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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덥지근한 여름의 더위가 물러가고 부슬부슬한 비가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아, 곧장 찬 바람이 몰려왔다.
제국의 가을은 몹시 짧았고 대신 겨울이 길었다.
두툼한 솜옷과 양털로 만든 장갑과 목도리를 걸친 사람이 거리에 하나둘 늘어갈 즈음, 황후궁의 시녀들은 놓치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난방이 부실하군요.”
“벽에서 한기가 스미네요.”
“어떻게 이제껏 몰랐을 수가 있죠?”
그들의 말마따나 황후궁 침실엔 이렇다 할 난방 시설이 없었다.
벽난로가 있기는 했지만, 형식적으로 만든 듯 너무 작고 구석에 있어 별 의미가 없었다.
그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다니.
뒤늦은 깨달음에 시녀들이 얼굴을 붉혔다.
그들의 부족함이 만천하에 공개된 기분이었다.
그간 시녀들은 세실레에게 매달렸다.
이제는 성녀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라며 외궁에 머무르려는 것을 어찌 다른 주인을 모시라 말하냐며 한사코 황후궁에 모셔왔다.
그리고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잘은 몰라도 그녀에게 진 빚이 몹시도 많은 느낌이 들었다.
그건 제국 전체가 마찬가지였다.
제국민 대다수는 황후를 잊었다.
그대로 영영 세실레란 존재를 잊을 뻔했다.
그들의 기억을 되살려 준 이는 디젤라였다.
“우리 언니가 황후였어요! 그간 성녀라고 떠받들며 황궁에 가두더니 왜 기억하지 못하는 거죠?”
디젤라의 외침에도 사람들은 그녀가 드디어 미쳤다고만 생각했다.
제국의 사람들이 알기로, 디젤라는 세렌디테 공작 가의 외동으로 자란 데다 황제의 소꿉친구인 비서관과 교제 중인 상태였다.
모두가 디젤라를 부러워했다.
그러나 디젤라는 젊은 커플을 향한 주위의 관심과 환호에도 콧방귀를 뀌었다.
“너희가 언제부터 날 신경 썼다고.”
라는 식의 거만한 태도로.
태도와 종종 하는 헛말로 제국에서 말이 많았으나 결국, 디젤라가 옳았다.
세실레가 돌아오며 그들의 기억 또한 다시 돌아온 것이다.
더불어 그들은 제국에서 세렌디 신의 흔적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신전도 신관도 사라졌다.
제국민들은 이를 황후 폐하께서 신과 무언가 거래를 한 것이라, 멋대로 판단했다.
덕분에 제국은 더는 신탁이나 악령에 얽매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덩달아 그들의 마음속에 황후를 향한 경외감이 피어올랐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세실레의 존재만으로도 그들은 새로운 세상을 맞이한 듯 희열과 이유 모를 고조를 느꼈다.
그건 황후궁의 시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황후 폐하를 모셨다.
그러나 채 치우지 못한 과거의 잔재가 이리도 떳떳이 남아 있었다.
부끄러운 흔적을 깨닫고 나니 낯이 뜨거워졌다.
도르데아는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자조적인 표정을 지었다.
“……이래놓고 황후궁의 시녀장이라 자부했다니.”
그녀의 머릿속에 과거의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올랐다.
믿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기억들이었다.
일곱 살의 어린아이를 데려와 교육을 핑계로 학대했다.
심지어 제국을 위해서라며 음식에 독을 탈 계획마저 세웠다.
수십 번 사죄해도 지울 수 없는 죄였다.
그건 다른 시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들 또한 손바닥 바꾸듯 태도를 달리했다.
당시엔 살기에 급급해서 그랬다지만, 과거 못된 일에 동참한 것엔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도 세실레는 별다른 책망 없이 그들을 받아주었다.
그녀의 호의에 기대어 모른 척, 그저 전보다 잘하자며 애써 과거의 잘못을 외면하고 살았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무심했던 과거가 드러날 때마다 죄책감이 그들을 잡아먹었다.
콕콕 양심 통이 느껴졌다.
민망하고 부끄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황망해진 이들이 입술만 달싹일 무렵, 세실레가 안으로 들어왔다.
도르데아는 곧장 몸가짐을 바로 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세실레는 별다른 눈치를 채지 못했다.
평소보다 기합이 든 모습에, ‘또 도르데아가 기합을 잡았나 보다.’며 넘길 뿐이었다.
세실레가 드레스룸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도르데아가 재빨리 따라갔다.
그러곤 괜찮다며 손을 내젓는 그녀를 두고 냉큼 물었다.
“폐하!”
“……왜?”
세실레는 시선을 돌려 도르데아를 쳐다보았다.
늙은 도르데아의 얼굴에 지긋한 주름이 잡혔다.
사글사글하게 맺힌 눈주름이며 입매가 웃고는 있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도르데아는 말 꺼내기를 망설이고 있었다.
세실레는 인내심 있게 기다려 주었다.
그러자 도르데아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게……저, 황후궁 보수 공사를 하심이 어떨까요?”
“보수 공사?”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세실레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덩달아 눈부신 은발이 어깨선을 타고 사르르 흩어졌다.
도르데아는 그럴 때마다 세실레를 넋을 잃곤 쳐다보고는 했다.
원래부터 어여쁘신 분이란 자각은 있었지만, 그녀가 돌아온 이후론 더했다.
이유 모를 감탄이 가슴 속에서부터 피어올랐다.
도르데아는 쉬이 칭찬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세실레의 앞에선 달라졌다.
도르데아는 세실레의 모든 것에 순수히 감탄하게 되었고 그만한 경외심이 피어올랐다.
덩달아 과거의 일이 떠올라 그녀를 괴롭혔다.
도르데아가 괴로운 듯 낯을 구겼다.
그녀가 침묵하자, 세실레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도르데아? 보수 공사라니, 어디가 허물어진 거야?”
“……아아.”
도르데아가 이야기를 채 끝맺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마치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안색이 좋지 않았다.
‘혹시 어딘가 큰 문제가 생긴 걸까.’
세실레가 괜찮냐며 묻기도 전에, 도르데아가 허리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세실레가 안색을 굳혔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이유가 궁금해진 세실레가 물으려는데, 도르데아의 입에서 구구절절 사죄의 말이 흘렀다.
“황후궁 침실에 있는 벽난로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더군요. 그걸 이제야 알다니, 황후궁의 시녀장으로서 오래간 폐하를 모신 시녀로서 자격 박탈입니다.”
“……벽난로?”
그런 게 있던가. 별달리 관심을 주지 않았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벽난로가 있긴 했다.
구석에 박혀 있어서 평소엔 눈치조차 채지 못하는 자그마한 것.
어릴 땐 화로를 곁에 두는 것이 낫겠다며 구시렁거리곤 했다.
그마저도 나중엔 체념해버렸지만.
‘그러고 보니 그랬지.’
한동안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선지 벽난로에 별다른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나 문제가 되나?
세실레의 입에서 솔직한 물음이 흘렀다.
“……보수 공사까지 할 정도인가?”
그러자 도르데아가 곧장 고개를 들었다.
하고 싶은 말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물론이지요. 곧 겨울이고 날이 추워질 겁니다. 감기에라도 드시면 어쩌십니까.”
그녀의 형형한 갈색 눈과 마주한 세실레는 못 말린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음대로 해.”
저토록 의욕을 보이는데 하지 말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며칠간 내내 따라붙어 보수 공사의 필요성에 대해 떠들어 댈 것이 분명하므로, 더더욱.
애당초 황후궁 살림은 도르데아에게 일임한 지 오래였다.
그녀가 야무지게 황후궁을 이끌어가는 걸 보고 있노라면, 괜히 방해해선 안 되겠단 생각이 들고는 했다.
세실레가 허하자 도르데아가 안도했다.
눈에 띄게 안색이 좋아진 도르데아가 서둘러 세실레에게 다가갔다.
제 일에 눈이 멀어, 외출했다 돌아온 황후의 시중을 들지 않고 있었다니.
도르데아가 조심스레 세실레의 허리끈을 풀며 물었다.
“또 풀물이 드셨군요.”
“응, 요즘 승마를 배우는 중인데…….”
“설마 넘어지셨나요?”
도르데아가 깜짝 놀라 물었다.
그녀의 호들갑에 세실레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놔둘 리가 없잖아.”
“하긴 그렇지요.”
아르베우타는 세실레가 말에 오르내릴 때마다 안아 옮겨주었다.
심지어 말 고삐를 쥘 때는 몇 번이고 확인하기까지 했다.
혹여 손에 힘이 빠져 낙마라도 하면 어쩌냐면서.
마치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를 다루는 듯한 반응이었다.
황제의 과보호를 잘 알고 있는 도르데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르데아가 납득할 정도의 사랑을 받는 중이었다.
그 사실이 못내 민망하면서도 껄끄러웠다.
‘물론, 나쁘진 않지만.’
처음엔 그마저도 색달랐다.
그만큼 사랑받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 일이었다.
그녀는 지나친 보호에 슬슬 지쳐 갔다.
치맛자락이라도 물가에 닿으면, 괜찮으냐 걱정하는 사람들로 사방이 북적였다.
조금만 다쳐도 난리가 나니, 어쩔 수 없이 몸을 사리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행동이 조심스러워졌다.
자연스레 궁이 갑갑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다.
‘챙겨주는 건 고맙지만…….’
정도가 과해도 너무 과했다.
황궁으로 오기 전, 자유를 맘껏 누린 탓에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사막에서 황궁으로 오는 길은 이렇지 않았다.
드레스는커녕 매번 몸에 흉이 지기 일쑤였지만, 자유로웠다.
머무를 숙소가 없으면 야영을 했고 먹을 것이 없으면 사냥을 했다.
세실레는 아르베우타가 잡아 올 사냥감을 기다리며 모닥불을 지폈다.
바닥은 딱딱하고 바람은 찼다.
불은 꺼지지 않게 수시로 들여다봐야만 했다.
하지만 괴롭지도 번거롭지도 않았다.
도리어 즐거움으로 가득했던 시간이었다.
그래선지, 세실레는 황궁이 가까워질 때마다 갑갑하다고 느꼈다.
내심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아르베우타는 세실레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일정을 서두르지 않았다.
유명한 관광지가 있으면 들렸고 맛집이 있으면 그 마을에서 며칠이고 머물기도 했다.
간조 때마다 모습을 드러내는 섬을 구경하기도 했고 꽃밭에 누워 느긋하게 낮잠을 자기도 했다.
일부러 도착을 늦추는 것처럼, 여유로운 행보엔 이유가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황궁에 돌아가면 한동안 이러한 여유는 부리지 못할 거란 걸.
‘그땐 좋았지.’
상념을 마친 세실레가 느리게 눈을 감아 내렸다.
‘나는 그때가 그리운 건가.’
제 마음을 잘 알 수 없었다.
세실레는 소매에 묻은 풀물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곧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녀를 좋아해 주는 이들의 곁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게다가 세실레는 디젤라와 약속했다.
적어도 유델이 자랄 때까지는 함께 살겠다고.
잠시 떠나고픈 마음이 들었으나 일시적이었다.
세실레는 상념을 접곤 피식 웃었다.
말을 타지 못하면 바깥에서 움직이기 불편했다.
그래서 황궁으로 돌아와 처음으로 승마를 배웠다.
다음번에 여행을 가면 꼭 말을 타면서 이동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승마 실력은 여전히 꽝이었다.
신력을 잃은 몸은 금방 통증을 느끼게 되었고 세실레는 근육이 잘 붙는 편이 아니었다.
여린 몸을 단련시키는 데엔 제법 오랜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아직 먼 이야기네.’
생각을 마친 세실레는 가운을 걸치고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뜨거운 물에 몸을 좀 풀어야겠어.’
그러고 나선 아르베우타와 함께 점심을 먹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