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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97화 (97/110)

97

망가진 영혼 곳곳으로 뭉쳐 있던 힘이 퍼져 흘렀다.

이것으로 아르베우타는 아주 조금 생명을 유지할 힘을 얻었다.

그 후엔 그녀를 잊고 환생할 터였다. 여타 다른 인간들처럼.

‘어머니는 틀렸어요.’

당장 달에 돌아갈지언정, 오키드리아를 얻을 순 없을 터였다.

아르베우타의 영혼이 이 이별을 기억하고 원망할 테니까.

그는 각성자였다.

꿈에서 깨어난 특별한 영혼.

다시 죽어 환생하면 원래 그가 살아야 할 미래대로 살 것이다.

오키드리아를 정복하고 사람들을 이끌며 지상 최초로 신이 없는 대륙을 만들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녀는 끝까지 매정해야 했다.

세실레는 힘으로 아르베우타를 재웠다.

부릅뜬 눈이 파들대며 저를 응시했다.

숨이 막힐 정도의 시선에 무심코 힘이 빠졌으나 세실레는 기어코 그를 향한 힘을 거두지 않았다.

약속된 보름의 시간이 지날 때까지 그는 잠들어 있어야만 했다.

“편안히 잠들기를.”

그는 반항했으나 얼마 가지 못했다.

기억과 동시에 돌아온 막강한 신력은 아르베우타의 힘을 훌쩍 넘어섰기에.

“……세실레.”

그 말을 끝으로 아르베우타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완연히 잠든 몸을 안아 든 세실레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자요.”

얄궂게 이어졌던 인연이 기어코 끊어졌다.

손에 잡힌 붉은 실이 갈 곳을 잃고 흔들렸다.

세실레는 그가 비틀대는 틈을 타, 신전을 벗어났다.

먹구름 낀 하늘이 어두웠다.

그는 그녀를 잊을까. 혹은 미워할까.

세실레는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떻게 되든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빗줄기가 조금 더 굵어졌다. 그녀는 일렁이는 호숫물을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그와 처음 만났다.

그를 사랑했고 갖고 싶었다. 그래서 해선 안 될 욕심을 부렸다.

그 끝이 여기였다.

이제 정말로, 아무도 남지 않았다.

붉은 실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세실레는 가만 눈을 감았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대신, 빗물이 얼굴을 적셨다.

***

부슬부슬한 비가 내렸다.

남은 시간 동안 이 비를 멈춰보려 애썼으나 비는 멎지 않았다.

그렇게 하릴없이 보름이 흘렀다.

세실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은빛의 달이 선연하게 빛났다.

이제 곧 저곳에 다다를 터였다.

‘다시는 내려올 일이 없겠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선뜻 나서지 못하는 그녀의 뒤로 테레사가 가서 섰다.

테레사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그녀는 상당히 지쳐 보였다.

문을 열겠답시고 피 흘리던 것을 봤기에 세실레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일전엔 희생을 당연시 여기는 그녀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기억을 모두 되찾은 지금은 이해됐다.

테레사는 그러기 위해 태어나 그렇게 길러졌다.

그녀를 위해 죽는 것이 테레사의 사명이었다.

그 희생을 대가로 테레사는 다음 생에서 더욱 강한 힘과 지위를 얻을 터였다.

달이란 그런 곳이었다.

인간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수시로 벌어지는 곳.

그래선지 세실레는 테레사를 말릴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쳤다.

‘이젠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텅 빈 눈동자가 공허했다.

가만히 서 있는 세실레에게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비는 되셨습니까.”

“……그래.”

이제 돌아갈 때였다.

세실레가 말을 마치자마자 테레사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곤 마지막 인사를 올렸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세실레는 우는 대신 무감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음 생에서 바라는 게 있나?”

“그저 세실레님을 지키는 것, 그뿐입니다.”

“……알겠다. 이만 가지.”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테레사의 몸이 천천히 빛으로 화했다.

그녀의 힘이 응집되어 달로 가는 계단을 만들었다.

세실레가 계단 위로 올라섰다.

그 뒤를 루베르가 따랐다.

이제 곧 달이었다.

세실레는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는 들판이 유독 휑했다.

***

세실레가 종적을 감추자 모두가 그녀를 잊었다.

사관들의 기록은 지워졌고 황후궁의 시녀들은 자연스레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새로운 시녀 자리가 있는지 찾았다.

마치 세실레는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알아서 그 공백을 메꾸어갔다.

의연한 반응에 황당해진 이는 디젤라였다.

“……뭐야? 왜 다들 언니를 기억 못 해?”

그러나 아무도 디젤라의 질문에 답변할 수 없었다.

세렌디테 공작 부부조차 세실레를 잊었기 때문이다.

“언니? 황궁에 친한 언니가 있었니, 디젤라?”

그리 말하는 어머니의 얼굴은 태연하기만 했다.

그에 디젤라가 이번에는 아버지를 향해 물었다.

“아버지! 아버지는 기억하시죠? 언니가…….”

“디젤라 헛소리 말고 데뷔탕트나 준비하거라. 세렌디테 가문의 누가 되지 않게.”

“……말도 안 돼.”

충격받은 디젤라는 아르베우타를 찾았다.

그라면 알고 있으리라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무리 찾아보고 기운을 느껴보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루베르나 테레사도 마찬가지였다.

신전이 텅 빈 듯 고요했다.

마치 원래부터 그런 사람들은 없었다는 것처럼.

“이게 무슨 일이야.”

디젤라는 혼란스러웠으나 기다려보았다.

하루, 이틀이 지나면 나타나겠지. 그리 믿으면서.

하지만 헛된 바람이었다.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디젤라는 홀로 이곳저곳을 수색했다.

그러다 겨우 신전에 뚫린 바닥을 발견했다.

그곳엔 쓰러진 황제가 눈을 감고 잠들어 있었다.

“뭐, 뭐야!”

커다란 소리에도 황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어쩌면 죽은 걸지도 몰랐다.

디젤라는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숨은 쉬고 있는 것 같은데.”

하기야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여기에 누워 있는 게 정상은 아니었다.

그는 며칠이고 황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덕분에 황실도 난리였다.

‘기사단까지 파병했다던데 신전 지하에 있었을 줄이야.’

디젤라는 놀라움을 삼키곤 황제에게 다가갔다.

‘황제라면 언니를 기억하고 있겠지.’

디젤라가 그를 깨우기 위해 두 손을 입 앞에 모아 크게 소리쳤다.

“저기요! 일어나요!”

“…….”

“일어나라니까요?”

“…….”

“야!! 일어나라고!”

하지만 황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감긴 눈꺼풀이 떨리는 걸 봐선 선잠을 자는 듯한데 일어나진 않으니 괴이한 일이었다.

“물이라도 부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던 디젤라에게로 깊게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깼으니 그만하지.”

그가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표정이 좋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제대로 자고 일어나진 못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만은 언니를 기억해야 했다.

그조차 언니의 존재를 모른다면, 디젤라는 정말로 미쳐버릴 것 같았기에.

디젤라가 황제를 붙잡아 흔들며 물었다.

“이럴 때가 아녜요! 지금 언니가……!”

“알아.”

“……네?”

“아니까. 거기까지 해.”

언니 일이라면 언제고 예민하게 반응하던 남자의 표정이 무섭도록 무심했다.

그는 더 말을 잇고 싶지 않다는 듯 침묵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언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디젤라가 뒤돌아선 그를 향해 외쳤다.

“우리 언니 어딨냐니까요!”

외침 뒤로 나지막한 대답이 따라붙었다.

“떠났어. 저 멀리.”

“그러니까 어디로 갔냐고요!”

뜬구름 잡는 이야기에 디젤라는 답답해졌다.

이대로 동문서답식의 대화를 잇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캐묻고 싶은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는 언니를 기억한다.

디젤라의 의문을 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란 뜻도 되었다.

‘난 언니에 대해 알 권리가 있어.’

열흘 가까이 언니를 찾아 헤맨 보답을 받기 위해서라도.

대답을 듣기 전엔 결코 그를 보내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봐요. 그렇게 자꾸 말 돌리지 말고…….”

그러나 씩씩대며 걸어가던 디젤라는 얼마 가지 않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황제가 우는 건 처음 보았다.

디젤라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황제는 제 슬픔을 감출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몹시도 흐린 목소리로 말을 이을 뿐이었다.

“……날 버리고 갔어.”

“…….”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지?”

디젤라는 아무런 말도 이을 수 없었다.

그의 눈이 새까맣게 죽어 있었다.

마치 삶의 의미를 상실한 사람처럼.

***

디젤라는 우선 그를 데리고 황궁으로 돌아왔다.

한동안 부재중이던 황제의 귀환에 황실이 발칵 뒤집혔다.

하지만 황제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업무를 처리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디젤라는 처음에 그가 걱정되었다.

황제가 얼마나 언니를 좋아했는지 기억한 탓이었다.

하지만 그가 언니 이야기만 나오면 입을 닫아버렸기 때문에 디젤라는 더는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그가 디젤라에게 언니의 행방을 알려주었기에 더 물을 것이 없기도 했다.

믿기 힘든 이야기였으나 언니는 달로 갔다고 했다.

원래부터 그곳에서 왔으니 돌아갔을 뿐이라고.

앞으로 돌아올 일이 없으니 다른 이들의 기억도 지워진 것이라고.

디젤라는 믿는 수밖에 없었다.

언니란 존재는 동화 같은 이야기마저 믿게 만들 정도로 묘한 사람이었기에.

‘잘 지내려나.’

디젤라는 종종 심심할 때면 달을 올려다보곤 했다.

언제나와 같은 유백색의 달은 한결같이 아름다웠다.

평소엔 무심코 지나치던 것이, 저곳에 언니가 있다고 생각하니 유독 눈에 띄었다.

‘보고 싶다.’

가끔 언니가 그리웠다.

디젤라는 그녀와 황제만이 언니를 기억한다는 것이 어쩐지 좀 씁쓸해서, 생각날 때마다 언니를 향해 편지를 쓰곤 했다.

언니, 잘 지내고 있어? 나는 잘 지내.

오늘도 황제는 황후궁으로 갔어.

사람들은 그게 황후를 맞이할 거란 의미로 알고 시끄러워.

정작 황제는 언니 생각만 하는 것 같은데.

보고 싶다.

하루, 이틀 이런 식으로 편지를 쓰다 보면 언니를 향한 슬픔도 그리움도 털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차차 디젤라도 언니를 잊을 수 있었다.

다른 이들처럼 기억에서 지워진 것은 아니지만, 가끔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황제 또한 마찬가지인지 그가 황후궁을 찾는 횟수가 점점 줄었다.

디젤라는 내심 다행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돌아오지 않을 사람이라면, 잊는 편이 나을 테니까.

그렇게 시간이 흘러 디젤라는 쟈르스와 결혼했고 둘 사이엔 아이가 태어났다.

그때까지 묵묵히 황위를 지켜오던 아르베우타는 두 사람의 아이를 후계로 지정하곤 몇 년 내로 물러나리라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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