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95화 (95/110)

95

세실레는 그 말에 위안받았다.

모두가 그녀를 잊는다고 해도 단 한 명, 그녀를 기억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판이었다.

지상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세실레는 더욱 많은 걸 원하게 되었다.

가지지 못한 것에 집착하게 되었다.

‘다른 연인들은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는데, 왜 나는 못 하는 거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고작 손 한 번 잡은 게 전부였다.

다른 이들은 마음껏 사랑을 나누는 데 세실레는 그러지 못했다.

아르베우타는 그런 그녀를 배려했으나 그건 세실레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 또한 그를 품에 안고 어루만지고 입을 맞추고 싶었다.

하나뿐인 반려이길 맹세하고 둘을 닮은 아이를 낳고 싶었다.

한 집에서 함께 아침을 맞고 잠들고 싶었다.

평범한 이였다면, 언제고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나도 하고 싶어.”

언제고 떠날지도 모르는 불안에서 벗어나 그의 곁에 정착하고 싶었다.

죽고 못 살 것처럼 불타오르는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바라는 것은 단지 그뿐이었다.

그걸 그도 원했다. 그러나 세실레는 청혼을 받고도 대답하지 못했다.

할 수 없었다. 모든 일에 세렌디가 끼어있기 때문에.

결국 세실레는 결심을 내렸다.

이 모든 것을 어머니께 고백하기로. 그럼에도 아무런 답이 없으면 허락으로 생각하기로.

지상에 내려온 뒤 처음으로 의지를 표명하는 셈이었다.

***

세실레는 인간들이 세운 신전 가운데에 앉았다.

악령을 물리친 보답으로 세렌디 신을 추앙하기 위해 세운 것이었다.

호숫가 근처에 세워진 새하얀 신전이 달빛을 받아 웅장하게 빛났다.

신전이 착공되던 때부터 매일같이 들락거리던 곳이었다.

하루를 빠지지 않고 무늬 없는 흰옷을 차려입고 기도를 드렸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날 버린 거냐, 혹은 잊은 거냐.

그렇다면 이대로 지상에서 머물러도 되는지까지.

헛된 바람을 품고 물어도 세렌디는 응답하지 않았다.

마침내 세실레는 둥그렇게 떠오른 달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머니 저는 할 만큼 했어요. 아무런 답도 없으시니 허락하시는 걸로 알게요.”

세실레는 제단 위에 손수 만든 꽃다발을 내려놓았다.

그런 다음, 아르베우타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삼 년간 미루던 청혼의 승낙이었다.

***

처음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상상했던 평범한 삶은 아니었으나 모두가 세실레와 아르베우타를 존경하고 따랐다.

두 사람도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세실레는 악령을 물리쳤고 배운 것을 토대로 집단의 규칙을 세웠다.

아르베우타는 들짐승과 인간의 거주 구역을 나누고 마을을 정비했다.

모든 것이 처음인 사람들에게 있어, 둘의 존재는 빛과 같았다.

처음엔 불안했다. 언제고 어머니로부터 달로 돌아오란 명령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어머니로부턴 아무런 답이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세실레도 달에서의 일을 모조리 잊었다.

‘허락하신 게 분명해.’

그리 생각하니 마음이 놓였다.

게다가 지상에서의 시간은 몹시도 행복했다.

이대로 평생 지상에서 살고 싶었다.

하지만 바라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날, 테레사가 두 사람을 찾아왔다.

***

“세렌디께서 보내셨습니다.”

“어머니가?”

테레사는 세실레가 태어난 것을 기념해서 세렌디가 탄생시킨 신수였다.

세실레 또한 그녀를 알았다.

달에서부터 그녀의 호위로 길러지는 것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엔 세렌디도 테레사도 어리고 미숙해서 서로 수련하기에 바빴다.

그래서 얼굴을 이리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다.

오랜만에 신수를 보니 반가웠다.

하지만 세실레는 슬금슬금 밀려오는 불안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왜 온 거지…….’

환대하지 않는 모습에도 테레사는 묵묵히 말을 이었다.

“곁을 지키라 하셨습니다.”

필요 없었다. 이미 그녀의 곁을 지켜주는 이는 따로 있었다.

하지만 테레사는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세실레님을 지키는 것이 제 사명입니다.”

“이제 와서……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야?”

세실레의 물음에 테레사는 표정 한 번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지상과 달의 시간은 다르게 흐릅니다. 저는 세렌디님의 명을 받고 바로 내려왔습니다.”

몰랐던 이야기였다.

만약 어머니가 뒤늦게 이 일들을 아신다면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세렌디는 몹시도 엄격하고 칼 같은 성정을 지녔다.

거슬리는 것이 있었으면 세실레에게 곧장 말했을 게 분명했다.

테레사의 말에 세실레는 사색이 되어 물었다.

“뭐라고? 그럼 어머니는 이 일을 몰라?”

“그렇진 않을 겁니다.”

그제야 세실레는 안도의 숨을 뱉었다.

“……그래, 다행이네. 마음대로 해.”

그 뒤로 테레사는 세실레를 지켰다.

세실레는 테레사의 존재가 못 내켰으나 침묵했다.

테레사를 건드려 어머니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진 않았기에.

그러나 영 불안했다.

이제부터 세렌디가 직접적으로 끼어들 거란 생각이 든 것이다.

그 전엔 세렌디의 간섭을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세실레는 어머니의 간섭이 지긋지긋하다고 느꼈다.

‘어머니. 난 이대로 살고 싶어요.’

그 바람이 이루어질 리 없었다.

세렌디는 기다렸다는 듯 목줄을 조였다.

처음은 신탁이었다.

[제국을 세워 나를 모셔라. 내가 오키드리아 제국의 유일신이다.]

신탁에 세실레와 관련된 것은 조금도 없었다.

세실레는 안도했으나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세렌디는 그녀에게 관심을 거두지 않았다.

그녀를 통해 무언갈 이루려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곧 돌아오라고 하겠지.’

그게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었다. 당장 내일일 수도 있었고 아주 먼 미래일 수도 있었다.

‘어떡하지.’

세실레는 초조해졌다.

하지만 그녀와는 달리, 신탁을 받은 이들은 몹시 기뻐했다.

세렌디가 오키드리아 대륙을 지키겠노라 선포했다.

신이 보호하는 땅은 어디보다도 강력해졌다.

결코 넘볼 수 없는 강한 국력을 지니고 영원한 풍요와 평화를 보장받는 것이다.

게다가 신탁이 내려온 이후에, 황량하던 땅 위에 거대한 황궁이 세워졌다.

단 하루 만에 일어난 기적에 환호성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세렌디신 만세!”

“세실레 성녀님 만세!”

많은 이들의 환호 속에서 신탁대로 제국이 세워졌다.

초대 황제 자리에 처음으로 추앙받은 것은 세실레였다.

신의 딸이자 신비한 힘을 지녔고 신탁을 받으며 악령을 물리치는 존재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신,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고 떠날지 모르는 몸이었다.

덥석 황제가 될 순 없었다.

한사코 만류했으나 그녀를 대신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많은 회의 끝에 아르베우타가 그 자리를 대신 받았다.

“아르베우타 황제 폐하 만세! 세실레 황후 폐하 만세!”

세실레는 떨떠름했다.

이 모든 영광이 한순간에 바스러질 먼지와 같아 보였다.

그녀의 불안에 아르베우타 또한 행동을 달리했다.

그는 내내 세렌디와 관련된 일에 관해선 침묵하곤 했다.

끼어들 수 없는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는 안 되겠다 여긴 모양이었다.

그가 세실레를 향해 자상한 목소리로 물었다.

“요즘 걱정이 많아 보이십니다.”

“……곧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니 불안해요.”

그녀의 불안을 익히 알고 있는 아르베우타가 그녀를 다독였다.

“신탁이 내려와서 그러시군요.”

“……맞아요.”

“그동안 답이 없던 분이시니까요.”

“그러니까요. 갑자기 왜…….”

세실레가 입술을 질끈 물었다.

여리게 흔들리는 속눈썹을 바라본 아르베우타가 그녀를 껴안았다.

“저랑 약속하셨습니다. 현재에 충실하기로. 어차피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당장 내일 떠나야 한다 해도, 지금 함께인 건 변치 않습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언제 떠나건 걱정으로 하루를 낭비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로선 그리 쉬이 말하는 아르베우타가 신기했다.

……조금은 속상했다.

결국 그녀의 입에서 설움이 터져 흘렀다.

“나는, 나는 매일 이 문제로 고민인데 당신은…….”

“…….”

“어떻게 그렇게 태연해요? 언제 헤어질지 모른다는데,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감정이 치솟았다. 울컥, 맺힌 무언가가 가슴께로 뻐근히 차올랐다.

실언했단 생각을 하면서도 속상함을 다스릴 수 없었다.

하지만 아르베우타는 동요하지 않았다.

깊게 가라앉은 적안은 몹시도 고요했다. 마치 그녀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그제야 실책을 깨달은 세실레가 지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미안해요.”

세실레가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자 아르베우타가 그녀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제가 있겠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곁에 머물겠습니다. 당신이 있는 곳까지 쫓아서라도.”

그 말에 어째선지 위안이 되었다.

빈말이라도 좋았다.

그녀는 안식할 곳이 필요했다.

그러던 중 세실레의 눈에 묘한 것이 띄었다.

붉은 인연의 실이 이어진 것이다.

인연을 맺으면 영혼이 묶여 버린다. 환생을 거듭해서도 계속해서 만나게 하는 질긴 끈이었다.

사랑하는 연인과 묶인다는 것은 평범한 인간이라면, 바라마지 않을 일이었다.

하지만 세실레는 달랐다.

세실레의 영혼은 환생하지 않았고 우주의 끝에서 소멸했다.

평범한 인간의 영혼이 그를 견딜 수 있을 리 없었다.

‘반드시 소멸할 거야.’

당장 인연을 끊어야 했다.

그것이 아르베우타의 영혼을 지킬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세실레 이제 돌아오거라.]

세렌디가 귀환을 명했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린 것처럼.

“……뭐라고요?”

[돌아와. 오랜 시간을 떠나 있었다.]

“말도 안 돼. 어째서 지금.”

세실레는 황당해서 말조차 이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곧장 정신을 차리곤 끈을 끊으려 했다.

하지만 되지 않았다. 갑자기 힘이 사라진 것이다.

사색이 된 그녀에게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잘했어. 그 인간은 골치 아파질 예정이었으니. 훌륭한 일을 해냈구나, 세실레.]

“……네?”

의아해하는 그녀에게로 차근한 설명이 들려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