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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98화 (98/110)

98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어찌 황후를 들이지 않고 후계를 정한단 말입니까.”

세렌디테 가문의 아이, 난데없는 후계.

황실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선택에 귀족들의 반발이 거셌다.

하지만 소란은 금방 종식되었다.

세실레가 사라진 후 사람들에게 세렌디테는 공적이 높은 고위 귀족 가문으로 인식되었다.

이름뿐인 가문이 나라를 세우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가문이자 황제 또한 감히 침범할 수 없는 불가침 영역으로 뒤바뀐 것이다.

거기에 디젤라는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덕분에 디젤라의 신비한 능력은 꽃을 피웠다.

메마른 황무지를 비옥하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희귀한 약초도 원하는 어디서든 피워낼 수 있었다.

제국을 침범하는 야만족의 땅을 뒤집어 놓기도, 사람의 손으로 몇 년을 쌓아 올려야 할 성벽을 하루 만에 만들어 놓기도 했다.

강하고 실용적인 힘.

더욱 부강해질 제국을 생각한 귀족들은 황제의 선택이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그렇게 디젤라와 그녀의 후계를 향한 여론이 좋아지자 아르베우타는 천천히 양위를 준비했다.

그는 천천히 자신의 존재감을 지웠다.

그가 없어도 되게끔 쟈르스와 디젤라에게 인수인계를 하고 비서관들을 교육했다.

그가 곧 황궁을 떠날 것임을 알아차린 디젤라가 그를 붙들었다.

“……어디로 가려고요.”

하지만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언니가 떠난 후 죽어버린 눈동자는 더욱 생기를 잃었다.

쟈르스의 만류에도 마찬가지였다.

“폐하, 이대로 계십시오. 황후를 들이지 않으셔도 좋으니 그저 계시기만 하십시오.”

쟈르스는 사라진 황후를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디젤라로부터 들어, 황제에게 오래된 연인이 있다는 정도는 인식했다.

언제 황제가 그런 인연을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그가 기억하는 모습과 지금의 황제는 어딘가 달랐다.

그러나 아르베우타는 그저 답지 않은 농담을 던질 뿐이었다.

“이제 돈 걱정할 필요 없으니 좋겠군.”

“……그걸 말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쟈르스는 어릴 적부터 그를 모셨다.

어린 시절부터 각인된 신분 차이 때문인지, 쟈르스는 황제가 아닌 아르베우타를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아르베우타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는 떠날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아르베우타가 단조로운 목소리로 명했다.

“너희의 아이가 일곱 살이 되는 해에 떠날 것이다. 그러니 만반의 준비를 하도록 해.”

둘의 아이가 일곱이 되는 해는 정확히 세실레가 떠난 지 십 년이 되는 때였다.

그리고 아르베우타의 수명이 한계에 다다르는 때였다.

그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는 곧 죽을 것이다. 그리고 세실레를 잊고 다시 태어나겠지.

그러기는 싫었다.

미련한 고집에 불과하다 해도, 그는 이 질긴 인연을 다시 한번 이을 생각이었다.

‘절대 널 잊지 않을 거야, 세실레.’

그녀를 잊고 마음 편히 사는 것은 그가 정한 선택지에 없었다.

아르베우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기억할 생각이었다.

그 대가로 완전히 소멸해 사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

세실레는 달에 금방 적응했다.

당장 달을 떠난 일이 어제 일인 양 생생했다.

반복되는 일과와 수련이 다시 시작되었으나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죽을 듯이 슬프지도 어머니가 원망스럽지도 않았다.

지나치게 초연해진 기분에 도리어 머쓱해질 정도라, 어머니 말대로 한 번쯤 겪었어야 할 성장통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이렇게 무덤덤해도 되는 걸까.’

이러한 생각을 들 때마다 주변에선 그녀를 칭찬했다.

“정말 잘하고 계십니다.”

별달리 반박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들의 말대로 세실레는 잘하고 있었다.

지상에서처럼 감정에 흔들리지 않았고 아무런 호기심도 일지 않았다.

그간 다양한 경험을 질릴만큼 한 덕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럴 겨를이 없었다.

“난 곧 안식하러 갈 생각이다.”

세렌디가 승계를 명했다.

그녀는 오키드리아를 차지 못한 세실레를 질책하지 않았다.

대신, 고저 없는 표정으로 읊조릴 뿐이었다.

“내가 왜 그 땅을 차지하려 했는지 네가 이 자리에 올라서면 깨닫겠지. 이제 내 할 일은 다 했구나.”

“……그런가요.”

후회도 아쉬움도 남지 않았다.

세실레는 알겠노라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감정의 동요는 없었으나 세실레는 가끔 지상을 내려다보고는 했다.

지상의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그 사이 도르데아는 은퇴하여 고향으로 돌아갔고 디젤라는 쟈르스와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아르베우타는 그들의 아이에게 황위를 약속하곤 자리에서 물러났다.

빠른 선위였으나 철저히 준비해둔 덕에 큰 소란은 일지 않았다.

세실레는 그 모든 과정을 조용히 지켜만 보았다.

황위에서 물러난 아르베우타는 여행을 떠났다.

‘뭘 하려는 거지.’

종종 그를 볼 때면, 인상이 찌푸려지곤 했다.

그가 바라던 대로 아주 조금의 미련이 남았는지 그가 하는 행동이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아르베우타는 유독 신경 쓰이는 존재였다.

그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초연했던 가슴이 자꾸만 따끔거렸다.

어째서 황위에서 내려와 저 고생을 하는지.

무엇을 위해 저러는 건지.

기어코 기억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그의 영혼에 얼마나 치명적인지.

“……미련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세실레는 인연을 거두며 그의 기억도 함께 가져갔다.

그러니 아르베우타는 그녀를 기억하지 못해야 옳았다.

기억을 기어코 붙들고 있는 것은 그의 의지였다.

‘각성자란 말이지.’

특별한 영혼, 대륙의 운명을 바꾸었을 영혼.

그러한 영혼이 기억 따위에 얽매여 소멸하기엔 너무나도 아까웠다.

그래서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저 영혼의 소멸로 일어날 일들이 신경 쓰이는 것이다.

세실레는 그리 생각하며 그에게서 관심을 거두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보면 볼수록 의아했다.

그는 아무도 발 디디지 않는 오지를 여행하거나 설원을 탐색했다.

죽을 위기를 겪으면서도 설산 꼭대기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다 우연찮게 폐신전을 찾으면 꼭 제단에 꽃을 바쳤다.

마치 그녀가 그를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안다는 듯이.

“또 저러네.”

세실레는 일과를 마치고 돌아와 그를 지켜보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구름 기둥에 기대어 있으면 꽃향기가 느껴지곤 했다.

계절이 바뀌고 그가 향하는 곳이 달라질 때마다 꽃의 종류도 달라졌다.

강렬한 빛을 띠는 장미였다가 이름 모를 들풀이 되기도 했다.

그가 폐신전에 머무는 날이면 아침저녁으로 제단에 꽃이 올라오기도 했다.

그럴수록 그의 기억 또한 선명해졌다.

끊어진 인연의 실도 흐릿하게나마 보이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세실레는 곧장 인연을 끊어버렸다.

그 대가로 아르베우타의 영혼은 서서히 균열 되었다.

이제 그는 죽을 것이다.

세실레는 작열하는 태양 아래, 사막을 횡단하는 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기억하지 마.”

하지만 그는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그러면 그녀가 그를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듯이.

하지만 세실레는 이미 아르베우타를 향한 모든 감정마저 사라진 뒤였다.

게다가 곧 승계였다.

신이 되면 이 미련마저 완전히 사라질 터였다.

허공에 매달리는 그의 행동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러니 이제 제발 잊어주기를.

세실레는 바라고 바랐다.

하지만 그는 여전했다.

그녀를 미워하지도 원망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의 기억을 되살리고 되살리면서 쉼 없이 오키드리아를 떠돌아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아마도 마지막일 인연이 또다시 이어졌다.

흐릿한 실을 손에 걸친 그녀의 손끝이 아주 조금 떨렸다.

“왜 이러는 거지?”

이건 그와 그녀,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세실레가 그에게 남겨두려 한 것은 원망, 그것 하나뿐이었다.

영혼에 원한을 각인하고 환생하여 오키드리아를 유일한 인간들의 대륙으로 만들려 했다.

그것이 그에게 사죄할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으므로.

하지만 아르베우타는 그러지 않았다.

미련하게도 기억을 붙잡고 보란 듯이 인연을 이었다.

그러나 이제 마지막이었다.

이 인연의 실마저 거두면 그는 반드시 죽는다.

영혼이 바스러져 곳곳으로 흩어져 더는 환생하지 못하게 된다.

마지막임을 그 또한 직감했는지 그는 오아시스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오래간 먹지 못해 얼굴이 엉망이었다.

마르고 버석한 입술은 코앞의 물에 입술을 적실 힘조차 없어 보였다.

“……세실레.”

그의 입에서 밭은 숨이 흘렀다.

하늘에 닿을 정도로 간절한 음성이었다.

세실레는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잠잠한 눈동자는 여전히 고요하기만 했다.

“사랑해.”

기어코 죽을 생각이구나.

그의 마지막 한 마디에 세실레는 입술을 악물었다.

가치 있는 영혼, 언젠가 대륙을 정복했을 영혼, 그래서 소멸하면 균형이 크게 흔들릴 영혼.

그런 건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검지 위를 아슬아슬하게 배회하는 인연의 실은 막 짜낸 거미줄보다 가느다랬고 나비의 날갯짓으로도 끊어질 만치 연약했다.

고작 그 정도의 인연을 잇다가 소멸하는 것이다.

그것이 억울해선지 분해선지 혹은 어이가 없어선지.

세실레는 그간 사라졌다 생각한 감정이 치솟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어째선지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뺨을 타고 흐르는 액체는 분명 눈물이었다.

지상에서 돌아와 단 한 번도 흘려본 적 없는 것이었다.

그런 것이 쉼 없이 흘렀다. 고작 숨 한번 내쉬면 끊어질 인연에 달린 목숨이 안타까워 쉬이 숨 한 번 내쉬지 못하고.

“얼마나 미련한지. 미련해서, 답답해서 이리 눈물이 흐르는 건가. 아니면.”

세실레가 입술을 질끈 물었다.

부릅뜬 눈이 서서히 멎어가는 아르베우타의 호흡을 주시했다.

흐릿하고 엷었다. 잠시 방심하는 순간 저 영혼은 산산이 조각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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