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날의 배신을 알지 못하여-1화 (1/138)

001화

<0. 프롤로그>

살갗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병장기 소리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멈추었다. 이윽고 무거운 구둣발 소리와 함께 어스름한 주황빛 횃불들이 홀을 가로지른다.

패전을 맞이한 성에는 오래전부터 한기가 돌았다. 테사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을 떨어댔다. 잠옷 차림의 그녀가 걸친 것이라고는 얇고 짙은 초록빛의 철 지난 숄 하나뿐이었다. 모피를 두르고 있는 여타 부인들과는 달랐다.

테사는 바닥을 굴러다니는 깨진 유리조각에 언뜻 비친 제 모습을 흘겨봤다.

버석하게 메마른 입술과 음울하게 내려앉은 눈꼬리. 자부심을 가졌던 붉은 진저빛의 머리카락은 푸석해진 지 오래였고 생기가 넘쳤던 피부는 창백하다 못해 병자 같았다.

제 쓸모를 다하지 못하고 깨져 버린 유리조각처럼 삶의 풍파를 못 이겨 조금씩 스러져 가는 촌스러운 여자가 그곳에 있었다.

테사는 앞으로의 제 생사가 불분명한 상황에서도 초라한 꼴인 자신이 한심하고 비참하게만 느껴졌다.

멍청이. 갈라진 음성으로 조용히 읊조려 본다. 끝까지 행복과 거리가 먼 삶이구나. 멀리 내다볼 것도 없이 죽음도 초라하겠지. 저를 위해 울어줄 사람 하나 없을 터였다. 태어나 버려진 것처럼 죽어서도 버려질 예정인 것이다.

“…….”

저 멀리 철그럭거리는 갑옷 소리가 난다. 울음이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테사는 숄을 꽉 잡아 쥐었다.

하염없이 상념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원치 않던 늙은 남편을 죽이고 새로이 영주가 된 자의 얼굴을 확인할 시간이었다. 그는 제 기구한 삶의 종지부를 찍게 해줄 자이기도 했다.

테사는 고개를 들어 이곳으로 다가오는 인영의 발치를 쳐다봤다. 피로 진득하게 젖은 갑옷이 소름 끼치는 소음을 냈다. 말 한 번 하지 못하고 쓰러졌던 이들이 통곡하는 소리 같기도 하다. 이어 남자가 움직일 때마다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져 하얀 대리석 바닥에 선명한 흔적을 남겼다.

남자는 몇 명이나 죽이고 그 자리에 올랐을까.

테사의 남편도 저자가 무자비하게 휘두른 검에 피를 흩뿌리며 죽었을 것이다. 저항하여 검을 한 번이라도 휘둘렀을까. 그러나 그랬을 리 없다는 걸 안다.

유테르트 영지를 공격해 온 사내에 대해서는 말이 많았다. 악명 높은 감옥의 죄수로 전쟁에 차출되었다가 수많은 적을 베어내고 적장의 목을 가져와 죄를 용서받은 자. 왕의 오른팔인 보르웬 후작의 눈에 들어 단시간에 기사가 된 인물. 살인에 미친 전쟁광이라고 불릴 정도로 잔혹한 성정의 남자…….

기실 이번 영지쟁탈전의 결과는 어찌 보면 당연했다. 여색을 즐기고 술과 약에 쩔어 살아온 늙은 영감이 수많은 전장에서 공을 세우고 살아 돌아온 사내를 상대로 이길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소후작을 비롯해 남편의 측근들이 하나둘 꽁지를 빼고 도망갈 때부터 테사는 전쟁의 승패를 예상했었다.

본시 왕의 암묵적인 허락 아래 서로의 영지를 두고 벌어지는 작은 전쟁은 대부분 패자의 죽음으로 끝이 나기 마련이었다. 왕국법에 의거하여 가문과 작위를 이을 후계자의 목숨만큼은 보장된다 하더라도, 그 외의 모든 것들은 잃게 되는 것이다. 그런 마당에 누가 목숨을 걸고 패자의 편에 서려 할까.

문제는 저를 비롯한 늙은 영주의 수많은 부인과 아이들의 처분이었다. 여자와 아이까지 무참하게 죽인다는 소문까지 돌던데. 남자는 자신들을 죽일까. 온실 속 화초처럼 사는 부녀자들은 쓸모가 없었다. 짐만 될 뿐이었다.

특히 귀족도 뭣도 아닌 테사 같은 위치라면 더더욱.

테사가 생각하는 사이 사내는 가솔들이 있는 코앞으로 다가왔다. 긴장한 테사는 마른침을 삼키며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이게 마지막이라면 저를 죽일 치의 얼굴은 보고 죽어야겠다고 생각이 든 탓이다.

그러나 남자의 서늘한 두 눈과 마주친 순간 그녀는 숨이 가빠졌다.

‘마, 말도 안 돼…….’

서릿발이 내려앉은 푸른 눈동자가 테사를 무저갱으로 끌고 들어가는 듯했다.

챙그랑!

시선이 맞닿자 사내는 들고 있던 검을 사납게 집어 던졌다. 숨 막히는 적막 속에서 검이 바닥을 구르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피비린내를 풍기며 남자가 걸어왔다.

그의 시선 끝에는 오로지 단 한 명만이 존재했다.

테사.

남자는 걸리적거리는 다른 부인들을 마구잡이로 밀쳐 가며 테사의 앞에 당도했다.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넋을 잃은 듯 굳어 있는 그녀에게 그가 손을 뻗어 턱을 우악스럽게 그러잡았다.

그 어느 때보다 섬뜩한 목소리로 사내가 말했다.

“오랜만이야, 테사.”

죽은 줄 알았던 헤르트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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