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아르베우타는 집무실을 찾은 당돌한 꼬마를 내려다보았다.
유델이었다.
쟈르스의 천재성과 디젤라의 대찬 성격을 물려받은 아이는 세상에 두려울 것이라곤 조금도 없다는 듯 당당히 황제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아르베우타는 눈을 빛내는 소년을 바라보며 냉정한 생각을 했다.
‘후환이 되겠군.’
유델을 후계로 지목한 것은 물렸지만, 여전히 유델에겐 황위 계승권이 있었다.
유델이 나중에 자라, 달리 마음을 먹으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아이 탓을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유델에게 황제가 되어라, 속삭인 이가 아르베우타였으니까.
당시엔 세실레를 잃은 실의에 젖어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나마 황위를 지켰던 이유는 제국의 주인이 세실레이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세운 나라였다.
흐지부지한 일 처리로 제국에 혼란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유델을 후계로 세우고 황위에서 물러났다.
세실레 없이는 그 또한 황제라 불릴 자격이 없었으니까.
황위엔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그저 마지막으로 그녀를 볼 수 있다면, 끝끝내 매달려서라도 관심 한 점이라도 끌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그렇기에 미련 없이 길을 떠났다.
그 후환이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어쩐다.’
유델은 위험하다.
그의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르베우타가 침묵하자, 똑같이 입술을 꾹 물고 있던 유델이 불쑥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하세요, 폐하?”
“아무것도 아니란다.”
아르베우타가 애써 자상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유델은 못마땅한 듯 눈썹을 찌푸렸다.
뾰로통한 표정에 아르베우타가 물었다.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나?”
유델은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눈 한 번 깜짝이지 않고 말했다.
“폐하께선 표정 관리가 잘 안 되시거든요. 황후 폐하 앞에서만 진심으로 웃으시는 거 알아요.”
“음.”
“지금도 머릿속으론 절 어떻게 죽일까 고민 중이시죠?”
당돌한 대꾸에 아르베우타는 헛웃음조차 흘릴 수 없었다.
그는 표정을 굳혔다. 그리곤 생각을 정정했다.
위험한 정도가 아니었다.
‘처리해야겠군.’
그는 아내와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었다.
제 오른팔과 아내의 여동생이 낳은 아이를 죽이는 것 또한.
사고사로 위장하면 그만이었다.
제국의 황제인 그에게 유델의 목숨을 끊는 방법이야 넘치도록 많았다.
살기 어린 시선에 유델이 드물게 몸을 떨었다.
조금 전의 기세등등하던 모습은 사라진 뒤였다.
어깨를 좁히며 뒤로 물러서는 유델을 향해 아르베우타가 상냥함을 거두고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는군. 더 말해 보아라.”
아르베우타가 한 손으로 사위를 물렸다.
곁을 지키던 이들이 곧장 몸을 빼었다.
분위기가 심상찮았다.
눈치 빠른 종들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자, 그제야 유델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몸은 살의에 짓눌려 덜덜 떨면서도 눈동자는 올곧아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것만 봐도 유델의 정신력은 수준급이었다.
‘어지간한 어른보다 낫다.’
아르베우타가 차가운 시선으로 유델을 응시했다.
유델이 몸을 떨면서도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저, 저는 동의 못 해요.”
“…….”
“어, 어머니랑 아버지는 화, 황위는 제 것이 아니라고 하셨어요. 하지만 동의 못 해요. 저는 황제가 될 거예요. 그리고 폐하께 죽고 싶지도 않아요!”
끝을 버럭 내지르는 목소리는 분함으로 가득했다.
제 처지에 불만이 가득한 모양이었다.
아르베우타 또한 유델의 불만을 이해했다.
하지만 이리 말하는 유델을 살려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르베우타는 입을 다물었다.
날 선 붉은 눈동자만이 가만히 유델을 응시했다.
어떻게 그를 사냥할지 고민하는 맹수처럼, 아르베우타는 제 살의를 구태여 감추지 않았다.
그것이 어린 유델에겐 상당한 공포로 와닿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어코 유델의 다리가 풀렸다.
아이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유델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도망가지 않았다.
고사리처럼 작은 손으로 바닥을 긁으면서도 꿋꿋이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어찌 안쓰럽지 않을까.
아르베우타라고 동정심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제왕이었다.
세실레가 있어야 비로소 온전해지는 황제, 그렇기에 지금은 더더욱 자리를 지켜야만 했다.
아르베우타의 입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왜 널 살려두어야 하지?”
“저, 전 아무 죄도, 흐윽, 없, 흐윽!”
“왜 죄가 없나. 네 입으로 방금 반역을 저지르겠노라 말했지 않나.”
아르베우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가 크고 근육이 다부진 몸이 위압적이었다.
유델은 제 머리 위로 드리우는 그림자에 눈을 꼭 감았다.
기다랗게 뻗은 속눈썹 가득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흐아, 흐아앙!”
기어코 꾹꾹 억누르던 울음이 터졌다.
하지만 아르베우타는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도리어 모진 말로 아이를 몰아세웠다.
“내 아이가 황녀라 하여도 너와는 식을 올리지 못하지. 황자라 하면 더더욱 네가 필요 없고. 네가 조금 더 현명했다면 입을 다물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넌 그러지 못했군.”
그가 유델의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유델은 더 이상 울음을 터트리지 않았다.
울음을 잇지도 못할 정도로 공포가 몰려온 탓이었다.
유델은 죽음의 신이 코앞에 어른거리는 듯해 두 눈을 홉뜨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거기에 아르베우타가 있었다.
영원히 늙지 않고 굳건히 서서 황궁을 차지하고 있을 황제.
유델은 직감했다.
자신은 죽을 때까지 저 남자를 이길 순 없을 것이라고.
어린 나이에 유델은 죽음을 직감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막상 벌어진 일은 부드러운 쓰다듬에 불과했다.
커다랗고 거친 손이 유델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
유델이 의아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르베우타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아르베우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유델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가볍고 보송한 머릿결이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동글동글한 머리통도 어린아이 특유의 향내도, 모두 그의 마음을 흩뜨렸다.
그는 어린 애를 앞에 두고 부린 치기에 한숨을 뱉으며 읊조렸다.
“경사를 앞두고 살인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 그러며는요?”
유델이 눈을 깜빡였다.
아르베우타가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왕이 되어라.”
“……네?”
“대륙의 남쪽에 버려진 땅이 있지. 험한 산에 둘러싸여 있으나 디젤라라면 고르게 다듬을 수 있을 거야.”
“……네에?”
“일 년 내내 온후한 기후를 지닌 곳이다. 수고를 들이면 기름진 땅이 될 테고 땅덩이도 제법 넓어, 그러니.”
아르베우타가 상체를 숙였다.
다시금 드리우는 그림자에 유델은 헤-벌어진 입을 다물었다.
아르베우타는 공포에 질린 유델의 눈을 쓸어주며 말했다.
한 손에 다 뒤덮일 만큼 작은 얼굴이었다.
그가 유델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거기서 한 발짝도 나오지 마. 제국의 땅을 노리는 날엔 너를 잡아 먹어버릴 테니까.”
“히익!”
유델이 겁에 질려 뒤로 물러났다.
아르베우타의 입 사이로 흉흉한 송곳니가 번쩍거리며 빛났다.
야수처럼 흐트러진 머리카락도 그를 괴수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유델은 겁에 질려선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베우타는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유델이 도망치듯 집무실을 벗어났다.
그러다 문 앞을 지키고 선 쟈르스를 발견하곤 그 품에 쏙 묻혔다.
“흐앙, 아빠아아-!”
유델의 얼굴이 온통 붉었다.
겁에 질려 딸꾹질을 하는 아이를 바라보는 쟈르스의 낯이 굳었다.
“……네가 왜 여기에. 아니, 안 봐도 뻔하군.”
쟈르스가 유델을 버려두곤 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노크조차 하지 않는 행색에 아르베우타가 그를 가만 바라보았다.
하지만 쟈르스 또한 심통이 난 상태였다.
그는 일부러 인사도 하지 않곤 곧장 말을 꺼냈다.
“제 아이에게 무슨 짓입니까?”
“반역을 저지르겠다고 말하더군.”
이어지는 말에 쟈르스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입술을 삐죽이는 것이 하고 싶은 말이 몹시도 많아 보였다.
‘그 아비에 그 아이라더니.’
깐깐하고 멋대로에 버릇이 없는 것까지, 전부 쟈르스를 닮았다.
아르베우타는 처음, 쟈르스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야. 네가 황태자야? 금칠이라도 되어있나 했더니 별거 없네?”
쟈르스는 가문이 멸문할 말을 뱉고서도 뻔뻔했다.
거기에 유델은 대찬 디젤라의 피까지 섞였다.
미래를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혀를 차던 아르베우타가 대뜸 입을 열었다.
“아이가 속 좀 썩이겠군.”
쟈르스가 못마땅한 듯 말했다.
“영리해서 딱히 손이 가질 않습니다.”
“그래, 반역을 입에 담을 정도로 말이지.”
“…….”
“황제가 되고 싶다더군.”
넌지시 묻는 말이 꼭 쟈르스가 어찌 반응할지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뻔한 속내에 쟈르스가 투덜댔다.
“어쩌라는 겁니까? 저는 분명 싫다고 했습니다. 아이를 꼬드겨 황태자 위에 앉히신 건 폐하입니다.”
아르베우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그의 책임이 컸다.
하지만 아르베우타는 당당했다.
“황위는 태어날 아이의 것이야.”
“……주의시키겠습니다.”
쟈르스가 표정을 굳혔다.
그는 황제의 황후를 향한 집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유일무이한 황위마저 미련 없이 버릴 정도로 사랑하는 황후였다.
그러니 아르베우타는 황후와 태어날 아이를 위협하는 모든 것을 가감 없이 죽여버릴 터였다.
황후의 눈과 귀를 가리고 거짓을 꾸며내는 한이 있더라도.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몸서리치는 쟈르스를 보고 아르베우타가 픽 웃었다.
“네게 남부의 휴양지를 줬었지.”
“……거기에 유폐하시려고요? 폐하, 이러시는 게 어딨습니까!”
“휴양지의 백 배 되는 영토와 부근 오십 개의 섬을 주지.”
“……네?”
“아부르크 산 이남 지역을 전부 가지라는 뜻이야. 공물 같은 건 바라지도 않으니 독립한 왕국을 만들어. 신화에 제국 땅을 침범하면 괴수가 나타나서 왕국을 멸망시킨다는 내용을 적는 것도 좋겠군.”
“……진심이십니까?”
쟈르스의 목울대가 일렁였다.
머릿속으론 아마 쉼 없이 계산을 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부르크 이남 지역은 노다지나 다름없었다.
지형이 험하지만 기후가 온난했다.
디젤라가 조금만 손을 쓰면 땅도 금방 기름질 터였다.
거기에 바다와 맞닿아있어, 어획을 하기에도 무역을 하기에도 좋았다.
아부르크 이남 지역의 단점은 단 하나였다.
제국을 가로로 가로지르는 거대한 산, 아부르크 산이 남부 지역을 완전히 고립시켰다.
쟈르스가 눈을 반짝였다.
아르베우타는 만족스러워하는 그를 보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진심이야. 신화 또한. 감히 제국 땅을 넘보면 전부 잡아먹을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