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설핏 들었던 잠마저 깰 정도로.
감았던 눈을 떴다. 이미 반쯤 잠들었던 탓에 시야가 흐릿했다.
새끼 곰은 세실레를 보고 있었던지, 곧장 시선이 마주쳤다.
곰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세실레는 곰을 몇 번 도닥이다가 느릿하게 입을 열어 물었다.
“원래 모습으론 언제쯤 돌아오려고요?”
하지만 곰은 대답하지 않았다.
도리어 얼굴을 돌리곤 잠자는 척을 했다.
‘끝까지 밝힐 생각 없다 이거지.’
그렇다면 세실레 또한 순순히 있을 생각은 없었다.
세실레는 종을 울려 시녀를 부르곤 말했다.
“이제 자려는데 새끼 곰을 우리에 데려놔 줘.”
“……우리예요?”
“아무리 반려동물이라지만, 곧 아르베우타가 올 테니까.”
“……그렇죠.”
시녀가 곰을 흘깃 곁눈질했다.
어쩌면 좋겠냐는 표정이었다.
중간에 껴서 난처한 표정을 짓는 시녀에겐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지.
세실레는 새끼 곰을 안아 올리며 시녀 품에 안겨주었다.
“여기. 난 너무 졸려서 이만 자야겠어.”
그러나 새끼 곰은 시녀의 손에 닿자마자 몸을 뒤틀었다.
“어어?”
새끼 곰이 난리 치는 탓에 시녀가 곰을 놓쳤다.
그러나 곰은 멋지게 착지해선 침대 위로 뛰어올랐다.
그러곤 이불 속에 묻혀 상황을 관전하는 세실레의 품에 안겨들었다.
“크릉.”
으르렁거리는 것이 조금 전 왜 그랬냐며 세실레를 책망하는 듯했다.
세실레는 웃으며 곰을 쓰다듬었다.
“화가 났니?”
핥짝. 곰이 손등을 핥았다.
세실레는 곰을 다시금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하지만 내 옆자리는 주인이 따로 있는데.”
새끼 곰이 귀를 쫑긋 세웠다.
세실레는 곰의 까만 코를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새까만 코가 반질반질하고 촉촉했다.
다른 동물은 코를 만지면 싫어한다는 데, 이 엉큼한 곰은 무슨 짓을 해도 피하질 않는다.
대신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하며 눈을 반짝반짝 빛내기만 했다.
한동안 혼자 두었더니 단단히 삐진 모양이었다.
‘어쩌면 좋으려나.’
세실레는 잠시 고민하다가, 귓가에 대고 작게 소곤대었다.
“여긴 주인이 따로 있어. 그 사람은 내 옆에 다른 사람이 있는 걸 싫어하거든.”
“뺘아…….”
“막 질투해서 널 쫓아낼지도 몰라.”
새끼 곰이 마구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고 항변하는 모양새였다.
그러자 세실레가 두고 보라며 팔짱을 꼈다.
“쫓아내기만 하면 다행이게? 막 눈을 부라리면서 ‘……세실레, 이 곰은 뭡니까?’라고 할걸? 엄청 싫은데 웃으면서 말할 거야.”
“…….”
“그땐 넌 이미 죽은 목숨, 앗!”
세실레가 침대 위로 풀썩 넘어졌다.
그 위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새끼 곰이 아르베우타의 모습으로 변해선 세실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번뜩이는 붉은 눈이 그녀를 뚫어질 듯 응시했다.
그러나 입술만은 서글서글하게 웃고 있었다.
조금 전 그녀가 말한 그대로.
“이렇게 말입니까?”
“……음, 그렇죠.”
“그럼 당신께선 제 시선을 피하시겠죠, 지금처럼.”
때마침 시선을 피하고 있던 세실레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그녀는 느릿하게 시선을 돌려 아르베우타를 바라보았다.
아르베우타의 눈동자는 타버릴 듯 강렬했다.
한 번 눈을 마주하면 피하기 힘들 정도로.
이글거리는 한낮의 사막에서 보았던 태양처럼, 그의 눈동자는 묘한 갈증을 일으켰다.
주변은 모두 아지랑이가 핀 듯 흐릿해지고 오직 그만이 시야에 남았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시선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사이 아르베우타가 단단히 그녀를 안았다.
허리를 파고드는 손에 세실레는 느리게 숨을 삼켰다.
그녀는 거침없는 손길과는 상반되게 꿀이 떨어질 듯 상냥한 눈으로 저를 보는 아르베우타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짓궂기는.”
아르베우타가 세실레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간 떨어져 있던 시간을 보상받겠다는 듯이, 그가 힘껏 세실레의 체취를 들이켰다.
“취미 찾기를 도와드렸을 뿐입니다.”
끝까지 뻔뻔한 남자였다.
세실레의 입에서 웃음이 흘렀다.
“생각보다 괜찮던데요? 공사가 마무리되면 개라도 입양할까 봐요.”
“……개는 산책도 시켜줘야 하고, 여러모로 번거로운 동물이죠.”
그러면서 세실레의 쇄골을 가볍게 물었다.
마치 투정을 부리듯이.
하지만 세실레는 모른 척 말을 이었다.
“음, 그러면 새는 어때요? 노랫소리가 듣기 좋을 텐데.”
“새는 깃털이 날려 별롭니다. 호흡기에 좋지 않아요.”
“아하, 그러면……읏.”
아르베우타가 세실레의 귓바퀴를 핥았다.
귀 뒤부터 천천히, 핥듯이 움직이는 혀에 세실레가 몸을 떨었다.
예민한 몸은 작은 자극에도 쉬이 반응했다.
푸른 눈동자 가득 물기가 스몄다.
아르베우타가 흐트러진 은발을 쥐어 넘기며 속삭였다.
“노랫소리는 이쪽이 더 듣기 좋은데요.”
“그만, 간지럽잖아요!”
세실레가 그를 밀쳤다.
하지만 아르베우타는 꿈쩍 않고 세실레의 귓가에 조곤조곤 말을 흘렸다.
“제 새는 간지럽혀야 노래를 부르거든요.”
세실레의 뺨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귓바퀴를 핥는 혀는 진득했고 목소리는 깊고 낮았다.
그것만으로도 몸이 마비될 것 같은데, 코앞에서 그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마치 세실레가 무엇에 시선을 앗기는지 잘 알고 있다는 듯이.
그와 한참이고 눈을 마주하던 세실레가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 장난꾸러기라니까…….”
옆에서 헛헛한 웃음이 흘렀다.
그럴 때마다 귓전에 와닿는 뜨거운 숨에 몸이 움찔 떨렸다.
한참 취미 찾기에 몰입한 덕인지, 답지 않게 금욕했다.
오래간 관계를 맺지 않은 몸은 놀랍도록 예민했다.
세실레는 아르베우타와 맞닿은 곳이 화끈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건 아르베우타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유로운 척을 하지만, 그의 아래는 존재감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 장난을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꿋꿋이 취미를 입에 담는 것을 보아하니.
“그래서 이번엔 어떤 동물을 키워보시겠다고요?”
대답엔 관심도 없으면서 말이다.
아르베우타의 입술이 세실레의 목가를 느리게 핥았다.
그의 다른 손이 가볍게 여민 끈을 풀고 속살을 어루만졌다.
그러나 묵직하게 살결을 짓누르는 충족감은 들지 않았다.
닿을 듯 말 듯 애간장을 놓는 것이다.
세실레는 간지러움에 몸을 떨다, 겨우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짚었다.
그러곤 왜 그러냐는 듯 눈을 접으며 웃는 아르베우타를 향해 급히 답했다.
“……하지만 그 곰은!”
“곰은?”
아르베우타의 입가에 느긋한 웃음이 걸렸다.
세실레는 부끄러운 듯 잠시 입술을 물다가, 겨우 말을 이었다.
“오, 옷도 다 벗고 있고.”
“…….”
“갑자기 엄청 커지기도 하고, 아, 물론 귀엽지만.”
“…….”
“……그렇다고 사람 모습으로 안고 있기도 뭐하잖아요.”
그러지 않아도 반나절 내내 붙어 있는데, 이제 나머지 시간엔 곰으로 변한 그를 끌어안고 있으라니.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게다가 그는 세실레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바빴다.
매일같이 새벽에 일어나 업무를 보지 않던가.
그런데 이제는 곰의 모습으로 펜을 들게 될지도 모른다니.
그런 괴이한 모습은 한사코 사양이었다.
‘취미를 찾기 시작한 이유와도 한참 벗어나 있고.’
여러모로 문제가 많았다.
세실레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아르베우타가 헛숨을 내쉬었다.
그가 말없이 세실레를 껴안았다.
맞닿은 가슴에서 심장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맨살이 맞닿아 뭉개졌다.
다시금 묘한 간지러움이 피어올랐다.
그 속에서 아르베우타가 조용히 말했다.
“알겠습니다.”
아르베우타는 순순히 그녀의 곰이 되기를 포기했다.
세실레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취미 찾아봤는데…… 피곤하기만 하고 잘 모르겠어요.”
아르베우타가 웃음을 터트렸다.
세실레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떨궜다.
“그냥 이대로가 나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럼 잠정 보류하도록 하죠.”
세실레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베우타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세실레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세실레의 취미 찾기는 막을 내렸다.
***
깊은 밤이었다.
세실레는 어쩐지 잠이 오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를 빠져나가려는 그녀를 아르베우타가 손을 뻗어 잡았다.
얇은 슬립 위로 커다란 손이 닿았다.
아르베우타가 세실레의 허리께에 손을 얹고 그녀를 끌어당겼다.
깊게 잠긴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어디 가려고요?”
“……잠깐 바람 좀 쐬려고요.”
“같이 갈까요?”
세실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낮 동안 한가로이 보내는 그녀와 달리 아르베우타는 해야 할 일이 몹시 많았다.
이제 두어 시간만 지나면 다시 일과를 시작해야 할 텐데, 새벽부터 붙들고 있을 순 없었다.
“괜찮아요. 침실에만 있을 거니까.”
“바람이 찰 겁니다.”
황후궁 공사를 하느라 세실레는 밤마다 아르베우타의 침실에서 머무는 중이었다.
벽난로를 켜고도 모자라 곳곳에 화로를 두어 실내는 몹시 따뜻했다.
하지만 정원과 이어진 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가면 바람이 찼다.
첫눈이 내릴 정도로 추운 겨울이었다.
아르베우타가 상체를 일으켜, 세실레의 몸을 두툼한 이불로 감싸 주었다.
“감기라도 들면 큰일 나요.”
“……큰일 날 것까지야.”
세실레는 아기 포대 묶듯 몸을 둘둘 두르는 이불을 바라보다가 느리게 입을 뗐다.
“그럼 당신이 덮을 게 없는데요.”
“저는 너무 더워서 땀이 납니다.”
시종들이 공들여 조절한 방 온도는 딱 좋았다.
땀이 흐를 정도로 답답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래저래 말꼬리를 늘여봤자, 아르베우타는 꼼꼼히 여민 이불을 벗겨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쩔 수 없지.’
대신 세실레는 침대 시트를 반쯤 빼다 그에게 덮어주었다.
가만히 누워서 목 끝까지 덮이는 침대 시트를 바라보던 아르베우타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저를 재우려 하시는군요.”
“어서 자요. 저도 금방 돌아올게요.”
“죄송하지만, 오늘은 그렇게 못 하겠습니다.”
아르베우타가 바깥을 눈짓했다.
세실레도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커튼 새로 환한 달빛이 스며들었다.
그제야 세실레는 그녀가 놓치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아, 보름이구나…….”
세실레가 테라스로 다가가 커튼을 쳤다.
하늘 위로 보름달이 환히 떠올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