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세실레는 손을 들어 시녀들이 다가오는 것을 저지했다.
음식 내가 강해질수록 눈살이 찌푸려졌다.
식은땀도 흘렀다.
그녀가 몸을 움츠리자, 아르베우타가 세실레의 어깨를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아르베우타가 세실레를 살피며 말했다.
“침실로 모시겠습니다.”
무어라 말리기도 전에, 아르베우타가 그녀를 안아 올렸다.
세실레는 그의 어깨에 두 손을 올려놓곤 가느다랗게 말했다.
“……천천히 움직여요.”
“물론입니다.”
아르베우타는 최대한 진동이 없게끔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세실레는 그의 몸에 머리를 기댄 채로 느리게 숨을 뱉었다.
음식이 멀어지니 속이 좀 진정되었다.
‘요새 무리하긴 했지.’
좀 쉬고 나면 괜찮아질 것이다.
어차피 아르베우타가 의원을 불러오기도 할 테고.
세실레는 아르베우타를 믿고 눈을 감았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오는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
아르베우타는 제 침실에 세실레를 눕히고는 황실 의원을 불러왔다.
그는 의원이 진찰을 마칠 때까지 세실레의 곁을 지켰다.
자그맣게 들썩이는 등을 다독이는 손길이 차분했다.
그러나 다정한 손짓과는 달리 그의 눈동자는 서늘하게 빛났다.
의원의 행동 하나하나를 주시하는 눈빛이었다.
의원은 아르베우타의 눈치를 보며 찬찬히 맥을 짚었다.
“체기가 있으신 것 같다고요.”
“음식 냄새만 맡아도 속이 안 좋아.”
“구역질이 올라오신 건가요?”
“그래.”
세실레가 수긍하자 의원이 곤란하단 표정을 지었다.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아르베우타가 입을 열었다.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
까딱 잘못하면 경을 칠 기세였다.
의원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세실레를 살폈다.
“……아닙니다. 그게, 저.”
“제대로 말해.”
의원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번 일은 제대로 살펴야 했다.
혹여나 오진을 냈다간 삼족을 멸할 일이었으니까.
의원은 진중하게 세실레를 재진했다.
그러나 세 번을 살펴도 결과는 같았다.
의원이 소신을 굳혔다.
그의 달라진 표정을 발견한 세실레가 염려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뭔가 문제가 생긴 건가?”
내내 황궁 밖을 헤매다 겨우 정착했다.
게다가 원래 있던 신력도 사라졌다.
몸이 약해졌을 법도 했다.
어딘가 많이 아프다고 해도 괜찮았다.
세실레는 무심코 아르베우타의 손을 세게 잡으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주었으면 해.”
그녀의 말에 의원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폐하, 이건 체한 것이 아닙니다. 장염도 식중독도 아닙니다.”
“그러면…….”
“축하드립니다. 임신입니다. 맥박이 둘로 나뉘어 뛰시는군요.”
“……뭐?”
세실레는 얼굴을 굳혔다.
어젯밤 흘려들은 이야기가 떠오른 탓이었다.
“……어머니. 어머니를 빼앗길 순 없습니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하나 했더니, 임신이라니.
세실레는 무심코 배로 손을 가져갔다.
그 행동을 달리 해석했던지 의원이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월경이 없었을 텐데 눈치채지 못하셨습니까. 앞으로 먹는 것 입는 것 모두 신경 쓰셔야 합니다.”
의원의 말이 영 현실감이 없었다.
세실레는 입술을 달싹이기만 했다.
루베르처럼 영적인 의미에서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 몸으로 낳을 아기가 태어난다는 뜻이었다.
세실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엄마가 된다니.”
그녀를 아르베우타가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납작한 배 어딘가에 있을 아기가 다칠지도 모른다는 듯, 섬세한 몸짓이었다.
그는 우는 듯 웃는 듯 일그러진 표정을 짓더니 이내 눈을 꽉 감았다.
다물린 입꼬리 끝이 잘게 떨리고 감긴 눈꼬리 끝으로 눈물이 맺혔다.
이내 아르베우타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제가 앞으로 더 잘하겠습니다.”
“……당신 울어요?”
“울지 않습니다.”
그가 세실레의 머리 위로 가볍게 키스했다.
“기뻐하는 겁니다.”
세실레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를 품은 본인은 현실감이 없는데, 아르베우타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세실레가 손을 뻗어 그의 속눈썹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눈물방울을 걷어 냈다.
“이렇게 되었으니 진짜 어디 가버리지도 못하겠네.”
“……어딜, 가시려고 한 겁니까.”
순식간에 아르베우타의 낯이 굳었다.
세실레는 딱딱해진 아르베우타의 눈매를 살살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비밀.”
세실레가 그의 품을 벗어났다.
아르베우타는 차마 그녀가 다칠까 잡지도 못하고 물었다.
“잠깐, 정말로 그런 생각을 하고 계셨, 어디 가십니까.”
“아가가 생겼다니 가족들에게도 알려야죠. 도르데아도 궁금해할 테고.”
세실레가 밝게 웃었다.
아르베우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이 점점 멀어져가는 세실레에게로 향했다.
그러다 마침내, 더는 세실레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고개를 바닥으로 떨궜다.
“……아기라니.”
세실레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
아르베우타로서는 마치 꿈과도 같은 소리였다.
세실레는 고작 그의 곁에 머무르기에는 아까운 이였다.
그러니 언제고 세실레가 달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것이 세실레의 자의라면 아르베우타에겐 말릴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해왔다.
애초에 세실레가 제 곁에 남아준 건, 과분한 처사였으니까.
그런데 그 사이에서 아기가 생겼단다.
결코 물릴 수 없는 혈육이 생긴 것이다.
감격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믿기지 않아, 꿈을 꾸는 느낌이었다.
허공에 부유해 있어, 바닥으로 추락할 것만 같은 꿈.
마치 줄다리기를 타듯 아슬아슬한 감각과 동시에 짜릿한 희열이 밀려들었다.
아르베우타의 입에서 내내 머릿속을 맴돌던 단어가 흘렀다.
“……아기라니.”
감히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바라면 안 될 만큼 귀하고 값진 것이었다.
그 대단한 일을 세실레가 해내었단다.
내내 세실레를 품에 안고 몸을 섞어도 가시지 않던 불안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뜨거운 기쁨이 일었다.
아르베우타가 감격에 젖어 웃었다.
“우리 아이가 생겼단 말이지.”
아르베우타가 주먹을 힘주어 쥐었다.
두 사람의 사랑으로 빚어진 아이.
그보다 더한 결과물은 세상에 없었다.
그것을 알기에 루베르도 다급히 달려온 것이리라.
‘지켜야지.’
그는 제 손에 쥔 둘 중 어느 것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세실레도 아이도.
모든 것을 틀어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무엇이든 할 생각이었다.
***
새하얀 눈이 대지 위를 뽀얗게 덮었다.
세실레는 창밖에 앉아 눈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황후궁 공사가 마무리되어서 침실은 훈훈한 열기로 가득했다.
근래 세실레는 궁 밖을 잘 나가지 않고 있었다.
그저 온실을 산책하거나 책을 읽거나 하는 것이 전부였다.
무료한 나날이었다. 막 다과를 먹은 세실레의 눈가에 졸음이 몽글몽글 몰려들었다.
‘사육되는 기분이야.’
세실레는 몽롱한 와중에도 그녀가 지나친 과보호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황후궁의 사람들은 세실레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녀를 크리스털 장식 대하듯 했다.
정원이라도 거닐라치면 온 시종들이 나서서 눈을 치우고 바닥에 카펫을 깔고 거대한 양산을 드리우는 대장정을 거쳐야 가능했다.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수많은 사람이 동원되니, 선뜻 움직이기 무서워질 지경이었다.
‘이것도 나쁘진 않지만……. 이럴 필요까지 있는 건가.’
하지만 편한 건 사실이었다.
지금도 그랬다.
세실레가 숨을 뱉으며 느른하게 눈을 내리깔자마자 도르데아가 다가왔다.
“폐하, 침실을 정돈할까요?”
얼마나 저를 주시하고 있었으면 곧장 말이 나올까.
세실레의 입가에 둥그런 웃음이 맺혔다.
오래전에 도르데아는 잠을 많이 자는 것은 게으르단 증거라며 세실레를 타박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도리어 낮잠을 자겠냐 묻고 있다니.
달라도 너무 달라졌다.
세실레의 머릿속으로 과거의 기억들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더는 아프지 않은 기억들이었다.
행복하고 따스한 추억들이 모난 기억들을 모두 둥글게 다듬어 준 덕이었다.
소중한 기억을 만드는 데 도르데아도 큰 몫을 했다.
회귀 후 혼란스러워하는 동안 먼저 제 편이 되어준 것도 도르데아였고 이 년간 궁을 비웠을 때 황후궁을 돌봐준 것도 도르데아였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세실레는 시녀들과 불필요한 대립을 하며 시간을 소모해야 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도르데아가 중간에서 중재해 주었다.
‘지금도 이렇게 사사로이 챙겨주고.’
오죽하면 아르베우타가 도르데아의 말만은 믿을 정도였다.
지금 자리를 비운 것도 그녀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도르데아는 노쇠한 몸을 이끌고 끝까지 세실레의 곁을 지켰다.
휴식이 필요하지 않냐는 권유마저 한사코 거절하고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세실레가 도르데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고마워.”
뜬금없는 말에 도르데아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녀는 곧 뺨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물줄기를 발견하곤 놀라선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죄송합니다.”
이럴 때마저도 도르데아 같은 대처에, 세실레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녀가 모른 척 말을 이었다.
“졸리다. 조금 자고 싶어.”
“네, 준비하겠습니다.”
도르데아가 화급히 돌아섰다.
다른 이들을 시켜도 되는 것을 직접 하려는 걸 보니, 진정할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하여간 귀엽다니까.’
엄격하기 짝이 없는 도르데아지만, 의외로 여린 구석이 있었다.
사실 요즘 세실레는 백 살 노인도 어리게 느껴지는 중이었다.
너무나도 오래 살아온 탓에, 어지간한 노인조차 그녀 앞에선 아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세실레는 하릴없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한 편에 서 있던 시녀들이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개 중 한 명은 소매로 눈물을 훔치기까지 했다.
세실레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저 애들은 왜 저러는 거지.’
도르데아를 울린 것이 그리도 감동적이었나.
듣기로 도르데아는 시녀들 사이에선 마귀할멈이라고 불린다고 했으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시답잖은 생각을 하던 차에 침실 쪽에서 도르데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러자 시녀들이 서로 모시겠다며 투닥였다.
개 중에 몇몇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기까지 했다.
부담스러울 정도의 시선에 세실레는 무심코 시선을 피했다.
‘요즘 젊은 영애들의 생각은 이해하기 힘들다니까.’
세실레는 노인 같은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곤했다.
한숨 잠을 잘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