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세실레가 유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유델은 세실레를 곁눈질하더니 다시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상대도 하기 싫다는 표정이었다.
‘정말 문제네.’
유델이 이렇게 자신을 싫어하는지는 몰랐다.
‘좀 더 자세히 살폈으면 좋았을 텐데.’
세실레는 나직이 숨을 뱉었다.
황궁으로 돌아와서 도통 여유를 가질 틈이 없었다.
긴 여독을 푸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그건 아르베우타 또한 마찬가지였다.
매번 둘이 붙어 있다 보니, 바깥을 살필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지금이었다.
세실레는 책에 몰입하는 두 모자의 사이에 앉아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제야 디젤라가 읽던 책을 내려놓으며 세실레를 향해 물었다.
“그래서 언니는? 잘 지냈어? 오늘은 웬일로 혼자 있고?”
쏟아지는 질문에 세실레는 볼을 긁적였다.
“나야 잘 지냈지. 혼자야 뭐, 그이도 바쁜데 항상 붙어 있을 순 없는 거니까.”
“항상 붙어 있던데?”
“마자. 항상 붙어 이짜나요.”
이어지는 말에 세실레는 다시금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분명 무언갈 하러 온 것 같은데 지금은 머릿속이 새하얗기만 했다.
세실레는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생각 정리가 필요했다.
그러자 디젤라가 대뜸 입을 열었다.
“유델 때문이지?”
“……어?”
불쑥 튀어나온 본론에 세실레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정작 이야기를 꺼낸 당사자는 담담하기만 했다.
“유델이 버릇없는 짓을 했다며. 그러지 않아도 내가 혼냈어. 유델, 황후 폐하께 사과드려야지.”
디젤라의 재촉에 유델이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하지만 디젤라는 더욱 엄하게 유델을 다그칠 뿐이었다.
“유델!”
엄한 호통에 그제야 유델이 느리게 고개를 까딱였다.
“……잘모탰습미다.”
“더 크게 말해야지. 또박또박. 이유도.”
“……무례한 짓을 저질렀어여. 잘모탰습니다!”
유델이 우렁차게 외치며 세실레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사과하는 이의 표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를 제대로 교육해본 적이 없는 세실레는 아이를 더 나무랄 수 없었다.
‘루베르는 원래 나이가 많았다지만, 얘는 그런 것도 아니고.’
게다가 유델은 세실레가 엄마의 자리를 앗아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유델로선 충격이 컸으리라.
세실레는 손을 내젓고 말았다.
“괜찮아. 그보다,”
그러나 세실레가 말을 잇기도 전에 유델이 바락 화를 냈다.
“괜찮다자나!”
“유델! 정신 못 차리지!”
“엄마 미어! 엄만 바보야! 아무것도 몰라!”
“이게, 이상한 말만 배워서. ……야! 거기 안 서!”
유델이 다다다 멀리 달아났다.
품엔 몸만 한 책을 꼬옥 끌어안은 채였다.
디젤라는 분에 차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곧장 힘을 쓰려는 것을 세실레가 말렸다.
“디젤라, 아직 어린 애잖아.”
“언니, 언니는 그 어린애에게 당하고 또 그래? 그렇게 물러터졌다간…….”
“거기까지. 무른 이야기 하러 온 거 아니야.”
세실레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결의가 실린 푸른 눈동자에 디젤라가 입을 다물었다.
디젤라는 잠시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가 다시금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마구잡이로 늘어진 필기구며 종이를 대충 정리하고는 돗자리 안쪽 자리를 세실레에게 내주었다.
“여기 앉아.”
“고마워.”
세실레는 드레스 자락을 모아 앉았다.
시야로 디젤라가 정리하는 약초학 이론이 눈에 들어왔다.
새삼 그녀가 사람들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가 보였다.
공부라곤 질색하던 디젤라가 이제는 책에 묻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으니까.
세실레가 새삼스레 감탄했다.
“정말 열심히 하네.”
“……뭐, 하다 보니까.”
디젤라가 어색한지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세실레의 극찬은 끊이지 않았다.
“정말 멋지다, 디젤라. 네 덕에 많은 사람이 도움을 받을 거야.”
디젤라가 어색한지 말을 돌렸다.
“뭘, 언니는 잘 지냈어?”
세실레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나는 잘 지냈지.”
“그래 보여. 안색이 아주……. 나랑 쟈르스는 썩어들어가는데!”
“……내가 아르베우타한테 말해서 휴가 좀 줘보라고 할게.”
“정말?”
디젤라의 얼굴에 순식간에 화색이 어렸다.
세실레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아마, 괜찮을 거야.”
쟈르스가 떠나면 아르베우타의 업무량이 늘었다.
그녀와 시간을 보내지 못해서 안달인 그가 쟈르스의 휴가를 순순히 허락할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디젤라는 이미 완전히 들떠버린 뒤였다.
“언니가 부탁하면 되겠지! 아, 어디로 놀러 가지?”
여기저기의 휴양지를 가늠해 보는 것이 눈에 훤했다.
그간 제 몫의 역할을 하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황궁 생활에 적응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테고.
귀족들의 견제며 예법 따위를 생각하던 세실레의 표정이 어둡게 변했다.
“고생 많았어.”
하지만 디젤라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덤덤히 답했다.
“응? 뭐가? 황궁이야 호화롭고 좋지 뭐, 조금 답답하긴 하지만.”
“그래?”
“그래도 뭐,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음식 갖다 바치지. 드레스도 치수 맞춰서 만들어주고, 또 뭐가 있더라. 맞아, 다들 나한테 허리 숙이고 인사하고! 온수에서 보글보글 거품 목욕하고. 뭐…… 나는 역시 밖이 좋지만 여기 생활도 나쁘진 않아.”
“다행이네.”
디젤라가 두 팔을 활짝 펴며 기지개 켰다.
그녀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세실레도 마찬가지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은 하늘 위로 먹구름이 스멀스멀 스며들었다.
곧 한바탕 무언가 내릴 것 같았다.
디젤라가 한참 하늘을 응시하다가 말했다.
“내기할래?”
“내기?”
“오늘 첫눈이 내릴지 비가 내릴지 말이야.”
세실레가 생긋 웃었다.
“좋아. 난 첫눈에 걸래.”
“그럼 나는 비.”
그러고 또 대화가 끊어졌다.
내기로 무엇을 걸지조차 정하지 않은 채로.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세실레가 입술을 달싹이던 차, 디젤라가 먼저 말을 꺼냈다.
“언니, 나는 아무런 욕심도 없어.”
역시 디젤라는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는지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세실레는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게다가 우리 사이엔 아이도 없고…….”
“생기겠지.”
“그건 모르는 일이야.”
디젤라가 단호한 어조로 덧붙였다.
“생길 거라는 가정하에 정리해두는 편이 옳아. 쟈르스도 그렇게 말했어.”
“……넌 속상하지 않아?”
“속상할 리가. 원래 내 것이 아닌데.”
디젤라의 성품만큼이나 담백한 이야기였다.
깔끔하게 정리하는 목소리에 미련은 묻어나지 않았다.
그제야 심각하던 세실레의 얼굴에도 웃음기가 머물렀다.
디젤라는 정말 좋은 동생이었다.
그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이렇게 말은 하지만 그녀에게도 욕심이 있을 터였다.
디젤라는 아니더라도 유델이 바라니 속이 상할 수도 있었다.
자리를 비우고 골치 아픈 일을 미뤄놓은 언니에게 섭섭함이 생길 만도 했다.
그러나 디젤라는 그 모든 것을 단 한마디 말로 일축해버렸다.
“대신 보상은 두둑하게. 쟈르스가 목록 가지고 오랬어.”
그 말이 꼭 세실레의 짐을 덜어주려 하는 것 같아서, 그녀는 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야. 두둑하게 마련해 둘게.”
고작 이 이야기를 나누기까지 얼마나 망설였던지.
이제껏 미뤄온 자신이 한심할 지경이었다.
세실레는 다시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 위로 점점 더 새까만 먹구름이 끼더니 태양도 자취를 감추었다.
순식간에 사방이 흐려졌다. 곁에 앉은 디젤라에게서 감탄이 흘렀다.
“어, 눈이다.”
첫눈이었다.
세실레는 손을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손바닥으로 눈발이 하나둘 날아들었다.
그러나 아직 날이 덜 추운지, 눈은 온전한 결정을 갖추지 못하고 손에 닿자마자 녹아내렸다.
진눈깨비였다.
이마를 간지럽히는 눈을 맞으며 세실레가 작게 중얼거렸다.
“둘 다 이겼네.”
“응?”
“진눈깨비잖아. 눈이기도 하고 비이기도 하고.”
“……그렇네.”
디젤라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세실레는 자리에서 일어나 디젤라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제 들어갈까? 따뜻한 차라도 마시자.”
“아, 언니 춥겠구나.”
세실레는 슬슬 몸이 떨렸다.
하지만 디젤라는 전혀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는 세실레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맞잡은 손이 몹시도 따뜻했다.
언 손이 단숨에 녹을 정도로.
온화한 감각에 세실레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디젤라가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날도 오네. 언니는 영 사람 같지가 않았는데 이제 정말 평범한 사람 같고.”
“……그러게.”
정말로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새삼스럽게 깨달은 사실에 세실레는 잠시 감상에 잠겼다.
평범한 일상엔 금방 익숙해졌다.
그러다 슬슬 하루가 지겹다고 느끼면서 변화를 바라게 되었다.
그토록 평범한 삶을 바랐건만, 어느새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평범이라.’
분명 그걸 원했었다. 소소한 일상에서 오는 작은 행복에 집중하겠노라, 그리 다짐했는데.
그 마음이 이리 쉽게 흐트러졌다니.
세실레는 마주 잡은 디젤라의 손을 힘주어 쥐었다.
디젤라는 또다시 감상에 젖은 세실레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언니, 이러다 울겠어.”
돌아온 이후로 세실레는 어딘가 묘하게 달라졌다.
좀 더 생기가 넘치고 사람다워졌다.
또한 넘치는 감수성을 갖게 되었다.
분명 갖은 고난을 겪고 단단해진 분위기인데, 푸른 눈동자를 들여다보면 온갖 감정이 넘실거렸다.
디젤라는 세실레의 변화를 좋게 보았다.
그녀는 이제야 막 세상을 알아가는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순수하게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슬퍼하고 고민하는 아이.
‘그러고 보니 언니는 뭘 즐기며 산 적이 없구나.’
디젤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약초학에 관심이 있다는 걸 깨닫기 전까진, 그녀도 방황하며 시간을 낭비하기만 했다.
하지만 관심사를 찾자 몰입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싫던 공부도 하게 되었고 이젠 책까지 내게 되었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 줄 모르고 흠뻑 빠지게 된 것이다.
쟈르스가 자기가 먼저냐 약초가 먼저냐며 투정을 부릴 정도로.
‘……이거 괜찮겠는데?’
문득 떠오른 생각에 디젤라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마침 황제가 내 남편을 마구 부리고 있으니 복수도 할 겸.’
디젤라는 엄한 속내를 숨기며 세실레를 향해 한가지 조언을 남겼다.
“언니, 취미를 가져보는 건 어때?”
“취미?”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세실레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와 눈을 마주한 디젤라가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취미. 조금 더 언니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