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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얼 하라는 것도 없었다. 그저 내려가라고만 했다.
그토록 감시가 심하던 어머니가 한 말이라기엔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고려하기에 지상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세실레는 금방 지상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다.
마침 지상은 꽃으로 가득했다.
한 철만 피고 지는 꽃은 달에서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항상 아쉬움을 남기곤했다.
그런데 이곳은 눈 깜짝할 사이에 꽃이지지 않았다.
피어오른 그대로였다.
세실레가 호숫가 가득 피어오른 꽃을 보며 중얼거렸다.
“꽃이다. 여기에 꿀이 있다던데.”
노랗고 끈적거리며 달다고 했다.
그런데 도대체 꿀이란 건 어디 있다는 거지.
요모조모 보아도 손바닥만 한 꽃 어디에도 꿀은 보이지 않았다.
꽃나무 가지를 붙잡고 살피던 세실레가 작게 중얼거렸다.
“……미안.”
그녀는 나무에서 꽃 한 송이를 똑 떼어다 살폈다.
그런 다음 꽃잎 사이를 벌려도 보고 꽃술을 들춰보기도 했다.
하지면 여전히 꿀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머릿속에 묘연한 생각이 떠올랐다.
‘한 번 먹어 볼까?’
입에 물고 있으면 맛이 날지도 모르겠다.
고민하던 세실레는 입에 꽃을 물었다. 그러나 곧 스스로 하는 양이 우스워 웃음이 터졌다.
‘뭐 하는 짓이람.’
누군가 보면 상당히 우스꽝스러운 모습일 터였다.
하지만 막상 입에 물었으니 맛은 제대로 느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실레는 혀에 정신을 집중했다.
착각인진 몰라도 달콤한 맛이 나는 것도 같았다.
세실레가 고민에 잠겨 눈썹을 좁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사람!’
사람이다.
세실레는 호기심을 가득 담고 뒤를 돌아보았다.
인간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설렘을 가득 담고 돌아보자 웬 남자가 서 있었다.
사슴 모포를 걸치고 선 남자는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굵은 얼굴선을 타고 흐르는 구불구불한 머리칼이 땀에 젖어 있었고 마른 입술이 버석했다.
피 냄새를 맡고 쫓아온 들짐승들은 그가 쓰러지기만을 기다리는 듯 숨죽이고 풀숲에 숨어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의연했다. 들짐승의 존재를 모르는 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고 딱히 처치할 힘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어쩌면 생사의 끝에 선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초연히 두 다리로 서 있었다.
‘신기한 인간.’
세실레는 그에게서 얼굴을 뗄 수 없었다.
깊고 짙은 눈매나 시원하게 뻗은 콧대.
굳게 다물린 입술 선 따위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신기한 기분이었다.
누군가의 외양에 이토록 홀려본 것은 단연코 처음이었으므로.
한참이고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세실레가 무심코 얼굴을 붉혔다.
‘잘생겼다.’
누군갈 보고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건 처음이었다.
깨끗하고 정갈한 달의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거칠었다.
사람이 아니라 날것의 짐승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이성이 있고 날뛰지 않는다.
‘……인간들은 다 저런가.’
분명 달에서 봤을 땐 저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고민하는 사이, 남자의 시선이 그녀의 입술 쪽을 향했다.
그를 눈치챈 세실레가 입가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곤 민망한 표정으로 입에 물고 있던 꽃을 빼냈다.
어쩐지 민망해진 세실레가 주절주절 변명을 입에 담았다.
“아, 저 그게…….”
“…….”
“꽃에는 꿀이란 것이 있대서요.”
묻지도 않았는데 변명하려니 너무나도 민망했다.
남자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기에 더더욱.
세실레는 흘긋 시선을 들어 그를 보았다.
그녀가 안절부절못하는 것과는 달리, 남자는 얼굴이 딱딱했다.
그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군요.”
그 말을 끝으로 남자는 호수로 다가가 수통에 물을 담갔다.
찢어진 모피 새로 여전히 피가 흘렀다.
꿈틀거리는 근육이 달빛 아래서 번들거렸다.
치명상이 몸 곳곳에 가득했다.
‘상처를 치료해줘도 될까…….’
세실레는 달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어머니에게선 아무런 답이 없었다.
보고 있지 않을 리가 없는데, 이상했다.
‘이 정도는 괜찮은 건가?’
평소 세렌디의 성격을 아는 그녀로서는 의아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걱정은 금세 사라졌다.
눈앞의 남자가 그 모든 것을 집어삼켰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시선을 달리 해석했는지 남자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꽃에 꿀이 있기는 하지만 아이들이 장난삼아 갖고 노는 정도입니다.”
딱딱한 어투였다.
세실레가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과는 달리 남자는 아무런 감정도 없는 듯 보였다.
세실레는 그것이 조금 섭섭했다.
“……그런가요.”
인간들은 다 이런 건가.
아픈데 표정 하나 구기지 않고 꿀에 대해 논하다니.
이해하기 힘든 이었다.
‘아니면 내가 싫은가.’
그러나 이어 들려오는 말에 세실레는 생각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가 수통을 다 채우고 몸을 일으키더니 선선히 물어온 것이다.
“마침 제게 꿀이 있는데, 조금 드릴까요?”
“정말요? 감사합니다.”
세실레는 멋대로 남자에 대한 생각을 정정했다.
‘좋은 인간이구나!’
남자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아픈데 먹을 것을 나누어줄 리 없었다.
‘그렇다면 보답을 해야겠지.’
세실레는 남자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이마에 손끝이 닿자 곧장 후끈한 열기가 올라왔다.
상상 이상으로 고열이었다.
지금껏 멀쩡히 서 있던 것이 신기할 정도로.
‘도대체 어떻게 버틴 거야.’
기겁한 세실레가 놀라서 물었다.
“그런데 괜찮으신가요? 열이 나는데요.”
그러곤 대답이 들려오기도 전에 손끝으로 신력을 흘려보냈다.
강력한 신력은 남자가 입은 상처를 순식간에 치유했다.
안색이 좋아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의 표정이 편안하게 변할수록 세실레 또한 마음이 놓였다.
그러는 사이 몸의 변화를 느낀 남자가 놀라선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하는 남자를 보며 세실레가 담담히 답했다.
“꿀을 주신다면서요? 그 보답이에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남자는 순순히 세실레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악령이 날뛰는 세계였다.
누군가를 쉬이 믿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가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날붙이가 달빛을 받아 묘연하게 빛났다.
하지만 세실레에게 있어 인간의 무기는 민들레 씨앗처럼 무력했다.
게다가 세실레의 재생력은 달에서도 칭송받을 정도로 좋았다.
저 무기를 아무리 휘둘러 봐야 그녀에게 상처 한 번 입힐 수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째선지 그에게 정체를 밝히고 싶었다.
‘어쩌면 좋을까.’
무턱대고 정체를 밝힌다 해도 믿어줄 리 없었다.
오키드리아 대륙엔 아직 신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세실레는 특별한 수를 쓰기로 했다.
그녀가 선뜻 남자의 앞으로 팔을 드러내었다.
희고 가느다란 팔이 불쑥 내밀어지자 남자가 눈매를 좁혔다.
경계심을 가득 돋운 남자를 보며 세실레가 선뜻 말했다.
“제겐 치유능력이 있어요. 베어보면 알 수 있을 거예요.”
베어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금방 회복하는 모습을 보고 나면 남자도 그녀의 말을 믿어줄 터였다.
그러나 남자는 그러지 않았다.
인상을 찌푸린 채로 한참이고 그녀의 팔을 노려보더니, 이윽고 칼을 거두었다.
힘 빠진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되었습니다.”
“베어도 괜찮은데.”
고작 칼로 베어봐야 조금 따끔하고 말 뿐이었다.
그 정도 고통은 달에선 일상이라, 딱히 특별할 것도 없었다.
세실레가 의아하단 낯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의 입에서 한숨 같은 소리가 새었다.
“확실히 이곳 사람은 아닌 것 같군요.”
그의 말에 세실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전 달에서 왔으니까요.”
그의 말에 남자가 인상을 썼다. 도저히 믿지 못하겠단 표정에 세실레는 웃었다.
***
“세실레님!”
“세실레님께서 오셨어.”
“드디어 우리 마을에도……!”
세실레는 여러모로 눈에 띄는 존재였다.
눈처럼 깨끗하고 하얀 피부에 도드라지도록 빛나는 은빛의 머리카락, 호수처럼 푸르고 맑은 눈동자와 같은 외양도 그랬지만, 그녀의 신성은 특별했다.
세실레가 다가가면 악령들이 도망쳤고 악령에 씐 사람도 정신을 차렸다.
몇몇 회복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다수의 행복에 잊혀 그들은 기억되지 않았다.
닿기만 해도 병을 치유하고 악령을 물리치는 세실레는 사람들에겐 신처럼 보였다.
세실레는 그럴 때마다 그들의 말을 정정해주었다.
신은 세렌디이며, 그녀는 세렌디의 딸에 불과하다고.
그러자 사람들은 이제 그녀를 성녀라고 바꾸어 불렀다.
세실레는 그들의 말에 그렇노라 고개를 끄덕이고만 말았다.
그렇게 차츰차츰 오키드리아 대륙을 드리우던 악령이 걷히자, 따로 흩어져 살던 사람들은 모여 살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들을 하나로 모아줄 강력한 힘을 바랐다.
달의 신 세렌디를 향한 믿음을 바탕으로 그들은 세실레가 무리의 장이 되어주길 바랐다.
“제발 저희들의 왕이 되어주세요!”
하지만 세실레는 그들의 부탁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는 언제고 떠날 몸이었다.
태어난 운명이 그랬다. 그녀는 세렌디의 뒤를 이어야 했다.
그건 낮과 밤이 바뀌는 것처럼 지극한 자연의 순리였다.
하지만 그들이 세실레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리 없었다.
“저희를 떠날 생각이신가요?”
“다시 악령이 돌아오는 건가요?”
“저흴 버리지 마세요.”
간절한 목소리에 세실레는 곤란해졌다.
어쩌면 주제넘은 참견을 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매일 밤 기도해도, 어머니로부턴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게 수년이 지나니 세실레도 지쳐버렸다.
‘어쩌면 내 마음대로 하라는 건지도 몰라.’
게다가 처음으로 어머니의 품을 떠나 맛본 자유는 지나치게 달콤했다.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언제고 곁을 지켜주는 아르베우타.
그와 있으면 아픈 일도 힘든 일도 없었다.
감정을 죽이라 강요받지도 않았고 고통스럽기만 한 수련을 할 필요도 없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녀의 존재만 제외하면.
‘모른 척 살고 싶어.’
그녀는 처음으로 제 존재를 원망했다.
그 어떤 수련과 고난에도 이러한 마음을 품은 적이 없었다.
공고하던 믿음은 차근차근 뿌리부터 흔들려갔다.
‘나는 왜 평범하지 않을까.’
평범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평범하게 저들과 어울려 살고 싶었다.
세실레가 겉돌 때마다 그녀를 달래준 사람은 아르베우타였다.
“저는 항상 당신 곁에 있을 겁니다.”
“……제가 당장 내일 떠나야 한다고 해도요?”
“물론입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제가 기억하는 한,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