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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102화 (10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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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베우타는 말을 마구간으로 끌고 갔다.

그의 손엔 두 마리 분의 고삐가 들려 있었으나 정작 근육이 크고 매끄럽게 빠진 그의 흑마는 할 일 없이 나무에만 묶여 있었다.

반대로 늘씬하고 우아한 백마는 아르베우타의 손질을 받고 있었다.

제 주인이 다른 말을 챙기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흑마가 투레질했다.

새까만 눈동자 가득 불만이 득실거렸다.

하지만 지금은 그와 놀아줄 시간이 없었다.

세실레와 선약을 잡아 놓았으니까.

아르베우타는 백마의 등을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마치 말의 주인을 향한 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아르베우타가 백마의 등을 쓸어주며 고민에 잠겼다.

신력이 사라진 뒤로 그녀는 평범한 인간과 다를 바가 없어졌다.

연약한 피부엔 금세 상처가 났고 조금만 무리하면 근육통을 호소했다.

지난 일 년간 고생한 덕에 체력은 좋아졌다지만 그뿐이었다.

성장기 때 영양 부족으로 자란 몸이 일이 년 고생했다고 크게 변할 리 없었다.

‘축나면 축났지.’

영양을 보해도 모자란 데, 일 년이나 고생을 했으니 회복이 더뎠다.

세실레는 괜찮다지만, 아르베우타의 눈에는 그녀가 전보다 기력이 약해진 것이 빤히 보였다.

그래서 일부러 오는 내내 휴식을 취했지만, 세실레에겐 외부 활동마저 큰 무리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아르베우타는 혀를 차며, 두 마리의 말을 주마 기둥에 묶었다.

그런 다음 마지막으로 백마를 살폈다.

혹여 어디 다치거나 상처 입었다면, 세실레를 태워선 안 되니까.

백마는 두 사람이 귀환한 후에, 아르베우타가 직접 골라 들인 것이었다.

우아하고 윤기 있는 털이 불빛에 비쳐 반짝이며 빛났다.

은백색 털 위로 붉은빛을 고스란히 반사하는 모습이 세실레의 머리칼과 똑 닮았다.

아르베우타는 갈기부터 시작해 말발굽까지 손수 확인하다, 무심코 주먹을 쥐었다.

얼굴에 피어오른 웃음이 희열로 차 있었다.

‘믿기지 않는군.’

아르베우타는 이토록 평화로운 나날이 믿기지 않았다.

결코 이룰 수 없을 줄 알았던 것을 손아귀에 쥔 기분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두 번 다시 찾아오기 힘들 행운이었다.

그는 들뜬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곤 대기 중인 시종을 향해 말했다.

“잘 돌보도록 해.”

“네, 폐하.”

아르베우타는 시종을 스쳐 지나갔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는 고개를 들어 새하얀 황후궁을 바라보았다.

저곳에서 세실레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세실레는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문이 열리자 시녀들이 미리 덥혀 놓은 뜨거운 온수에서 자욱한 김이 피어올랐다.

숨 막힐 정도의 따스함에 긴장했던 근육이 금세 노곤해졌다.

세실레는 미끄러지지 않도록 깔아놓은 카펫 위로 발을 디뎠다.

주변으로 시중들러 온 시녀 둘이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지난번 세실레가 발을 헛디뎌 욕실에서 비틀거린 뒤로 볼 수 있는 진풍경이었다.

그 사건 후에 고급 카펫은 욕실의 깔개로 전락해 일회용으로 사용되었고 세실레는 욕탕에 몸을 담글 때까지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처럼 부축을 받게 되었다.

‘……낭비야.’

두어 번 말려 봤으나 소용없었다.

그녀의 안전을 부르짖는 무리가 눈을 부릅뜨고 달려들었으므로.

체념한 세실레의 입에서 가느다란 숨이 흘렀다.

그녀는 부축을 받으며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지상보다 아래로 패인 욕조의 끝엔 온수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물이 출렁거리며 몸을 감싸자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하……, 기분 좋다.”

감긴 눈꺼풀 위로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느슨하게 풀린 미소에 뒤늦게 들어온 도르데아가 거품을 잔뜩 낸 해면을 집어 들며 물었다.

“오늘 외출은 즐거우셨습니까?”

“응.”

“승마는 재밌으신가요?”

“응, 그리 멀리 가진 않았지만 말이야.”

덧붙인 말에 도르데아가 미미하게 웃었다.

세실레는 자타가 공인할 정도로 몸 쓰는 일엔 소질이 없었다.

승마도 마찬가지였다.

어린아이도 두 달이면 혼자 말 타고 걷는 수준은 터득하건만, 세실레는 두 달간 혼자 말을 타본 적이 없었다.

꼭 황제가 보조하는 중에야 승마를 시작할 수 있었다.

타고난 몸치에 지나친 과보호로 생긴 부작용이었다.

‘아무렴. 두 분이 좋으시다면 상관없지만.’

도르데아가 훈훈한 웃음을 머금었다.

도르데아는 세실레의 뭉친 어깨를 가볍게 안마한 후, 해면으로 몸을 닦았다.

거품 위로 꽃잎이 둥둥 떠올랐다.

며칠이고 향유에 두어 향을 배게 한 것이었다.

과하지 않고 향기로운 향이 욕실을 가득 메웠다.

세실레는 물씬 피어오르는 꽃향기를 한껏 들이켰다.

똑똑, 물 떨어지는 소리가 조용히 욕실을 울렸다.

고요한 가운데 도르데아가 세실레의 어깨를 안마하며 이는 잔물결 소리만 들렸다.

“기분 좋으시죠?”

그녀의 물음에 세실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르데아의 목욕 시중은 상상 이상으로 기분이 좋았으니까.

세실레는 도르데아의 손길에 이끌려 목을 완전히 젖히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촘촘히 박힌 모자이크 타일 위로 아롱아롱 물기가 맺혀 있었다.

조용하고 여유로운 공간, 이어지는 정적 속으로 가느다란 소음이 파고들었다.

“놔아-!”

바깥에서 이는 소란에 세실레가 느리게 입을 뗐다.

“……무슨 일이지?”

“제가 한 번 가보겠습니다.”

도르데아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녀가 채 문가에 다다르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그 앞엔 조카인 유델이 갈색 눈을 빛내며 서 있었다.

“……유델 님! 여긴 어떻게…….”

도르데아가 황급히 욕탕을 가렸다.

지키고 섰던 기사나 시녀들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유델을 어찌 다루면 좋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막 일곱 살 된 유델은 황궁에서 애매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때, 황제가 유델을 황위 계승자로 지정한 탓이었다.

유델은 적통 황자는 아니지만, 여전히 계승권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제국 유력자들의 후손이었다.

그러나 황제 부부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게 되면, 덧없이 밀려날 존재이기도 했다.

게다가 황제 부부는 애정이 깊고 젊었다.

언제고 후계가 태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거기에 더해, 유델은 특출나기까지 했다.

밀려날 황위 계승권자의 영특함은 제국 입장에선 독이었다.

유델은 디젤라를 닮아 성품에 거리낌이 없었고 머리는 쟈르스를 닮아 한없이 영특했다.

그 탓에 매번 오냐오냐하며 선물을 퍼붓던 이들이 사라지니, 자연스레 그 연유를 궁금해했다.

유델은 금방 이유를 알아냈다.

황제 부부 때문이었다.

이유를 안 뒤로, 유델은 아르베우타와 세실레를 은근히 미워하게 되었다.

마치 부모님의 자리를 차지한 무뢰배를 보는 듯한 눈치였다.

아무리 아니라고 타일러도, 일곱 살 난 아이의 귀에 제대로 들릴 리 없었다.

그 탓에 잠시 거리를 두게 한 걸, 유델이 멋대로 지정된 놀이터를 벗어나 세실레가 향한 곳으로 무작정 온 모양이었다.

기사들은 차마 황위 계승권자인 어린아이를 막을 수 없었고 유델도 마냥 어리석게 굴진 않았다.

제아무리 어린애라도 황후를 앞에 두고 망발을 하면, 저지당할 것이 빤했으니까.

하지만 그러한 사정을 모르는 세실레는 시녀들이 황급히 덮어준 긴 수건으로 몸을 여몄다.

유델을 발견한 세실레의 입에서 의문이 흘렀다.

“……유델?”

그러나 유델은 답하지 않았다.

막상 미워하던 존재를 앞에 두니 할 말이 사라진 모양이었다.

대신 그를 막아서려 시녀들이 달려들었다.

그제야 멍하니 세실레를 응시하던 유델이 제 손을 잡은 시녀의 팔을 뿌리치며 소리 질렀다.

“너 미워! 거긴 엄마 자리라고!”

디젤라가 한 때 황후궁을 빌려 쓴 것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세실레가 쫓겨냈다고 여겨 섭섭할 법도 하겠지.

세실레는 어린 유델을 달래려 했다.

하지만 세실레가 손 쓰기도 전에, 유델은 반대쪽으로 달려가 버렸다.

쿵쿵대며 걷는 품이, 자신이 몹시 화가 난 상태라는 것을 알리는 듯했다.

세실레는 유델을 바라보다 욕탕에서 몸을 일으켰다.

도르데아가 물어왔다.

“그만하시려고요?”

“응. 도르데아, 옷을 준비해줘.”

“네, 폐하.”

단단히 문을 닫게 한 도르데아는 세실레가 감기라도 들까 황급히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었다.

그러곤 가벼운 실내복을 입혀 주고서야 자리에서 물러났다.

치장하는 내내 뒤쪽을 노려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아무래도 유델의 침입을 막지 못한 아랫것들을 단단히 혼낼 심산인 듯 보였다.

세실레는 자리를 떠나기 전, 가볍게 첨언했다.

“적당히 해.”

“……명심하겠습니다.”

느리게 말하는 투를 보니, 영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훈육은 시녀장인 도르데아의 몫이었다.

세실레가 도르데아의 영역에 과하게 참견하는 것도 모양새가 별로였다.

세실레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어깨 위로 넘기며 읊조렸다.

유델의 일을 살필 겸, 디젤라를 만나고 올 생각이었다.

“나는 잠시 디젤라를 만나고 올게.”

도르데아가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와의 식사 약속은…….”

“아.”

세실레가 눈을 크게 떴다.

아르베우타와 점심 약속을 잡아 놓은 걸 깜빡하고 있었다.

덩달아 세실레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 그랬지.”

말을 더듬는 걸 보니, 낮에 남모를 약속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도르데아가 세실레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점심은 소화가 잘되는 음식으로 준비해둘까요?”

난데없는 배려에 세실레가 얼굴을 확 붉혔다.

“무, 무슨 말이야?”

“하지만 지난번에도…….”

“괜찮아!”

완강한 세실레를 향해 도르데아가 허리 굽혀 말했다.

“그러면 늘 드시던 것으로 준비하겠습니다.”

그제야 세실레가 안도의 숨을 흘렸다.

“……그래.”

세실레는 민망하다는 듯 서둘러 자리를 비웠다.

드물게 허둥대는 모습에 도르데아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두 분 참, 애정도 깊으시지.”

***

청량한 햇빛 아래로 부는 바람이 제법 쌀쌀했다.

태양이 높이 뜬 낮이라지만, 씻고 가만히 앉아있다간 감기에 들기 십상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황제 부부의 식사는 유리 온실 안에 준비되었다.

봄, 여름꽃이 사시사철 피어오르는 온실 안은 기분 좋은 향으로 가득했다.

그 사이로 향긋한 빵 냄새가 피어올랐다.

세실레는 보드라운 우유 빵을 뜯어내면서 내심 마음을 다잡았다.

‘저번처럼 분위기에 휩쓸리진 말아야지.’

식사를 마치고 디젤라를 만나 유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다.

그 외에도 해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명색이 황후이니 적어도 황궁의 안살림을 살뜰히 보살필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 나름 공부도 열심히 하며 지식을 쌓았건만 아르베우타는 그녀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같이 식사만 하면 분위기에 휩쓸려 곧장 침실 행이었으니까.

‘침대에 누워 시키기만 하라더니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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