는 못하지만 스치듯 닿은 면적만으로도 테사는 그 크기가 남다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늙은 남편의 쪼그라든 성기보다 몇 배는 큰 듯했다. 시, 싫어. 저걸 넣다간 아래가 찢어질 거야. 경험해 본 적 없는 사이즈로 인한 공포감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하, 하지 마! 싫어……! 싫다고! 이거 놔, 이거 놔아!”
민감한 피부 너머로 선연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물건의 부피와 무게감에 테사는 전보다 더 격렬하게 발버둥을 쳤다.
마냥 순결을 소중히 여겼던 것은 아니었다. 늙은 영주의 수많은 부인 중 한 명이 되었을 때부터 테사는 몸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그것도 헤르트와 교접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사내의 강압적인 태도가 테사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제발, 제발!”
처절한 울부짖음과 함께 가냘픈 팔이 허공에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눈가에선 눈물이 줄줄 흘렀다. 테사는 제 등허리를 꽉 짓누르고 압박하는 커다란 남자의 상체와 사정을 봐주지 않는 손속에 겁에 질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저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흐윽, 싫! 끅……. 흑!”
“…….”
결국 테사가 소리 내어 울며 발작하자 사내의 손길이 우뚝 멈추었다. 피부에 닿아 부피감과 무게감으로 그녀를 겁먹게 했던 사내의 성기 또한 그녀와 멀어졌다.
테사는 자신을 억압하던 손길에서 힘이 빠지자 허겁지겁 헤르트를 밀쳐내고 구석으로 기어가듯이 도망쳤다.
사실은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갈 수 있는 곳은 결국 이 방 한 칸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도 방에 들어선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도망치고 싶었다.
테사는 구석에 머리를 박고 최대한 몸을 말아 웅크렸다. 딱딱하고 차가운 벽과 어둠이 익숙하게 그녀를 감싸자 테사는 목을 놓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이 무섭고 서러웠다. 차라리 제 늙은 남편이나 호시탐탐 저를 노리던 그의 아들이었다면 무서움이 덜했을까?
테사는 제게 헤르트를 미워할 자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처음으로 그가 미워졌다.
왜 하필 헤르트일까.
왜 헤르트가 내게 이런 짓을 벌이는 거지?
다정했던 소년과 증오만이 남은 사내가 겹쳐지면서 괴리감이 커져만 간다. 테사는 그 어느 때보다 서럽게 울었다. 방금 전까지 제게 일어난 일들이 모두 믿기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