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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103화 (10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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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레가 눈썹을 가느다랗게 좁혔다.

가느스름한 시야로 아르베우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짐짓 차분한 듯 보이지만 웃음이 가득 맺힌 눈망울이며 한껏 여유롭게 올라간 입매가 그가 지금 얼마나 행복한지 알려왔다.

‘죽다가 살아났으니 즐거울 법도 하지만.’

마냥 그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아르베우타는 이후에 그녀와 보낼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세실레도 그와 함께 있는 것이 좋았으니,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다만 정도라는 게 있었다.

‘매일은 심하잖아?’

세실레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번에야말로 그의 술수에 넘어가지 않고 무사히 밤을 보낼 생각이었다.

세실레는 에피타이저로 나온 샐러드를 먹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는 중에 머리 위로 다정한 음색이 떨어졌다.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있으십니까?”

“……으음, 아뇨.”

“안색이 좋지 않으신데요.”

그가 염려하는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세실레는 반달처럼 접힌 눈 사이로 서글서글하게 빛나는 눈동자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러자 아르베우타가 생긋 웃으며 식기를 놓았다.

그가 손을 뻗어 세실레의 뺨을 쓸며 중얼거렸다.

“또 이렇게 보시면.”

“…….”

“참을 수가 없는데요, 제가.”

볼을 지그시 쓰다듬는 손 마디마디에 힘이 실렸다.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세실레는 습관처럼 눈을 감아 내리려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곤 아르베우타의 손을 잡았다.

그러곤 저를 응시하는 붉은 눈동자를 피하며 느리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네, 말씀하십시오.”

“그, 자꾸 그렇게 빤히 보면 제가.”

“……제 시선이 부담스러우신 건가요?”

서글픈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생긴 건 깎아내린 절벽처럼 매섭게 생기고선 목소리에선 애정이 담뿍 묻어났다.

사려 깊은 눈초리에 세실레는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참을 수가 없네.’

오늘은 아르베우타와 잠시 떨어져 디젤라를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어영부영 넘어가면 턱도 없었다.

세실레가 겨우 아르베우타에게서 시선을 떼곤 말했다.

“그, 그게 오늘은.”

“네.”

아르베우타가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세실레는 혼란하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어 말했다.

“오늘은 디젤라랑 유델을 만나러 가려고 해요.”

세실레는 흘깃 아르베우타의 안색을 살폈다.

황궁에 돌아온 후로, 거의 매일 그와 붙어 다녔다.

그런데 홀랑 가버린다니.

혹여 아르베우타가 섭섭하게 생각하진 않을까 걱정되었다.

그러나 세실레의 생각과는 달리, 아르베우타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쟈르스와 함께 동석하시는 편이 낫겠군요.”

아르베우타가 손을 뻗어 세실레의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이마 부근부터 간질거리는 느낌이 기분 좋았다.

세실레는 느슨하게 눈을 뜬 채로 아르베우타를 보았다.

“왜요?”

“……그거야.”

아르베우타가 말하기 곤란하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가 잠시간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디젤라와 유델이 만나면 항상 언성이 높아지니까요.”

“……그랬던가요?”

“네.”

단호한 답변에 세실레는 생각에 잠겼다.

겁도 없이 황후궁의 욕실을 침범했으니, 유델의 성격이 만만찮지 않기는 했다.

‘디젤라도 한 성격하고.’

둘을 붙여 놓으면 어떻게 될지 빤히 그려졌다.

생각을 마친 세실레가 입을 뗐다.

“그 둘을 중재하는 사람이 쟈르스군요. 하지만 쟈르스 경은 공무로 바쁠 텐데 시간을 빼앗기가 미안한걸요.”

세실레의 말에 아르베우타가 단호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아니요. 시간 많습니다. 넘쳐나요.”

“그럴 리가요…….”

황후궁에만 있는 세실레도 쟈르스가 바쁘다는 건 알았다.

아르베우타의 복귀와 맡았던 일의 마무리를 짓느라 동분서주하는 중이었다.

종종 자리를 비우기도 해, 디젤라가 왜 저만 독수공방하냐며 화를 낸 적도 있었다.

‘불같은 성격으로 어찌나 짜증을 내던지.’

이후로 세실레는 쟈르스의 일을 덜어주겠노라 디젤라와 약속했다.

약속까지 했는데, 공무 중인 사람을 사사로운 일에 끼어들게 할 순 없었다.

세실레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제가 디젤라에게 한 소리 들을걸요.”

엄마가 된 디젤라는 무서웠다.

툭하면 나무를 뿌리째 들어 올리며 협박을 해대는 것이다.

지금도 디젤라가 신신당부하던 것이 선명히 떠올랐다.

“황제가 내 남편 뺑뺑이 돌리고 있잖아!”

하소연에 불과했으나 세실레는 그것이 협박처럼 느껴졌다.

쟈르스 좀 쉬게 해달라는 무언의 압박.

그러니 쟈르스를 이번 일에 동석하게 할 수는 없었다.

세실레가 느리게 숨을 뱉자 위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저와 가실까요?”

“……당신과?”

세실레가 고개를 들어 아르베우타를 보았다.

아르베우타의 입가로 매끄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저도 디젤라 양과 유델 군을 만나고 싶었으니까요.”

세실레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도 업무가 많잖아요.”

“훌륭한 신하들이 많은 탓에 조금도 버겁지 않습니다.”

“새벽마다 침실에 일거리를 들고 오게 하는 걸 알아요.”

“……그들이 당신의 잠을 깨웠습니까?”

일순 아르베우타의 눈초리가 매섭게 변했다.

그를 바라보던 세실레가 손을 뻗어 아르베우타의 눈가를 쓸었다.

“무서운 눈, 감아요.”

“…….”

아르베우타는 순순히 눈을 감았다.

그 위로 부드러운 입술이 맞닿았다.

깃털처럼 가벼운 접촉이었다.

그것이 못내 아쉬웠던 아르베우타가 세실레의 팔을 가볍게 끌어당겼다.

그가 세실레의 품에 묻혀 중얼거렸다.

“혼자 두고 싶지가 않습니다.”

“전 어린 애가 아닌걸요.”

“압니다. 하지만……이 등에 날개가 달려 갑자기 사라질 것 같습니다.”

아르베우타는 손을 뻗어 세실레의 날개 뼈 주변을 문질렀다.

막 목욕을 마친 탓에 감기라도 들까, 겹겹이 걸친 옷 사이로 굵은 손이 파고들었다.

등줄기를 훑는 손에 전율이 일었다.

얼결에 몸을 떤 세실레가 아르베우타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속삭였다.

“……전 어린 애도, 천사도 아녜요.”

“그렇지만……, 걱정됩니다.”

“혼자 있기 싫은 게 아니라요?”

그녀의 물음에 아르베우타가 시선을 맞춰왔다.

그가 망설임 없이 답했다.

“네, 혼자 있기 싫습니다.”

혼자 있기 싫으니, 같이 가자는 뜻이었다.

명령 같기도 부탁 같기도 한 어조였다.

하지만 아르베우타는 바빴다. 제국의 누구보다.

거기엔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런 사람을, 괜한 곳에 시간을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세실레가 거절하기 위해 입을 뗐다.

“혼자서도 충분해요.”

그렇게 답할 줄 알았다는 듯, 아르베우타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대신 유델의 무례는 반드시 꾸짖으셔야 합니다.”

그의 말에 세실레가 놀란 표정을 했다.

“……어떻게 알고 있어요?”

바로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유델이 가고 난 후, 바로 아르베우타를 만나러 왔으니 전해 들을 시간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르베우타는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세실레가 당황해하자, 아르베우타의 입가에 가벼운 웃음이 맺혔다.

“제가 당신 일을 모를 리가 없잖습니까.”

뻔뻔한 대꾸에 세실레의 입에서 가느다란 웃음이 흘렀다.

“정말 못 말린다니까.”

하지만 세실레는 그의 과보호가 싫지 않았다.

도리어 필요했다.

늘 지니고 있던 신력을 잃으니, 혼자 남을 때마다 서늘한 두려움이 몸을 감쌌다.

괜찮다며, 그녀를 괴롭히던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졌다며, 쉼없이 다독여 보아도 불현듯 스며드는 막연한 미래에 대한 걱정을 떨칠 수는 없었다.

그럴 때마다 아르베우타가 곁에 있어 주었다.

그가 곁에 있으면 막연한 두려움은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안도감과 함께 따스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그러면 세실레는 불안을 내려놓고 현재의 삶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예전의 기억을 떠올렸다고 그새 마음이 동요했다.

세실레는 떨리는 손을 힘주어 쥐었다.

그새 어두워진 얼굴로 불쑥 포크가 들이밀어 졌다.

두툼한 스테이크가 보기 좋게 익어 그녀의 앞에서 알랑거렸다.

세실레가 고개를 들자, 아르베우타가 그녀를 향해 웃었다.

“요리가 식습니다. 드십시오.”

생글거리는 미소에 세실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아르베우타가 내민 고기를 조심스레 받아먹었다.

맛있었다.

고기에서 흘러나온 육즙도, 향긋한 향신료도.

모든 것이 어우러져 입안을 즐겁게 만들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딱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어요.”

그녀의 바람에 아르베우타가 답했다.

“그렇게 될 겁니다.”

안 되면 그렇게 되도록 만들 것이란 뜻 같아서, 세실레는 슬며시 웃음을 흘렸다.

***

세실레는 아르베우타와 식사를 마치고 디젤라가 머무는 별궁으로 갔다.

그녀가 돌아온 이후로 디젤라는 수도 부근에 호화로운 저택을 구했다.

하지만 낮엔 별궁에 자주 있는 편이었다.

디젤라의 힘으로 황궁의 정원을 돌보는 경우가 많은 탓이었다.

디젤라가 가꾸는 정원엔 꽃보다는 희귀한 약초로 가득했다.

원래는 제국의 기후와 맞지 않아 기르지 못하는 것들도, 디젤라의 손에선 손쉽게 피어났다.

세실레는 별궁 주변을 둘러싼 약초를 둘러보았다.

미리 언질을 둔 덕에 디젤라는 그곳에 자리를 펴고 앉아있었다.

디젤라는 테이블 대신 커다란 돗자리를 펴고 바닥에 편히 앉아있었다.

세실레는 추운 날씨에도 반 팔 드레스를 입은 디젤라를 보며 웃었다.

“디젤라. 춥지 않니?”

“……누구야? 아, 언니구나.”

디젤라가 알이 두꺼운 안경을 한번 추어올렸다가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녀의 품엔 팔뚝 두께만 한 책이 안겨 있었다.

디젤라 곁에 앉은 유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디젤라와 마찬가지로 두툼한 책을 품에 안고 무언갈 쓱쓱 써 내려가다가, 들려오는 인기척에 시선을 들었다.

집중하느라 뾰족하게 튀어나온 입술이 세실레를 발견하자마자 불퉁해졌다.

볼살을 통통하게 부풀린 채로 나름의 항의를 하는 모양이었다.

세실레에겐 귀엽게만 보였지만.

그녀는 아이의 투정을 모른 체하며 자리에 앉았다.

“오랜만인 것 같네.”

안부 인사에 디젤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랜만이지. 언닌 맨날 침실에만 있었잖아.”

부부는 닮는다더니. 어째선지 말하는 것이 더욱 거침이 없어졌다.

세실레는 어색한 웃음만 흘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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