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이대로 그가 사라져도 괜찮은가.’
무심코 떠오른 생각에 세실레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지 않았다.
그녀가 떨리는 입술로 기어코 외면했던 진심을 뱉어냈다.
“……미련이 남았나.”
사라져 흩어진다.
완전히 조각난 영혼은 다시 볼 수 없다.
죽는 것과는 그 무게부터 달랐다.
그제야 깨달은 선뜩함에 세실레의 입에서 물음이 흘렀다.
“……사라져?”
절대로 다시는 만날 수 없다.
어떤 식으로든, 어떤 방법으로든.
“사라지면.”
나는 살 수 없어.
그제야 꾹 눌러두었던 슬픔이 흘렀다.
그것을 시작으로 내내 보고 무심히 넘겼던 감정이 터져 흘렀다.
슬프고 외롭고 아프고 기쁘고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
그 모든 것들이 당장 경험한 듯 생생했다.
정신을 놓을 정도의 전율 속에서 세실레는 가느다란 실을 힘주어 잡았다.
손끝이 떨렸다.
이 인연을 잇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만 같았다.
“안 돼.”
초조함이 몸을 휘감았다.
더 시간을 지체했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세실레는 지금이 낮이란 사실도 잊고 지상으로 뛰어내렸다.
“……아르베우타!”
찢어질 듯한 외침이 허공을 울렸다.
달이 뜨지 않은 낮.
구름 한 점 없는 한여름의 사막으로 뛰어내린 그녀의 머리칼 반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몸을 감싸고 흐르던 강한 신력이 타올라 잿더미가 되어 모래에 섞였다.
칼에 찔려도 아프지 않던 신체가 맨발로 달구어진 모래를 밟곤 뜨거움을 호소했다.
순식간에 목이 메고 숨이 찼다.
발이 빠지는 모래 언덕은 쉬이 접근을 허하지 않았다.
모래바람이 일어 시야를 가렸다.
세실레는 아르베우타가 있던 오아시스가 어디 있는지 조금도 알 수 없었다.
“……어디 있어?”
그는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이렇게 헤매는 사이에 죽어버릴지도 몰랐다.
세실레는 나풀대는 붉은 실을 힘주어 쥐었다.
잠시만 한 눈을 팔아도 실이 끊어져 버릴 것 같았다.
그래선 안 됐다.
그가 자신을 떠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을 너무나도 늦게 알아차렸다.
“……아르, 베우타.”
그러나 사막 어디에도 그의 자취는 보이지 않았다.
그사이 바람이 지형을 바꾸어 하늘에서 보던 것과는 또 모양이 달라졌다.
세실레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를 보고 싶었다.
품에 안고 어루만지며 왜 이리 미련하게 굴었느냐 묻고 싶었다.
그를 찾기만 하면, 어떻게든 영혼을 이어붙일 생각이었다.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달도, 어머니도. 그 결정을 내리기까지 이렇게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세실레는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
“……어디 있어.”
찾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신력은 모조리 타버려 바닥에 가라앉았고 세실레는 평범한 인간이 된 듯한 무력함을 느꼈다.
어머니가 벌인 일이 분명했다.
금기를 어겼다곤 하지만 이렇듯 갑자기 힘이 사라질 리 없었다.
세실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시릴 정도의 햇빛이었다.
푸른 하늘 어디에도 달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세실레는 힘주어 하늘을 보고 외쳤다.
인연을 붙잡은 손이 희게 질려 있었다.
“날 놔줘요! 이제 내 마음대로 살게 내버려 둬!”
그녀는 발악하듯 외쳤다.
단 한 번도 이토록 모든 걸 내려놓고 외친 적이 없었다.
“이만큼 했으면 됐잖아!”
“어차피 내가 다 짊어질 일이라 했잖아요. 제가……다 알아서…….”
무어라 말을 하던 세실레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언제까지고 책임을 돌리며 살 순 없었다.
이번 일은 그녀의 의지로 벌인 일이었다. 그러니 매듭도 그녀가 지을 생각이었다.
세실레는 하늘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대신 이를 악물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바람이 몰아치고 눈과 입으로 모래가 차올라도 꿋꿋이 걸었다.
의지할 것은 오직 하나. 그녀의 손에 들린 인연의 실이었다.
기어코 끊어내던 인연을 이번엔 그녀의 손으로 이을 생각이었다.
“……내가 찾을 거야.”
찾아서 이을 것이다.
신력 따위 없어도 괜찮았다.
세실레는 힘주어 걸음을 옮겼다.
한 발짝, 한 발짝.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몸에 힘이 빠졌다.
숨이 막히고 목이 탔다.
이마로 땀이 흐르고 시야가 어지러졌다.
사막의 작열하는 태양은 수십 번의 환생 동안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더위를 선사했다.
그러나 아무리 헤매 봐도 아르베우타는커녕 그가 있던 오아시스조차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 있어.”
그가 보고 싶었다.
더위에 숨이 막히면서도 오직 드는 생각은 그것뿐이었다.
세실레는 힘주어 걸음을 옮겼다.
거친 모래 폭풍이 일어도, 뜨거운 햇살에 피부가 까져도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그러다 마침내 시야에 환영처럼 녹음이 일렁였을 때, 그리고 그곳과 붉은 인연이 맞닿은 것이 보였을 때.
세실레는 정신을 잃곤 앞으로 달렸다.
깊은 모래에 발이 푹푹 빠졌다.
중심을 잡지 못하는 몸이 수어 번 휘청였다.
하지만 그녀는 걷고 또 걸었다.
코앞에 보이던 오아시스는 닿을 듯 닿지 않았다.
어쩌면 환영일지도 몰랐다.
만약 환영이라면, 더 찾아 헤맬 자신이 없었다.
세실레는 무심코 치닫는 불안을 모른 체하며 계속해서 걸음을 뗐다.
그리고 마침내 바람을 막아주는 듬성듬성한 야자수와 청량한 물소리를 들었을 즈음, 그리고 그것이 환영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을 때.
세실레는 숨을 멎었다.
“……아르베우타.”
그가 그곳에 있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정도로 그는 숨소리조차 희미했다.
하지만 아직 인연이 끊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아직 살아있다는 뜻이었다.
얼굴에 땀이 말라 점점이 흰 꽃이 피었다.
흐리게 내뱉는 숨은 당장 끊어질 듯 위태로웠다.
세실레는 다급히 그의 앞으로 가 앉았다.
그러곤 열 오른 얼굴에 손을 대곤 급히 물가로 갔다.
치마를 찢어 물에 적셨다.
메마른 얼굴을 닦아내자 그가 얼굴 근육을 움찔거렸다.
살았다. 그는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
“……다행, 정말 다행이야.”
세실레는 안도하며 그의 몸을 계속해서 닦았다.
열을 식히고 입술에 물을 머금어 주었다.
그와 연결된 인연을 잡고 또 잡았다.
그러자 그의 가슴팍이 크게 움직였다.
들뜨고 가냘픈 숨에 세실레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세실레는 손을 뻗어 아르베우타의 뺨을 쓸어내렸다.
손끝에 닿는 피부가 거칠었다.
죽음을 앞에 둔 자의 안색이 그리 좋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세실레는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입에서 나지막한 숨이 흘렀다.
“나 여기에 있어요.”
“…….”
“매일 같이 보고 싶다고 했잖아. 이제 왔는데…….”
“…….”
“너무 늦었나? 내가 너무…….”
세실레는 이를 악물고 울음을 삼켰다.
바보처럼 울고 싶진 않았다.
슬픔에 잠겨 시간을 보내기엔 찰나에 끊길 목숨이 위태로웠다.
그녀는 두 팔을 활짝 펴서 그를 끌어안았다.
맞닿은 가슴으로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려왔다.
느린 움직임이 무서웠다.
항상 그녀와 맞닿을 때마다 빨라지곤 했던 심장은 이대로 멎어버릴 듯 가냘팠다.
어쩌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을 살릴 수 있을까.
세실레는 초조해져 입술을 물었다.
끌어안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를 살리기 위해 그녀는 무엇이든 해야 했다.
고민하는 사이, 느리게 아르베우타의 입술이 움직였다.
더듬대는 입술이 무언갈 말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메마른 목구멍은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물!’
세실레는 급히 호숫가로 다가가 두 손 가득 물을 담아 그의 입가로 가져갔다.
그러나 그는 물을 제대로 삼키지 못했다.
두 손 사이로 퍼온 물이 맥없이 흘렀다.
그래서 이번엔 그녀의 입안에 물을 머금었다.
그러곤 곧장 그와 입을 맞췄다.
맞닿은 입술은 거칠었고 또한 힘이 없었다.
언제고 먼저 그녀를 잡아먹을 듯 삼키던 그는 끈 떨어진 인형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대신 세실레가 그를 파고들었다.
혹여나 잘못 삼키지 않도록 조심하며 그에게로 물을 흘려보내 주었다.
아주 조금씩. 한 모금 한 모금 그가 물을 삼킬 때마다 세실레의 입에서도 안도의 숨이 흘렀다.
마침내 그녀가 머금은 물을 다 넘겨주었을 즈음에야 아르베우타의 눈꺼풀이 여리게 떨렸다.
막 태어난 아기 새가 젖은 털을 털고 날개를 펴듯이.
그렇게 아주 천천히.
그가 눈을 떴다.
막 깨어난 이의 것이라곤 믿기 힘들 정도로 명료한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오셨습니까.”
희미한 물음에 세실레는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이 벅차올라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응, 왔어요.”
“기다렸습니다.”
묵묵한 소리에 어째선지 웃음이 흘렀다.
울음도 덩달아 터졌다.
안도와 슬픔이 동시에 몰려왔다.
아르베우타는 손을 뻗어 세실레의 눈물로 젖어 든 뺨을 쓸었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맺혔다.
“울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왜. 왜 그런 미련한 짓을 해요?”
아르베우타가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믿기 힘들 정도로 강한 힘이 그녀를 옭아매었다.
세실레는 그의 붉은 눈동자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나른하게 내리깐 눈매로 그의 홍채가 형형하게 빛났다.
“이젠 절대로 놓아줄 생각 없으니까.”
“…….”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또 떠나시려거든 저를 죽이십시오. 어설프게 기억을 지우는 것 따위로는 당신을 잊을 수 없으니까.”
그의 말에 세실레는 웃었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어설프게 모른 척 해봐야 잊을 수 없었다.
기어코 이렇게 되어버렸다.
다음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연이 이리도 짙게 연결되어 버렸으니까.
세실레는 그와 연결된 인연을 잡았다.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굵은 실이 선명하게 빛났다.
이젠 그를 놓을 수 없었다.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세실레가 아르베우타를 쳐다보며 물었다.
“이제 내겐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도 제 곁에 있어 줄 건가요?”
신력이 사라진 그녀는 지금 평범한 인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세실레가 자신 없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아르베우타가 웃으며 그녀를 마주 안았다.
목덜미로 언뜻 뜨거운 숨이 닿았다.
“물론입니다. 지긋지긋하단 생각이 드실 때까지 옆에서 떨어지지 않을 겁니다.”
고백이라기엔 참으로 우스운 말이었다.
하지만 그라면 정말로 그럴 것 같았다.
세실레는 그와 이마를 맞대고 웃었다.
맞잡은 손은 여전히 놓지 않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