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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110화 (외전 완) (11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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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 진정하십시오. 절대 그럴 일 없습니다.”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유델은 욕심이 많아 보이더군. 유델이 아니더라도 후계는 계속해서 생기지 않겠나.”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제국 침범은 불가하리라.

쟈르스가 뚱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도 제국 땅을 넘볼 일은 없을 겁니다. 제국의 시조 같은 두 분이 떡하니 버티실 테니까요.”

“……시조?”

“역사서를 보다가 알아냈습니다. 두 분이 제국의 시초 아니십니까? 앞으로 늙지도 않으신다면서요. 두 눈 번뜩이며 지켜보실 것이 뻔한데, 누가 쳐들어오겠습니까.”

“옳은 말이로군.”

아르베우타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와 세실레는 앞으로 늙지도 죽지도 않을 터였다.

아르베우타는 각성자였고 세실레는 타고나길 특별한 영혼이었다.

신력이 빼앗긴다고 해도 영혼의 수명은 여전했다.

둘은 세상이 멸망하는 때까지 살아있을 예정이었다.

아르베우타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영원히 그녀가 제 곁에 있다.

버거울 정도의 흡족함이 가슴께를 빠듯하게 채웠다.

행복한 웃음을 짓는 그를 보면서 쟈르스가 혀를 찼다.

“꼭 폐하를 닮은 황자 전하를 낳으시길 바랍니다.”

그가 세실레를 닮은 황녀를 바라는 걸 알면서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마냥 행복한 아르베우타에게는 아무런 타격이 되질 않았다.

“물론, 딸도 낳고 아들도 낳아야지. 우린 영원히 함께할 테니까.”

“……잘나셨습니다.”

쟈르스는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애정행각을 언제까지 지켜봐야 하는 건지.

심지어 황제 부부의 애정 덕에 그는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도 못했다.

“제 휴가나 챙기고 그러시면 얼마나 좋습니까.”

비아냥거림에 아르베우타가 돌연 말을 이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갑자기요?”

“그렇지 않아도 디젤라가 세실레에게 네 휴가를 요청했다더군. 이참에 영영 가버리면 되겠어.”

“이렇게 쫓아내시는 겁니까?”

“쫓아낸다니. 왕관을 쓰러 가는 것이지 않나. 영지민들의 반발할 수도 있겠지만, 디젤라의 능력을 보곤 다들 입을 다물겠지.”

“……허, 참.”

아무래도 아르베우타는 그들을 쫓아낼 생각밖에 없어 보였다.

오래된 충성의 끝이 이거라니. 묘하게 버림받는 느낌이었다.

기분이 좋을 듯 나빴다.

여전히 꽁해 보이는 쟈르스를 향해 아르베우타가 말했다.

“그대도 이제 자네와 같은 비서관을 갖게 되겠군.”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말이었다.

그보다 이대로 정말 왕국을 고립시키려는 생각인가.

쟈르스는 고민하다가 입을 뗐다.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제국과 교류하는 것마저도 막을 생각은 아니시죠?”

“공문을 보낸다면.”

“매정하시군요.”

“원래 그랬지.”

쟈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원래도 자기중심적이고 제 사랑만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아랫사람을 종 부리듯 하는 악덕 상사이기까지 했다.

그러니 비서관 자리를 박차고 퇴직할 수 있어서 기뻐야 하는데, 영 그렇지가 않았다.

쟈르스는 시원섭섭한 표정으로 집무실을 둘러보았다.

천장의 무늬와 장식 하나하나, 어느 곳의 염료가 바랬는지마저 눈에 훤했다.

반원형의 큰 창 위로 스며드는 햇살에 따라 딱정벌레의 등껍질로 장식한 서류함의 색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또한.

매번 이곳에서 해가 지고 뜨는 것을 보았더랬다.

‘이곳을 떠나는 날이 올 줄이야.’

잠시 황후궁에 갇혔으나 기어코 또 돌아왔다.

홀로 남아 상석에 앉은 적도 있으나 그 자리가 제 것이라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르베우타가 귀환한 날, 쟈르스는 그의 옆 오른 책상에 앉을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젠 끝이라니.

황제는 더 이상 그의 오른 자리를 내어주지 않으리라.

‘나이 먹으니 감정적으로 변하는군.’

쟈르스는 짐짓 낯을 굳혔다가, 돌연 무릎을 꿇었다.

그러곤 그를 내려다보는 아르베우타를 향해 말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내가 할 말이야.”

아르베우타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수 그를 일으켜 주었다.

쟈르스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친구였고 눈빛만으로 뜻을 읽어내는 측근이었다.

아르베우타가 힘주어 쟈르스의 손을 쥐었다.

“가서 부족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

“이자를 얼마나 받으시려고요.”

“속국이 되어버릴 만치, 많이.”

농담 섞인 대화에 다시금 둘의 입가에 웃음이 피어났다.

국왕이 되면 자리를 비우기 쉽지 않았다.

게다가 초대 왕이었다. 틀림없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리라.

어쩌면 이번 만남이 마지막이 될지도 몰랐다.

아르베우타와는 달리 쟈르스는 필사의 몸이었으니 눈 깜짝할 사이에 늙을 것이다.

오랫동안 살아온 아르베우타에겐 지독히도 짧은 시간이겠지만, 쟈르스에겐 전부일 생이었다.

그래서 둘은 한동안 맞잡은 손을 놓지 못했다.

반원형의 창에 날리던 눈이 그치고 서류함이 불그스름한 색으로 물들어 반짝거리며 빛날 때까지.

***

모두가 까무룩 잠든 깊은 새벽이었다.

유독 새까만 하늘 위로 눈부신 보름달이 요요히 빛났다.

아르베우타는 경계하듯 모든 창문을 가린 채 바깥을 지켰다.

그의 옆엔 사위를 호위하는 기사들로 가득했다.

마치 내전이라도 맞이한 듯 삼엄한 경계 속에서 세실레는 산통을 맞이했다.

생살을 뜯어내듯 배가 아리고 시야가 어그러졌다.

선명한 고통 아래서 세실레는 잠시 정신을 잃었다.

새까만 암전이었다.

정신을 차리라며 저를 흔들어 깨우는 이들의 소리조차 이명처럼 점점 멀어졌다.

마침내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을 때, 세실레는 무심코 눈을 떴다.

그녀의 앞에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빛이 흘렀다.

성스럽고 고귀하여 감히 볼 수 없는 신비의 존재, 세렌디였다.

다시는 만날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세렌디가 세실레의 앞에 서 있었다.

세실레는 그녀를 확인하곤 서글피 속삭였다.

“……어머니.”

세실레는 숨을 몰아쉬며 제 배를 움켜쥐었다.

한껏 몸을 움츠린 그녀의 팔을 세렌디가 잡아당겼다.

그러곤 한사코 저를 마주보길 거부하는 세실레를 향해 엄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피하지 말고 날 보렴.”

세실레는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눈이 멀어버릴 듯 번쩍이던 빛이 차츰 사그라들었다.

그녀의 주위로 눈발과도 같은 달빛이 흩날렸다.

세실레는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이건.”

달빛이 아니었다.

세렌디의 주변에서 찢겨 흩날리는 것은 세실레에게서 앗아간 신력이었다.

세렌디는 보란 듯이 찢겨 날리는 신력을 한데 모았다.

허공으로 새하얗고 탐스러운 은빛의 꽃이 하늘거렸다.

세렌디는 꽃을 세실레의 품에 안겨주었다.

그러곤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아이가 죽어 달로 돌아오는 날, 네 업을 잇게 될 것이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순식간에 어둠이 걷히더니 세상이 뒤집히는 듯 속이 메스꺼웠다.

세실레는 물에서 막 건져낸 사람처럼 급히 숨을 몰아쉬었다.

귓가로 아기 울음소리가 선명히 들려왔다.

“응애애애- 응애애!”

“황녀님이십니다!”

출산을 도우러 온 산파가 소리쳤다.

산파는 깨끗한 흰 천으로 아기를 감싸고 세실레에게 안겨주었다.

세실레는 반사적으로 두 팔을 뻗어 아기를 받아들었다.

품 안에 안긴 아기는 작았다.

아주 작고 조그마한 것이 꼬물거리며 움직였다.

아기는 손과 발을 웅크리고 폈다가 세실레를 향해 내밀었다.

눈처럼 새하얗고 보석보다 푸르른 눈동자를 가진 아기였다.

세실레는 아기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아가.”

아기를 안은 세실레의 손끝이 떨렸다.

아기에게서 신력이 흘러나와 반짝거렸다.

흔히 아기의 몸에 묻어 있을 것조차 없었다.

아기가 모두 정화한 것이었다.

그녀는 홀로 반짝이면서 방긋거리며 웃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 해맑은 웃음을 지으면서.

세실레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그녀는 설움을 참지 못하고 아기를 끌어안고 울었다.

“아가……. 내가, 엄마가 잘못해서…… 흐윽!”

숨이 끊어질 듯 절박한 울음이었다.

그러나 아기는 울지 않았다.

그저 얌전히 세실레의 품에 안겨, 다독이기라도 하듯 세실레의 옷자락을 쥐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난데없는 광경에 시녀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 출산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아르베우타가 황급히 세실레에게로 다가섰다.

그는 울고 있는 세실레와 막 태어난 황녀를 발견하곤 눈을 내리감았다가, 입술을 꾹 물었다.

그러곤 세실레에게로 다가가, 그녀를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여자의 몸으로 최초로 황위에 올라, 죽어 달이 될 영광을 받은 첫째 딸의 탄생이었다.

***

제국엔 동화 같은 전설이 하나 있었다.

밤만 되면 유령과도 같은 이들이 제국을 떠돈다는 전설이었다.

한 사람은 눈이 부시도록 새하얀 은발을 가진 여자였고 한 사람은 어둠마저 위압할 정도로 굳건한 육체를 가진 남자였다.

한 번 보면 다른 사람과는 다른 점이 느껴질 정도로 두드러지는 위인들이라 했다.

두 사람의 주변으론 종종 커다랗고 하얀 새가 날아들기도 했고 밤이 되면 달빛이 그 위를 비추기도 했다.

뭇 사람들은 눈이 부셔 둘을 제대로 보지 못할 정도였다.

누군가는 그들을 보고 신이라 하였고 누군가는 유령이라 하였고 누군가는 제국의 시초인 황제 부부라 하였다.

호칭이야 어찌 되었건, 두 사람을 둘러싼 소문이 하나 있었다.

“보름달이 뜬 밤에, 그들을 향해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대.”

나무꾼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고된 삶에 지친 그는 소문 따윈 전부 시간이 넘쳐나는 인간들이 지어낸 헛말이라며 혀를 찼다.

“팔자도 편하지.”

불만 많은 그는 내내 나무를 베고 지쳐 잠시 잠들었다.

그런데 눈을 뜨니 새카만 밤이었다.

“이거 큰일 났군.”

나무꾼이 혀를 찼다.

사방에서 짐승의 위협하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불이라도 피워야 했다.

그가 나무를 캐러 온 근방엔 나무를 타고 오를 줄 아는 맹수가 많았다.

“불쏘시개로 쓸 만한 나무가…….”

능숙하게 어둠 속을 헤매던 나무꾼이 무심코 눈을 들었다.

산의 봉우리에 비스듬히 보름달이 걸려 있었다.

달 아래로 펼쳐진 어둠 속, 깎아지를 듯한 절벽 위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한 사람은 눈이 부시도록 새하얀 은발을 가진 여자였고 한 사람은 어둠마저 위압할 정도로 굳건한 육체를 가진 남자였다.

한 번 보고 나면, 결코 잊을 수 없을 정도로 두드러지고, 눈이 부셔도 눈을 뗄 수 없는 존재.

“서, 설마.”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지고도 멀쩡했던 나무꾼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앉았다.

그는 서둘러 소문을 떠올리곤 두 손을 가슴팍에 모았다.

“아, 아이고오, 제발 금덩이 좀 떨어뜨려 주시고 저 좀 살아 돌아가게 해주십시오.”

듣기는 한 것일까.

나무꾼은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하지만 절벽 위의 두 사람은 듣지 못한 듯 보였다.

그들은 마치 숲을 노닌다는 요정들처럼, 잘못 디디면 떨어질 듯 아슬아슬한 절벽 위를 거닐었다.

웃음소리가 번지는 듯도 했고 부근에서 새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뭐에 홀렸나…….”

나무꾼이 눈을 비비고 다시 절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눈이 부실 듯 밝게 드리우던 달빛마저.

“어, 어잉?”

아니, 사라진 게 아니었다.

나무꾼이 제집에 돌아온 것이었다.

심지어 문 앞엔 사람만 한 금덩이가 놓여 있었다.

“이게 웬 횡재냐.”

나무꾼은 금덩이를 품에 끌어안았다.

그리곤 어디에 숨겨야 하나 한참 고민했다.

탐을 내는 이들의 손에 빼앗기면, 내내 밤잠을 설칠 것이 분명하기에.

***

세실레는 절벽 위에 누웠다.

이마 부근을 간지럽히는 산들바람이 기분 좋았다.

하늘 위로 요요한 달빛이 바스러지며 반짝였다.

마치 잘 지내고 있느냐 안부 인사를 전하듯이.

세실레는 검지를 뻗어 동그란 달을 쓰다듬듯 매만지다, 지척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허공으로 새가 날아들었다.

막 소원을 빈 이의 바람을 들어주고 온 모양이었다.

그를 보고 웃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옆을 지키던 아르베우타가 세실레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곤 잠도 자지 못할 정도로 밝은 빛을 내는 달을 향해 꾸짖었다.

“이대로 밤을 새울 생각인가.”

엄한 목소리에 세실레가 아르베우타를 말렸다.

“그러지 말아요. 보름만인데.”

“나이가 몇 살인데…….”

“아직 아이라고요. 형제들이 저리 많아도 부모를 찾는 걸 봐요.”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제국의 후계를 잇고, 죽어, 달로 돌아가길 쉼 없이 반복했다.

첫 아이는 달이 되어 그런 형제들을 모두 품어 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부모가 그리운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구나.”

세실레는 늘 그랬듯 자장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르베우타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뒤를 이어 불렀다.

밤이 새고 여명이 걷혀 해가 떠오를 때까지.

쉼 없이, 끊임없이.

〈외전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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