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화
<1. 배신자>
“악!”
남자는 테사의 마른 팔뚝을 우악스럽게 쥐고서 성내 빈방으로 끌고 들어가 그녀를 바닥으로 아무렇게나 내팽개쳤다. 테사는 속수무책으로 바닥에 볼썽사납게 엎어졌다.
머리가 울렸다.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해 더욱 그랬다. 거친 나무판자에 쓸려진 무릎이며 손바닥도 얼얼했다.
테사는 거칠게 쓸려 핏물이 배어나는 손을 보며 눈물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눈물을 내비칠 수는 없었다. 자신에게는 울 수 있는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제 앞에 나타난 사내 때문에 도저히 몸을 똑바로 가눌 수가 없었다.
그 누구도 아닌 헤르트라니.
‘죽은 줄 알았는데…….’
또다시 눈물이 핑 도는 것을 테사는 눈에 힘을 주어 참았다. 아까부터 시야가 물기로 흐려지고 있었다. 이런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울음이 북받쳐 올라왔다.
어떻게 헤르트가 살아 있을 수가 있는 거지?
그리고 어떻게 이 앞에…….
“말해 봐.”
가까스로 억누른 듯한 목소리로 느닷없이 사내가 물었다. 그 물음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비록 주어가 빠지긴 했지만 테사는 그가 무엇을 묻는지 잘 알고 있었다. 모를 리가. 그를 지옥으로 밀어 넣은 장본인이 여기에 있는데.
하지만 목이 막혀 말이 통 나오지 않았다.
‘나는…….’
뭐라고, 무어라 말을 해야 할까.
바보, 등신같이 멍청해서……. 어처구니없게 순진해 빠져서…….
그렇게 되었다고?
애당초 자신이 그에게 변명할 처지가 될까?
테사는 차마 고개를 들어 헤르트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 무섭고 두려웠다. 그녀 앞의 헤르트는 더 이상 악몽이 아닌 현실이었다. 그것은 그 어디에도 도망칠 곳도, 외면할 길도 없다는 소리였다.
그 점이 테사의 온몸을 뼈가 으스러지도록 짓눌렀다.
머지않아 지독한 자기혐오와 자괴감이 밀려왔다. 오랜 시간 동안 수없이 곱씹었던 감정이었지만 지금만큼 숨이 막힌 적은 처음이었다. 그가 살아서 앞에 나타났기 때문일까. 속이 울렁거렸다.
테사는 먹은 것이 없음에도 몸에 있는 모든 걸 게워내고 싶었다. 차라리 기절하고픈 마음이었다.
“그동안 좋았어?”
그녀 앞으로 차갑고 날 서린 목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날 노예로 팔아먹고 한 자리 차지해서 좋았냐고.”
“…….”
“이런 곳에서 귀족 마님이 되어 사는 건 어떤 기분이야?”
―역시 좋았겠지?
이어지는 남자의 날카로운 뒷말에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테사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잘 벼려진 칼날이 제 심장을 마구잡이로 후벼 파는 기분이었다.
사실은 말하고 싶었다. 제 자신을 변호하고도 싶었다.
‘헬, 좋지 않았어. 아니, 너무 힘들었어. 나도 이런 자리 따윈…….’
하지만 이번에도 테사는 말하지 못했다. 그녀는 고개를 더욱 수그렸다. 참담함이 저 아래에서 그녀를 끌어내리고 있었다. 초점이 흔들리는 시선으로 테사는 살갗이 까져 붉어진 제 손을 내려다봤다.
드문드문 피가 비쳤고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테사는 이를 악물어 몇 번째인지 모를 울음을 삼켰다.
절대 울 수 없다. 제 눈물은 헤르트에게 악어의 눈물로 보일 것이며, 가증스럽기만 할 테니까. 또한 그에게 밑바닥을 보이며 용서를 구할 자신도 없었다. 그것이 테사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용서받지 못할 거야.’
7년 전, 헤르트가 검투사노예로 팔려갔던 건 테사의 무지와 순진함이 불러온 일이었다. 그러나, 그 원인과 과정이 어찌했든 그 결과로 인해 끌려갔던 헤르트가 바로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그가 그 지옥에서 어떤 일을 겪었을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렇기에 테사는 더더욱 헤르트에게 솔직히 털어놓으며 용서를 구할 수 없었다.
누가 누구에게 동정과 자비를 구한단 말인가.
용서는 더더욱 말이 되지 않는다.
“말해 보라니까.”
돌아오는 답이 없자 헤르트는 미간을 좁혔다. 이번에 그는 짓씹듯 말을 내뱉었다.
“7년이야. 그 지옥 같은 삶에서 죽지도 않고 버텼던 게.”
“…….”
“왜인 줄 알아?”
사내는 천천히 테사를 내려다봤다. 고개를 수그린 채 몸을 쥐처럼 웅크린 여자가 동요하고 있었다.
“미친 듯이 궁금해서.”
“…….”
“네가 날 왜 배신했는지, 그게 너무 궁금해서 죽지도 않고 살아왔어.”
배신. 테사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늘상 자신이 그를 배신해 지옥으로 몰아넣었다 생각해 오긴 했지만, 막상 그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손끝부터 시퍼렇게 얼어가는 기분이었다. 토기가 더욱 심해졌다.
테사는 제 스스로가 역겨워 정신을 놓고 싶었다.
헤르트의 말이 맞았다.
테사는 배신자였다.
미래를 약속하고 그녀를 가장 우선으로 생각해 주는 존재를 노예상에게 팔아버린 배신자.
그로 인해 그녀는 늙은 영주 남편을 얻었고, 후처에 불과하긴 했지만 귀부인이 될 수 있었다. 그건 절대로 부정하지도, 변명하지도 못할 사실이었다.
테사는 멍한 눈길로 사내의 발치를 쳐다봤다.
“그러니 말해 보라고.”
어느새 헤르트는 테사의 앞에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주먹을 쥐었다 말았다 하는 것이 최대한 화를 다스리려 하는 것처럼 보였다.
“대체 왜 그랬어?”
“…….”
“왜 날 배신했어?”
“…….”
헤르트의 물음에 테사는 여전히 답할 수 없었다.
배신, 그 단어 하나가 아까부터 줄곧 그녀의 목을 옥죄었다.
“말 안 할 건가?”
“…….”
“그래,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끝까지 사람을 병신으로 만들지, 너는.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결국 헤르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사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손길로 거칠게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들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악!”
두피가 저리도록 억센 손아귀 힘에 테사의 고개가 뒤로 젖히며 가냘픈 흰 목이 그대로 드러났다. 헤르트의 손속에는 자비가 없었다. 그가 좀 더 힘을 주면 테사의 가는 목은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때문에 테사는 숨을 힘겹게 헐떡이며 바들바들 떨었다.
헤르트는 테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넌 내가 장난하는 것 같아?”
“……흐윽.”
“그 입으로 뭐라도 지껄여보라고, 변명할 기회를 주고 있잖아. 그런데 입을 다물고 있으면 쓰나. 내 인내심을 시험하는 것도 아니고.”
금방이라도 다른 한 손으로 목을 조를 것처럼 험악하게 얼굴을 구긴 헤르트의 모습에 테사는 반항 한번 하지 못하고 그에게 붙들린 채로 최대한 숨을 죽였다. 이 와중에도 생리적인 아픔에 눈물은 계속 차올랐다.
사실 죽느니만도 못한 목숨을 이어가는 동안 폭력에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나 보다. 테사는 저보다 체격이 배는 큰 사내가 힘을 쓰자 무서워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반사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었고 심장은 주체하지 못하고 쿵쾅쿵쾅 뛰었다. 보이지 않는 공포에 좀먹어 가는 기분이었다.
그 사내가 헤르트인데도 그랬다.
테사는 이런 상황이 너무나도 낯설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헤르트는 언제나 다정한 소년이었다. 또래보다 건장한 체격을 가졌지만 단 한 번도 테사에게 제대로 힘을 쓴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헤르트는 테사에게 힘을 쓰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그녀 앞의 남자가 ‘헤르트’가 맞긴 한 걸까?
물기로 젖어 드는 시야로도 알 수 있었다. 한때 테사를 보고 수줍게 웃던 소년은 이 자리에 없다는 것을.
다시 만난 헤르트는 헤어졌을 때와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그의 몸집은 과거보다 배는 커다래졌고 유려했던 이목구비는 완연한 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을린 피부며 드러난 손과 얼굴에는 상처와 흉터가 빼곡하여 손을 대지 않아도 거칠어 보였다. 또한 볕보다 밝아 고아원 아이들의 부러움을 샀던 금발은 좀 더 짙어져 있었다.
무엇보다 영롱하게 반짝이던 푸른색 눈동자에는 증오와 살기만이 남아 시퍼렇게 번들거렸다.
테사는 헤르트와 눈을 마주친 순간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고야 말았다. 고였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제 앞의 사내는 도저히 그녀가 알고 있는 헤르트가 아니었다.
그는 남편의 측근들이 그렇게 떠들어대던 잔혹한 학살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네가 날 노예로 팔아넘긴 걸 알았을 때, 믿지 않았어. 최대한 부정했어. 오해라고, 네가 그럴 리 없다고.”
어느새 테사의 머리채를 잡은 헤르트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머리가죽이 통째로 뜯겨 나간다면 이런 느낌일까. 머리 전체가 홧홧했다.
“말이 안 되잖아. 네가 날 팔아넘겼다는 게, 우리가 어떤 사이였는데. 서로밖에 없었잖아.”
“…….”
“그런데 알고 보니까 내가 널 너무 믿었더라고. 순진했던 거지. 정말 네가 날 팔아넘긴 대가로 귀족 마님이 되었다는 걸 알았을 땐…….”
헤르트가 다른 한 손으로 테사의 목을 더듬었다. 그의 커다란 손바닥 안으로 가냘픈 테사의 목이 모두 들어찼다.
“널 죽이고, 나도 죽어버리고 싶었어.”
헤르트의 손에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그제야 테사는 자신이 알던 소년 ‘헤르트’를 제 손으로 죽여버렸음을 확연히 깨달았다.
이 나락 속에서 그녀가 무력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처럼 그 또한 변모한 것이다. 가능하다면 끝까지 외면하고 싶었던 사실이기도 했다.
테사는 코끝이 찡해지는 걸 느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이 자초한 일이며, 그 사실 또한 지울 수 없다는 점이 끔찍했다. 앞으로 이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차라리 자신의 삶만 망쳤다면 이 정도는 아니었을 터다. 하지만 테사가 그르친 것은 비단 그녀의 인생 하나만이 아니었다. 헤르트의 인생도 함께였다.
얼마나 더 바닥으로 처박혀야 이 삶이 끝이 날까. 얼마나 더 고통 받아야 이 죄를 덜어낼 수 있지? 정녕 살아서 죗값을 모두 치를 수는 있긴 한 걸까? 그동안 수도 없이 죽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만큼 죽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테사는 목이 메어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겨우 끄집어냈다.
“……요.”
“……뭐?”
“……주, 죽이세요. 제가, 제가…… 기, 기사님을 ……배, 배신한 게 맞, 으니까…….”
조여진 목이 바짝 탔다. 물리적인 요인 때문인지, 심리적인 요인 때문인지 발음마저 뭉텅뭉텅 새어 나갔다. 그럼에도 테사는 최대한 힘을 모아 떠듬떠듬 말을 이어갔다. 어쩌면 이대로 헤르트의 손에 죽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냥…… 저, 절 죽이세요. 어, 어차피 복수, 하, 하러 여기까지 오, 온 거잖아요……. 그, 러니까…… 마음대로―”
“헛소리 지껄이지 마!”
그 순간 헤르트가 말을 끊으며 거칠게 일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