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세실레는 디젤라와 헤어진 후, 고민에 잠겼다.
‘취미를 가져보라고?’
그러고 보니 세실레는 취미 활동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나마 하는 것이 책을 읽거나 차를 마시는 것뿐이었다.
요즘엔 제대로 된 황후 노릇을 해보겠다며 공부를 하고 있긴 하지만 이 역시 취미라기엔 무리가 있었다.
“취미라…….”
세실레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러자 옆에서 시중들던 도르데아가 선뜻 말을 건네왔다.
“취미로 하고 싶은 활동이 있으십니까?”
“그건 아녜요. ……도르데아는 취미가 있나요?”
도르데아가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저는 자수를 즐겨 하죠. 저기 있는 레비는 달리기가 취미이고, 휴는 요리를 좋아한답니다.”
“다들 좋은 취미를 갖고 있군요.”
“네, 폐하께서는요?”
도르데아의 물음에 세실레는 입을 다물었다.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에 대해 단 한 번도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녀가 망설이자 도르데아가 잔잔한 목소리로 조언했다.
“조급히 생각하실 필요는 없어요. 폐하께서 평소에 좋아하시던 걸 떠올려보시면서 이것저것 하시다 보면 자연스레 깨닫게 될 테니까요.”
세실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르데아의 말대로 된다면 좋겠지만, 아직은 그녀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
취미, 취미라.
지금껏 누군가 그녀에게 취미를 가져보란 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너무나도 당연히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자신이 무얼 좋아하는지, 관심이 있는지에 대해 돌아볼 생각조차 못 했다.
‘그런데 평범한 삶이 지루하다고 생각했다니.’
신선한 충격이었다.
세실레는 이번 일을 계기로 자신에 대해 돌아보기 시작했다.
어찌나 몰입했는지 다른 말이 귀에 들리지도 않을 정도였다.
“……레, 세실레?”
“…….”
“이런, 어디 아픈 건 아닌 것 같은데.”
아르베우타가 세실레를 빤히 응시했다.
보고 받은 바에 의하면 디젤라와 대화를 나눈 후로 내내 저런 상태라고 했다.
취미 이야기가 나왔다는 거로 봐선 그 생각 중일지도 몰랐다.
실제로 세실레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면서 내내 무언갈 중얼거리고 있었다.
붉은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가끔 꾹 물기도 했다.
푸르른 눈동자는 잔뜩 우수에 젖어있었다.
아르베우타는 관심 끌기를 포기하고 턱을 괸 채 세실레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뚫어질 듯한 시선에도 세실레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분명 조금 전 인사하고 저를 안아주었으면서도, 잠시 시간이 비자 이렇듯 금방 생각에 잠겨 버린 것이다.
‘어지간히 고민이 되는 모양이군.’
세실레가 저를 두고 다른 생각에 잠기는 것이 못마땅하기는 했다.
하지만 취미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이 보기 좋기도 했다.
아르베우타는 내심 세실레가 떠나버리면 어떡하나 불안했으니까.
‘취미라니.’
아르베우타의 입가가 둥그렇게 휘었다.
세실레가 이곳에서 살아가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무엇보다.
‘너무 귀엽잖아.’
아르베우타의 얼굴에 흐뭇한 웃음이 맺혔다.
진로를 고민하는 아이처럼 진지한 모습이라니.
아르베우타는 한참이고 고민하는 세실레를 지켜보았다.
그사이 가득했던 먹구름이 지고 하늘 위로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또한 호기심으로 가득 차선 세실레를 지켜보는 것 같았다.
그녀 위를 비추는 달빛이 괜히 못마땅해, 아르베우타가 손을 뻗어 커튼을 쳤다.
그제야 생각을 마친 세실레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내내 오물대던 입에서 감탄이 흘렀다.
“아!”
“아?”
“벌써 밤이네…….”
내내 옆을 지킨 사람에겐 아무런 관심도 없어 보이는 반응이었다.
괜히 못마땅해진 아르베우타가 불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옆에 누가 있는지는 관심도 없으시군요”
“……음, 당신도 있었군요?”
“이건 좀 상처로군.”
아르베우타가 일부러 서글픈 목소리를 냈다.
세실레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미안해요.”라고 속삭이더니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제 허리를 단단히 붙잡은 손이 있다는 걸 눈치조차 채지 못한 채로.
“졸리다…….”
내내 이런저런 생각을 했더니 금세 피로해졌다.
게다가 낮엔 운동도 하지 않았나.
원래는 낮에 가볍게 낮잠을 잤을 텐데, 오늘은 조금도 쉬지 못한 탓에 금방 잠이 밀려들었다.
세실레가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이자 옆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세실레는 못 들은 척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잘 자요.”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장 잠에 빠져들었다.
세실레의 이마 위로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다.
아르베우타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좋은 꿈 꾸십시오.”
***
세실레는 해가 떠오르자마자 잠에서 깼다.
지저귀는 새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지며 아침의 시작을 알렸다.
막 어둠이 걷히는 시간이었다.
어째선지 방이 밝다 싶더니, 아르베우타가 구석에서 촛대 하나에 의지한 채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잠에 취한 채 아르베우타가 일하는 모습을 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이렇듯 맑은 정신으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세실레가 새삼 감탄해선 속삭였다.
“벌써 일어났군요.”
“그대야말로.”
아르베우타의 목소리는 낮게 잠겨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맑게 빛났다.
새벽같이 하루를 시작하는 그를 보니, 세실레도 의욕이 솟았다.
“오랜만에 일찍 일어나니 기분이 좋네요. 나도 이제부턴 아침 일찍 일어나야겠어요.”
일찍 같이 업무도 보고 공부도 하고, 취미 생활도 하는 것처럼 완벽한 하루가 있을까.
세실레는 감탄하며 바깥을 보았다.
밖에선 달리기가 취미라던 레비가 머리를 하나로 높게 올려 묶고 달리고 있었다.
레비는 황후궁의 시녀였고 이름 있는 가문의 여식이었다.
또한 세실레와 오랜 시간을 함께한 시녀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지금껏 레비가 저렇듯 활기차게 아침을 여는 모습을 세실레는 처음 봤다.
“그렇다면 나도……!”
어젯밤 내내 고민해봤으나 세실레는 저가 뭘 좋아하는지 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좌절하진 않았다.
모르겠으면 이제라도 이것저것 해보면 그만이니까.
“저 달리기 좀 하고 올게요!”
“달리기? 세실레, 잠깐 아침은…….”
“먼저 드세요!”
세실레는 순식간에 침실에서 사라졌다.
타오르는 햇빛을 받아 붉은빛으로 반짝이던 은발이 순식간에 문틈으로 사라졌다.
아르베우타는 멍하니 사라진 세실레의 잔영을 좇다가 허허로운 웃음을 흘렸다.
세실레가 기뻐 보이니 덩달아 기뻐야 할 텐데, 어쩐지 버림받은 기분이 들어 쓸쓸했다.
***
세실레의 취미 찾기는 꽤 오랜 시간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달리기, 검술, 그림, 원예, 작문 등을 배우고 익혔다.
모든 것은 재밌고 즐거웠다.
하지만 취미로 삼을 만큼 흥미롭지는 않았다.
그러다 무심코 세실레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루베르!’
세실레는 루베르처럼 작고 귀여운 무언가를 품에 안고 있는 걸 좋아했다.
하지만 루베르는 특수한 경우였고 보통의 아이들은 얌전히 세실레의 품에 안겨 있지 않았다.
당장 유델만 해도 그랬다.
세실레의 고민을 읽어낸 도르데아가 곧장 좋은 취미를 추천해주었다.
“동물을 기르시는 건 어떠십니까?”
“동물?”
“네, 키우시면서 같이 산책도 하시면 건강에도 좋을 겁니다.”
“그런 것도 취미가 되는 건가?”
“물론이죠, 동물을 기르는 덴 상당한 정성이 필요하답니다.”
세실레는 도르데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선뜻 동물을 들이기엔 여러모로 고민이 많았다.
생명이었다. 다른 취미들과는 달랐다.
단순히 흥미로 입양했다간, 후에 곤란해질 테니까.
‘게다가 황후궁은 공사 중이라 혼잡스럽고.’
그래서 세실레는 도르데아의 제안을 잠정 보류해 두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아르베우타의 귀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 동물 내가 하지.”
세실레의 취미 찾기 한 달째.
아르베우타는 자신이 그 취미가 되어주기로 결심했다.
***
세실레는 근래 바쁜 하루를 보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세실레는 아침 달리기로 하루를 시작하고 간단한 업무를 마친 뒤, 꽃꽂이를 배웠다.
그런 다음엔 외국 문화를 가르치러 온 외교부 장관과 공부를 했다.
정신없이 일정에 치이고 나니, 밤이었다.
“하, 지쳤다.”
세실레는 막 옷을 갈아입고 침실로 들어섰다.
그런데 이게 웬걸, 새하얀 이불 위에 붉은빛 털을 가진 아기곰이 앉아있었다.
“……곰?”
세실레의 물음에 곰이 검은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곰이 통통한 앞발로 마구 이불을 비비며 쳤다.
“뺘!”
“……뺘?”
“뺘뱌!”
“뺘뱌? ……아르베우타 제대로 말해요.”
세실레가 곧장 눈을 흘겼다.
웬일로 조용하다 싶더니, 이런 일을 꾸미고 있었을 줄이야.
하지만 새끼 곰은 꿋꿋하게 두 발로 일어나 폴짝폴짝 뛰었다.
그러고도 제게 오지 않는 세실레를 보곤 다시금 외쳤다.
“뺘악!”
마치 이리로 오라고 투정을 부리는 것 같았다.
“정말이지…….”
세실레는 체념한 목소리로 침대로 다가갔다.
그러자 새끼 곰이 폴짝 뛰어 세실레의 품에 안겼다.
세실레는 못 이긴 척 새끼 곰을 받아들었다.
하지만 새끼 곰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세실레가 무게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다,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나 곰은 모르는 일이라는 듯 세실레의 품에 얼굴을 묻을 뿐이었다.
“뱌, 뺘아, 뱌.”
위로하는 것도 같았고 좋다는 것도 같았다.
분명한 점은 그가 온몸으로 기쁜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제야 세실레는 손을 뻗어 새끼 곰을 쓸어주었다.
손바닥으로 와닿는 털이 부드럽고 윤기가 흘렀다.
품에 꼭 안기는 체온은 따듯했다.
생각보다 만족스러운 감각이었다.
꼭 지친 하루를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취미를 찾는다고 내내 바쁘게만 보냈네.’
노곤한 상태로 따뜻한 것을 안고 있으니 그간의 피로가 몰려왔다.
본래 세실레는 활동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루베르와 있을 때도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저 품에 안고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기곤 했을 뿐이다.
‘그것도 취미라면 취미려나.’
세실레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그녀가 웃자 새끼 곰도 따라 웃었다.
쫑긋거리는 귀가 눈에 띄게 움직였다.
“뱌아.”
새끼 곰이 세실레의 가슴팍에 얼굴을 푹 묻었다.
세실레는 곰을 안아 든 채로 한참이나 가만히 있었다.
고조되었던 감정이 천천히 가라앉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세실레는 느리게 뛰는 심장 소리를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다시금 졸음이 몰려들었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딱 좋겠는데…… 문제가 생겼다.
품에 안은 곰의 심장이 몹시도 세게 고동치고 있다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