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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96화 (96/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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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드리아가 지금까지 그 어떤 신의 보호도 받지 못했던 이유는 그곳 인간들의 힘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지. 하지만 네 덕에 나의 힘이 오키드리아에 뿌리 내렸구나. 자랑스러운 세실레. 이제 돌아오도록 해.]

“설마, 그가…….”

[네 생각이 맞단다. 너라면 한눈에 알아볼 줄 알았지.]

“…….”

[이제 그 인간은 널 그리워하다 죽겠지. 다른 건 살필 겨를도 없을 테니, 오키드리아는 영원히 우리의 것이 되는 거란다.]

세실레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언제고 어머니가 멋대로 일을 꾸미는 건 알았으나 이번만큼은 동조해 줄 수 없었다.

세실레가 힘주어 테라스 난간을 쥔 채 속삭였다.

“전 못 돌아가요.”

[…….]

“돌아가지 않을 거야. 당신 마음대로 흘러가게 두지 않을 거라고요.”

세실레의 두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그녀의 결심에 침묵하던 세렌디가 느리게 말을 이었다.

[과연 가능할까? 네가 내 손을 떠나는 것이.]

“…….”

[그래, 한번 해보려무나. 하지만 넌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란다.]

세렌디가 당당하게 말했다.

세실레는 그 말에 무어라 대꾸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마음먹은 것을 반드시 해내는 이였다.

결국 세실레는 어머니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을 것이다.

두려웠다. 당장이라도 뜻에 따르겠노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 싫었다.

세실레는 이번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

아르베우타의 존재가 걸려 있었으니까.

세실레가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절대 후회 안 해요.”

세렌디가 가늘게 웃었다.

[나도 그 시절엔 그런 패기를 지녔지. 그것도 좋은 경험이란다, 내 딸아. 그러니 마음껏 지상의 경험을 누려보렴.]

어딘가 싸늘한 어조에 세실레는 경직되었다.

하지만 더 이상의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되었을지 몰랐다.

당장은 다행이었다.

아르베우타의 목에 걸린 펜듈럼을 보기 전까지는.

“……이건.”

펜듈럼은 정순한 신력을 가득 담고 있었다.

정순한 힘은 양면의 칼과 같았다.

언제고 마기가 되어 그를 위협하고 저주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설마……. 안 돼. 당장 벗어요.”

세실레가 사색이 되어 외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펜듈럼에서 흘러나온 힘이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곳에서 온갖 규율이 흘러나왔다.

[제국의 황후 위는 반드시 신탁을 따른다. 선택받은 내 딸의 그림자들만이 그 자리를 이을 수 있다.]

[세렌디의 딸이 더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게 되면 대륙은 바다에 가라앉고 제국의 축복도 존재하지 않으리라.]

역사서에 세렌디의 말이 새겨졌다.

사람들은 세렌디가 하는 말을 무의식에 새겼다.

하지만 그들이 듣지 못한 뒷말이 있었다.

오직 세실레만이 들은 말이었다.

[넌 앞으로 평범한 인간처럼 환생을 거듭할 것이다. 탄생의 고통과 죽음의 이별을 겪고 겪어, 네 분신들이 말라 죽는 것을 바라보고서야 다시 올라올 수 있게 되겠지. 달의 문은 닫혔고 네 계약은 시작되었으니 너와 인연을 맺은 인간만이 홀로 남아 세상을 방황하겠구나.]

“……저한테 왜 그러시는 거예요?”

하지만 들려오는 말은 늘 여느 때와 같이 고요할 뿐이었다.

[널 위할 뿐이란다. 모든 것에 해탈하지 못한다면 그렇게 만드는 수밖에.]

“설마……. 고작 그런 이유로.”

[어차피 한 번은 겪을 고비였다.]

덤덤한 말에 화가 났다. 그러나 어디에도 토로할 곳이 없었다.

그저 말문이 막혔다.

그간 공들여 수련한 결과로 얻은 힘도 모조리 사라졌다.

어머니가 모조리 앗아갔다.

아주 가뿐하게,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 제 멋대로일 수 있어요?”

분노하는 그녀에게로 아르베우타가 다가왔다.

그러나 그는 세실레와 손이 닿는 순간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아르베우타와 잠시간 맞닿았던 세실레의 손이 새카맣게 썩어들어갔기 때문이다.

“……이런.”

아르베우타가 표정을 굳힌 채 중얼거렸다.

하지만 세실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를 둘러싼 힘이 모두 사라진 탓이었다.

하지만 이건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기억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세렌디의 말대로 환생을 거듭할 모양이었다.

그러다 세렌디가 안배한 비극에 항복해서야 달의 문이 열리겠지.

문을 열러 온 이들은 그녀를 달콤한 말로 꾀어낼 터였다.

‘힘이 돌아오면, 인연을 맺은 것부터 끊어야 해.’

아르베우타를 끊어내야만 했다.

세렌디는 분명 아르베우타가 소멸하도록 안배할 테니까.

시간이 흐르기 전에, 최대한 빨리 기억을 되찾아야 한다.

다행이라면 아르베우타는 괜찮아 보인다는 점이었다.

어떤 이유에서건 어머니는 그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기억 또한 여전할 터였다.

세실레는 벌써부터 더듬더듬 끊어지는 기억을 느끼며 다급히 말했다.

“기억을 되찾기 전에 누군가 절 달로 데려가려 한다면 반드시 막아줘요.”

“……갑자기 무슨 말입니까.”

아르베우타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세실레가 일그러진 웃음을 지었다.

우는 것도 웃는 것도 같은 얼굴이었다.

“묻지 말고 그렇게 해줘요. 달에서 온 이들은 아무도 믿지 말고 오직 나만, 내가 기억을 되찾을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그때가 되면 내가 당신을 지킬 수 있으니.”

아르베우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를 묻기엔 세실레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비가 와도, 오물을 밟아도 항상 같은 모습이던 그녀가 지금은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그가 심각해진 낯으로 물었다.

“세렌디 때문입니까?”

“……맞아요. 난 이제 당신을 기억하지 못하겠죠.”

세실레가 아르베우타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포옹에 아르베우타의 돌처럼 굳어 있던 몸이 움찔 떨렸다.

스치기만 해도 살이 썩었다. 그 이상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하지만 세실레는 거침이 없었다.

그녀는 신경이 타오르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그의 품에 안겨 속삭였다.

“사랑해요, 진심으로.”

“그만 떨어지십…….”

아르베우타가 고개를 떨궜다.

그녀를 밀어내려던 손은 힘을 잃고 허공을 배회했다.

세실레의 몸이 천천히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일전의 전능하던 힘을 쓰지 못하게 된 것이 분명했다.

상황을 파악한 아르베우타가 세실레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그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렀다.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절 기억하지 못해도 찾아내고 찾아내서 언제고 곁에 있을 겁니다.”

“……가엾은 사람.”

세실레가 그의 뺨을 쓸었다.

그러는 중에도 차근차근 세실레의 몸이 사그라들었다.

세실레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재생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일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통이 그녀를 엄습했다.

그런데 어째선지 조금도 아프지가 않았다.

그녀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오직 하나.

기억을 되찾으면 인연을 끊는 것.

다음번에 만나면 날 위해 울어주지 않겠지.

‘마지막이 네 품 안이라서 다행이다.’

세실레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세실레!”

아르베우타는 늘어진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마저도 모조리 사라져 품 안에 자그마한 온기조차 남지 않을 때까지.

그의 눈에서 쉼 없는 눈물이 흘렀다.

SIDE STORY. 사라진 기억. End

***

무너진 여신상을 앞에 두고 세실레는 오른손으로 아르베우타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왼손엔 붉은 실이 쥐여 있었다.

여태껏 인연을 이어온 실이자, 아르베우타를 여태껏 괴롭힌 저주였다.

이젠 놓아줄 때가 되었다.

결심을 마친 세실레가 아르베우타의 뺨을 쓸었다.

부드러운 손짓이 유혹하듯 살결을 스쳤다.

그러나 아르베우타의 표정은 지나치게 침착했다.

그의 눈동자가 고요하게 물결쳤다.

마치 세실레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언제고 그녀를 향해 띄우던 열기가 차갑게 식었다.

차마 밀어내지 못하는 손이 세실레의 옷깃만 세게 쥐었다.

그는 무어라 더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눈매를 굳혔다.

아릿하게 내려다보는 시선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그가 세실레의 왼손을 바라보더니 나직이 중얼거렸다.

“결국…….”

“…….”

“결국, 절 버리기로 하신 겁니까.”

그가 세실레의 옷자락을 찢어질 듯 힘주어 쥐었다.

붉은 눈동자가 설움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입술만은 단단하게 다물려 있었다.

마치 인내하는 듯했다.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려 자제하는 손등 위로 핏줄이 솟았다.

몸의 근육이 뻣뻣하게 경직되었다.

그러나 세실레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마른 뺨을 쓸 뿐이었다.

손끝에 닿는 움푹 팬 뺨이 전보다 더 말랐다.

눈 밑의 그림자도 더 어둡게 드리웠다.

기억 속 앳되었던 모습과 비교하면 그는 훨씬 더 메마르고 괴로워 보였다.

세실레는 그와 시선을 맞춘 채로 중얼거렸다.

“내 말 잘 들어요. 어차피 우리는…….”

손에 쥔 실은 언제고 끊어질 듯 팽팽했다.

그 미묘한 감각을 아르베우타 또한 느꼈다.

둘 사이에 이어진 무언가가 위태롭게 흔들린 채 그녀의 손에 쥐여 있었다.

그것이 끊어지기 직전이라는 것도.

직감적으로 그는 세실레가 기억을 되찾았음을 깨달았다.

깊이 가라앉은 눈동자가 그것을 증명했다.

일전의 불안과 혼란은 어디로 가고 그녀는 몹시도 차분해 보였다.

마치 무언가 결정을 내린 듯이.

그 결심이 그를 떠나는 것임을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르베우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세실레를 향해 물었다.

“정말로 나를 버리려고.”

붉은 눈동자가 술렁였다.

그가 억누르던 힘이 폭주하여 흔들리기 직전이었다.

깨지기 직전의 영혼이 곧 소멸할 듯 위태로웠다.

세실레는 그가 한계 이상으로 버티고 있음을 잘 알았다.

그러니 이제 끊어야 했다. 그가 원하든 원치 않든.

그래야 아르베우타가 살 수 있었다.

‘그러니 한껏 미워하고 원망해.’

세실레는 눈썹을 좁히며 웃었다.

동화책에 나오는 악역의 흉내를 낸 웃음은 어딘가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이루어지지 못할 걸 알았잖아요.”

“……뭐?”

“안 되는 걸 욕심낸 건, 당신이야.”

세실레가 검지로 그의 가슴 한가운데를 짚었다.

망가진 영혼이 그녀의 손길에 반응하며 불처럼 타올랐다.

가슴이 타는 듯한 감각에 그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세실레는 그의 반응을 찬찬히 살피면서 중얼거렸다.

“저는 당신을 이용했을 뿐이에요. 당신은 한낱 유희에 이용된 거라고.”

그러니까 날 원망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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