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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회의 기쁨은 잠깐이었다.
사막의 밤은 추웠고 쉴 새 없이 모래바람이 일었다.
두 사람은 겨우 찾아낸 사막 동굴에 몸을 숨겼다.
누울 자리를 마련하고 마른 회전초를 가져다 불을 붙였다.
자리가 마련되자마자 아르베우타는 죽은 듯 잠들었다.
그간 버틴 것이 용하다는 듯이.
그는 한참의 회복 기간이 필요해 보였다.
세실레는 잠든 아르베우타를 앞에 두고 손을 쥐었다 폈다.
신력을 느껴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몸 안 가득 느껴지던 힘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세실레의 입에서 가느다란 숨이 흘렀다.
‘힘이 돌아오지 않네.’
지녔던 힘이 사라지니 답답했다.
신력이 있으면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걸 알기에 더더욱.
세실레는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신력이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전처럼 어찌할 수 없는 일에 매달리고 싶진 않았다.
‘돌아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는 대로 사는 수밖에.’
그녀는 그렇게 결심했다.
그러곤 다시 아르베우타가 눈을 뜰 때까지 정성껏 간호했다.
평온한 나날은 아니었다.
밤마다 악몽에 잠을 설쳤고 자주 불안이 치달았다.
과거와 같은 역경을 다시 겪을 거란 생각이 그녀를 괴롭혔다.
기억에 얽매일 때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세실레는 자신을 다독였다.
‘다 어머니의 수작이야.’
과거에도 그랬다.
세렌디는 지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그녀를 통해서 지상을 조종하려 했다.
그렇다면야 어머니의 세력에서 벗어날 방법은 간단했다.
‘나만 흔들리지 않으면 돼.’
세실레는 이를 악물며 버텼다.
귓가로 들려오는 유혹과 불안을 외면했다.
인고의 시간을 보낼수록, 세실레는 점점 차분해졌다.
신력에 의지하던 버릇을 버리고 습관처럼 밤마다 달을 보는 일을 그만두었다.
스스로 인간처럼 살겠노라 되뇌었다.
그러자 밤마다 꾸던 악몽이 점차 사라졌다.
어머니가 무어라 말을 하는 것 같은데도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면서 점차 인연의 실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녀가 바라던 대로 평범한 인간이 되어가는 중일지도 몰랐다.
그건 마냥 좋은 일은 아니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세실레는 처음으로 생존의 위협을 느꼈다.
태양은 뜨거웠고 오아시스와 동굴과의 거리는 멀었다.
매일같이 바뀌는 지형은 방향을 잃고 떠돌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심어주었고 선인장과 알로에로 버티는 나날은 굶어 죽는 것에 대한 공포를 일깨웠다.
살이 까지고 옷이 해졌다.
손톱이 닳고 벌레가 안식처를 위협했다.
긴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위협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무슨 짓을 해도 눈을 뜨지 않는 아르베우타였다.
그럴 때마다 세실레는 불빛에 어른대는 그의 얼굴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아직 숨을 쉬고 있어.”
그는 살아있었다.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두렵지 않았다.
포기할 생각도 없었다.
버티고 버틸 생각이었다.
그러다 언젠가 그가 기운을 되찾고 눈을 뜨면, 원래 그가 이루었어야 할 운명을 손에 쥐여주리라.
그날까지 멀지 않았다.
세실레는 그때를 기다리며 버텼다.
그렇게 한 달 남짓 지났을 무렵, 루베르가 세실레를 찾아왔다.
세실레의 귀환과 동시에 장성한 루베르는 수려한 외모를 지녔다.
눈썹과 입매, 턱선이 조금 더 두드러진 것을 제외하면 세실레와 꼭 닮은 모습이었다.
세렌디가 세실레를 탄생시키며 그 또한 함께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루베르는 세실레의 오른팔이 될 운명이었고 세실레의 결심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이이기도 했다.
셀 수 없이 많은 희생과 환생을 거쳐 거머쥔 자리였다.
어지간한 역경이 아니고선 오를 수 없는 자리가 한낱 인간으로 인해 엉망이 되었다.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루베르가 굵은 눈썹을 일그러뜨린 채로 세실레의 앞에 와서 섰다.
그가 질책하듯 세실레를 불렀다.
“세실레 님.”
세실레는 아르베우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자그맣게 읊조렸다.
“쉿, 조용히 해.”
루베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푸르른 청안이 모닥불에 반사되어 붉게 빛났다.
루베르는 한참이고 침묵하다, 저를 향해선 고개조차 돌리지 않는 세실레를 보며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자를 죽이면 됩니까.”
“…….”
“그를 죽이면 돌아오실 텝니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단칼로 베어버리면…….”
“나도 죽어.”
세실레가 희미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 세상에서 사라질 때까지 죽을 거야. 먼지가 되어 조각조차 남지 않게. 내 영혼을 찢을 거야.”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루베르가 눈을 홉 떴다.
배신감인지 절망인지 혹은 분노를 참아 누르는 것인지.
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세실레는 동요하지 않았다.
지난 나날은 그녀를 더욱 강인하게 만들었다.
세실레는 고개를 돌려, 루베르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한 자 한 자 똑똑히 읊조렸다.
“그러니 가서 전해. 강제로 데려가 봤자 남는 건 없을 거라고.”
“……세렌디 님의 숨이 경각에 달했습니다. 달이 사라지길 바라시는 겁니까.”
“내 힘을 앗아간 건 어머니야. 할 말이 있다면 그분께 해. 난 아무런 힘도 없으니.”
“…….”
세실레가 루베르를 보며 웃었다.
“그동안 고마웠어. 내 신력을 가져다 새로운 후계를 탄생시키든 명을 이어가시든. 앞으로 내가 너희를 볼 일은 없겠지.”
세실레는 고개를 돌렸다.
타오르는 모닥불을 응시하는 눈동자는 차분했다.
꼿꼿이 선 등에선 감정의 동요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결심을 굳힌 지 오래였다.
초연한 자태에 루베르는 더 이을 말이 없었다.
그저 어금니를 짓씹어 물었다.
죽일 듯한 시선이 아르베우타를 향했다.
그를 죽이고 싶었다.
그만 아니었다면 그들의 신이 어둡고 더러운 지상을 헤맬 이유가 무엇인가.
선뜩한 시선이 그를 향했다.
하지만 그를 죽이면 세실레 또한 죽으려 들 것이다.
그래서야 얻는 게 없었다.
차라리 시간에 기대어 세실레가 마음을 달리 먹기를 바라는 것이 나았다.
‘인간의 마음은 쉬이 변한다.’
변절하거나 혹은 죽거나.
그때를 기다리며 인내하는 수밖에.
루베르가 상념을 마치곤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대로 그는 걸음을 돌렸다.
어둠 속으로 파묻히는 인영을 바라보며 세실레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고마워.”
이대로 발을 돌려 떠나주는 것만 고마운 건 아니었다.
루베르의 존재는 그녀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자신과 닮은 아이를 곁에 두고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삶의 의미를 얻을 수 있었으니까.
즐거웠다.
웃을 수 있었다.
그건 분명 고마운 일이었다.
그러니 이기적일지라도 그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 말에 루베르가 떼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돌아올 겁니다. 조금이라도 세실레 님의 마음이 약해지는 순간, 언제든.”
세실레는 스스로 달에서의 삶을 포기했다.
달에서 누릴 모든 특권과 능력을 놓아버린 것이다.
단단한 결심으로 운명을 비틀었다.
하지만 과연 그리해서 얻은 것에 언제까지 만족할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자란다.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평범한 삶이 별것 없다는 깨달을 때, 루베르는 다시 세실레를 찾아올 생각이었다.
루베르는 동굴을 빠져나가 하늘 위를 올려다보았다.
맑은 하늘 위로 떠오른 달이 그의 머리 위에 훤했다.
마치 어찌 되었냐 묻는 듯했다.
달의 물음에 루베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 대답하기엔 너무 일렀으므로.
***
세실레는 루베르에게서 시선을 떼고 아르베우타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언제쯤 깨어나려나.’
돌연 불안과 초조가 치달았으나 이내 다시 정신을 붙잡았다.
세실레는 고민하는 대신 그의 옆에 팔을 괴고 누웠다.
딱딱한 바닥, 등을 타고 올라오는 습기, 입구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까지.
어느덧 그 모든 것이 너무나도 익숙해졌다.
그녀는 손을 뻗어 아르베우타의 볼을 꾹 누르며 속삭였다.
“내가 이 고생을 하게 만들다니.”
“…….”
“단단히 각오하는 편이 좋을 거예요.”
어서 그가 깨어나 대답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세실레는 잠이 들었다.
***
아르베우타가 깨어나, 두 사람이 황도에 다다른 것은 근 일 년이 지난 후였다.
우여곡절 끝에 사막을 건너 돌아온 두 사람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으나 맞잡은 손만은 여전했다.
그 시간 동안 오키드리아 대륙은 멀쩡했다.
악령이 날뛰지도 대륙이 분열되지도 않았다.
그것으로 세실레는 확신했다.
땅의 주도권은 분명히 인간들에게 넘어왔다.
‘어머니는 더 이상 오키드리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어.’
이 땅은 이제 바로잡아질 터였다.
아르베우타와 그녀의 여동생에 의해서.
거기 어디에도 세실레의 역할은 없었다.
그녀는 그것이 퍽 홀가분하게 느껴졌다.
황도의 땅을 밟은 날, 그녀는 모두의 축하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도르데아와 황후궁의 시녀들이 눈물을 흘리며 세실레를 반겼다.
쟈르스와 두 사람의 아이인 유델도 그 자리에 있었다.
세실레가 유델을 보곤 함박웃음을 짓기도 전에, 디젤라가 세실레를 와락 껴안았다.
“보고 싶었어, 언니.”
“……나도.”
그녀의 주위로 공작 부부가 와서 섰다.
기억을 되찾은 공작 부부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어딜 갔다가 이제 오니. 걱정했단다.”
도르데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간 고초가 많았는지 눈가에 주름이 가득 잡힌 도르데아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기다렸습니다.”
세실레는 그들을 모두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다들 보고 싶었어요.”
세실레의 입가로 웃음이 번졌다.
그토록 감옥 같던 황궁이 이토록 안온하게 느껴질 줄이야.
마치 고향 집에 돌아온 듯한 친근함이었다.
그녀는 이 감격을 나누고 싶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아르베우타는 내내 쟈르스에게 시달린 비서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들은 새빨개진 눈자위를 번뜩이며 아르베우타에게 호소했다.
“저희는 쟈르스 님 밑에선 일할 수 없습니다.”
“폐하, 저희를 버리지 마십시오.”
“저 악독한 쟈르스, 아니, 제겐 폐하뿐입니다. 폐하 밑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간절한 외침을 바라보던 쟈르스가 아르베우타에게 다가서며 속삭였다.
“선황제는 무슨 선황제. 농땡이 피울 생각 마시고 어서 돌아오십시오.”
그의 말에 곳곳에서 웃음이 터졌다.
이미 아르베우타와 세실레의 복귀는 기정사실인 듯 보이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아르베우타는 무어라 말하지 않고 인파를 헤쳐 걸어가 세실레를 안아 들었다.
갑작스러운 광경에 사방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민망한 상황에 세실레가 고개를 들어 항의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그녀의 항의에 아르베우타가 세실레와 이마를 맞대며 중얼거렸다.
“고생시킨 각오를 하라지 않으셨습니까.”
“누가 이런 식으로…….”
아르베우타는 항의하려 우물대는 입술을 품에 묻었다.
그러곤 황궁 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속삭였다.
“단단히 각오했습니다. 앞으로 걷는 것, 입는 것, 말하는 것, 하나하나 제가 거들 테니 당신께선 침대에 누워 시키시기만 하면 됩니다.”
묘한 말에 세실레가 얼굴을 붉혔다.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데 너무나도 가슴이 설렜다.
마치 둘의 행복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듯이.
어쩐지 그간 참았던 눈물이 터지려 해, 세실레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기대할게요.”
제 몸을 안아 드는 그가, 주변에 울려 퍼지는 환호성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그걸 깨닫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세실레는 손을 뻗어 그를 끌어안았다.
마주한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처럼.
完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