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매일같이 보름을 기억했다. 모를 수가 없었다.
보름이 되면 힘이 솟고 신력이 날뛰어 제대로 잠을 이루기 힘들었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보름을 의식하지 않게 됐다.
그저 밤이 밝다는 생각만 했다.
그런데 아르베우타는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세실레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괜찮으니, 안심하란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르베우타의 낯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세실레가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안다는 듯, 먼저 입을 열었다.
“안심할 수 없습니다.”
“음, 어……, 그럼 같이 갈래요?”
“하지만 당신의 시간도 존중하니까요. 저는 여기서 지켜보겠습니다.”
세실레는 아르베우타가 말을 바꾸기 전에 곧장 고개를 끄덕여요.
“좋아요. 잠깐 바람만 쐬고 올게요.”
그러나 그녀는 뱉은 말을 곧장 후회했다.
고작 해봐야 침실과 연결된 테라스로 나가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뒤에 와닿는 눈빛이 어찌나 열렬한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머리카락 하나부터 손끝, 발끝까지 감시를 당하는 기분이었다.
“……음.”
고민하던 세실레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날이 서 있던 시선이 금세 온순해졌다.
그녀와 시선을 마주한 아르베우타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그렇게 감시할 것까진 없잖아요.”
“전 그저 당신을 보았을 뿐인데요.”
순순한 대답에 할 말이 없어졌다.
세실레는 못마땅한 듯 눈썹 사이를 좁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세실레는 테라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시선이 느껴졌지만, 유리창이 가로막아선지 그리 의식되진 않았다.
세실레의 입에서 나지막한 숨이 흘렀다.
“나도 참, 괜한 생각을 해서.”
아르베우타의 시선이야 무시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꾸만 밤의 일이 기억났다.
그와 일 년간 오래도록 붙어 있으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세실레는 그의 눈동자에 약했다.
붉은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면, 어느새 그가 원하는 대로 하게 되는 것이다.
꼭 지금처럼.
‘무슨 생각이람.’
잠시 바람을 쐬러 나온 것이었다.
내내 붙어 있으니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해도 좋을 터였다.
세실레는 잡념을 떨치려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테라스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황후궁과는 달리 황제궁의 침실은 자연경관보다는 건물이 더 많이 보였다.
실용성에 중점을 두어, 관료들이 거하는 외궁부터 연무장이 모두 보이도록 한 것이다.
대신 테라스 바로 아래에 자그마한 정원이 위치해서, 기분 전환하기 좋았다.
세실레는 테라스 난간에 얼굴을 기대곤 중얼거렸다.
“밤공기도 오랜만이네.”
해만 지면 잠드느라 바빴는데, 이렇듯 시간을 보내는 게 얼마 만인지.
세실레는 찬 바람을 그대로 들이켰다.
북풍이 밀려들며 뺨을 때렸다.
자극당한 볼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이불의 힘인지 춥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세실레는 먼 곳을 응시하다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조금 깨어있었다고 그새 졸음이 밀려들었다.
그녀가 잠들려는 것을 눈치챘는지 침실 쪽에서 움직임이 느껴졌다.
세실레는 난간에 기대었던 몸을 일으켰다.
‘슬슬 들어가야겠다.’
더 오래 있다간 감기에 걸릴지도 몰랐다.
그러면 꼼짝없이 일주일은 침실에 갇혀 있어야 할 터였다.
막 몸을 돌리려는 차, 머리 위로 거센 바람이 불어닥쳤다.
고개를 들자, 시야로 날아드는 은빛 깃털이 보였다.
‘……깃털?’
세실레는 무심코 하늘 위로 고개를 들었다.
새하얗고 크고 거대한 새.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이는 새가 푸른 눈을 빛내며 세실레를 굽어보았다.
“삐루욱-!”
새가 크게 울었다.
동시에 허공이 공명하며 사위로 반짝이는 빛이 흩어졌다.
세실레는 고개를 더 들어, 새 위에 앉은 이를 자세히 살폈다.
루베르였다. 그렇다면 이 새는.
“……테레사겠구나.”
그녀 또한 환생을 마치고 다시 태어난 모양이었다.
크고 늠름한 멋진 새.
세실레는 테레사를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다독이듯 사근사근한 목소리였다.
“예쁜 모습이구나. 하지만 난 이제 네 주인이 아니야.”
“삐룩…….”
“어서 가. 루베르, 너와도 더는 할 이야기가 없어.”
그녀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려 했다.
하지만 문이 열리지 않았다.
꽁꽁 얼어붙어 유리문 위로 서리가 가득 꼈다.
침실 안쪽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언제 이런 짓을……!”
세실레는 새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거대한 바람이 불어 걸치고 있던 이불이 날아갔다.
머리카락이 마구 흩날리며 시야가 어지러워졌다.
사방으로 얼음 결정이 흩날렸다.
겨우 눈살을 찌푸리며 시야를 확보하자마자, 새 위에 올라타 있던 루베르가 테라스로 뛰어내렸다.
그가 새하얀 신관복을 펄럭이며 세실레의 앞에 와서 섰다.
세실레는 주춤 뒤로 물러섰다.
지금 그녀에겐 루베르를 막을 수 있는 그 어떠한 힘도 없었다.
그저 몸을 뒤로 물리는 것이 할 수 있는 저항의 전부였다.
그러는 중에도 느껴지는 신력에 가슴이 뛰었다.
‘익숙한 힘.’
세실레는 무심코 앞으로 손을 뻗었다.
세실레는 신력 속에서 태어났다.
태중부터 함께했던 힘이었다.
지금은 빼앗겨 없어진 힘이기도 했다.
그래선지 막상 신력을 마주하자 목이 말랐다.
세실레 본인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갈증이었다.
자연스레 몸이 이끌렸다.
세실레는 무심코 루베르를 향해 다가갔다.
루베르는 제게로 다가오는 세실레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그의 입에서 애절한 목소리가 흘렀다.
“……어머니. 어머니를 빼앗길 순 없습니다.”
세실레는 저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루베르의 품에 가만 안겨 있었다.
살갗이 닿는 족족 스며드는 신력에 몸이 움찔거렸다.
루베르는 세실레의 갈망을 잘 알고 있다는 듯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데리러 왔어요.”
“……응.”
“제가 그리우셨죠.”
세실레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력한 신력에 몸이 물 먹은 듯 무거웠다.
머릿속이 흐릿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여긴 어딘지 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강하고 정순한 힘 속에 묻혀, 내내 이러고 있고 싶었다.
제 원천이 있는 달로 돌아가면, 모든 힘을 되찾을 수 있을 텐데.
무심코 이어지는 생각에 세실레는 퍼뜩 정신을 차리곤 루베르를 밀쳐 내었다.
그 순간, 둘 사이로 검격이 그어졌다.
아르베우타가 둘 사이를 잔혹하게 파고든 것이었다.
아르베우타가 세실레를 가로막듯 섰다.
그러다 눈이 풀린 세실레를 발견하곤 입술을 물었다.
세실레의 머리 위로 나직한 음색이 내려앉았다.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
“오늘 기분이 좋지 않더라니.”
아르베우타는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이 일로 세실레를 책망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다행히 루베르는 싸울 생각이 없는 듯 순순히 물러났다.
대신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계속해서 올 겁니다. 당신께서 저희를 버린 만큼 불행해지실 때까지. 그래서 다시금 저희를 찾으러 오실 때까지 말입니다.”
아르베우타는 그의 말이 들리지 않게끔 세실레의 두 귀를 막았다.
하지만 세실레의 귀에는 분명히 전달되었다.
어째선지 그 말이 세실레는 분하게 느껴졌다.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는 자신 또한.
세실레는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 위로 세찬 바람이 불었다.
그들이 떠난 모양이었다.
세실레는 그제야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로 신력의 잔재가 남아 아른거렸다.
***
다음 날 아침, 세실레는 아르베우타와 함께 눈을 떴다.
그러곤 그가 연무장에 나갈 때 따라 나갔다.
아르베우타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으나 세실레는 말없이 머리를 올려 묶었다.
눈빛이 단호했다.
왜 그러느냐 묻는 표정에 세실레가 나직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강해질 거에요.”
“……세실레, 그런다고 루베르를 이기진 못합니다.”
인간의 신체적 능력으로는 달의 존재들을 이길 수 없었다.
각성자인 아르베우타와 디젤라만이 상대가 가능했다.
게다가 세실레는 신력조차 사라진 상태였다.
조금만 할퀴어도 상처가 났고 무리하면 앓았다.
이제 와 몸을 지키기 위해 검을 배우는 것은 무리였다.
“차라리 호위를 강화하겠습니다.”
아르베우타는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저들은 세실레를 직접적으로 위협할 수 없었다.
이번 일만 해도 그랬다.
그들이 마음만 먹었다면 세실레를 납치할 시간은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루베르는 그러지 않았다.
고작 해봐야 장엄한 광경을 연출하며 세실레의 마음을 어지럽혔을 뿐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아르베우타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런데 왜 갑자기?’
내내 얌전하던 루베르 일행이 움직인 이유가 무엇일까.
혹여 그의 말대로 지금 세실레가 불행한 것은 아닌가.
아르베우타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 고개를 저었다.
당장은 세실레를 진정시키는 게 먼저였다.
아르베우타가 세실레를 실내로 이끌었다.
“우선 식사부터 하고 생각해요.”
“아르베우타!”
“세실레, 화가 난 건 이해하지만 날이 춥습니다.”
운동하기엔 날씨가 좋지 않았다.
세실레의 피부는 몹시 예민해, 이렇듯 기온 차가 심할 때는 조금만 움직여도 피부에 두드러기가 일었다.
그런데 바깥에서 운동이라니.
절대 안 될 말이었다.
그는 세실레를 별궁에 앉히고는 따뜻한 수프를 내오라 시켰다.
세실레는 순순히 끌려오면서도 못마땅한 듯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느껴지는 구역감에 입을 틀어막았다.
분명 평범한 수프 냄새였다.
주방장이 정성껏 만들었을 수프는 고소한 향을 냈다.
그런데도 세실레는 속이 뒤틀리는 듯한 감각을 참을 수 없었다.
‘체한 건가.’
세실레는 입을 틀어막은 채 눈만 깜빡였다.
수프가 가까워질수록 속이 좋지 않았다.
이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장염에 걸렸을 때였다.
음식 냄새만 맡아도 속이 좋지 않고 물만 먹어도 다 게워냈다.
‘어제 뭘 잘못 먹은 모양이야.’
세실레는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의아한 눈으로 절 보는 아르베우타를 향해 차근차근 설명했다.
“……속이 좋지 않아서 쉬어야겠어요.”
“네? 어디가 불편하신 겁니까?”
“좀 체한 모양이에요. 속을 비우면 괜찮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