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뭐어, 부럽다고?”
디젤라가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그녀를 바라보던 세실레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냐. 그러고 보니 쟈르스는 잘 지내?”
“걔야 뭐……. 근데 언니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안색이 안 좋은데.”
“별로.”
세실레가 뺨을 문질렀다.
부모님이 회복하는 며칠간, 세실레 또한 깊은 고민에 잠겨 있었다.
꼭 달에 돌아가야만 하는지, 잃은 기억은 어떻게 되찾는지, 테레사는 죽을 수밖에 없는지.
하지만 그걸 디젤라에게 속속들이 설명해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세실레는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라 말을 골랐다.
그러는 중에 디젤라의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아 씨, 근데 이 비는 왜 자꾸 내려? 원래 여름에 비 잘 안 오지 않나.”
그 말에 무어라 답하면 좋을지 몰랐다.
괜히 꾸짖음 받는 기분에 세실레는 급히 몸을 돌렸다.
“……바쁜 일 있어서 먼저 가볼게.”
“언니?”
“난 정말 괜찮아.”
세실레는 도망치듯 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 나직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이는데, 뭐…….”
***
세실레는 호수 주변을 서성이다가 아르베우타의 기척에 몸을 돌렸다.
그녀가 느낀 대로, 아르베우타가 지척에 있었다.
오늘 그는 세실레가 가족과 시간을 보내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부모님이 몸을 제법 추스른 덕이었다.
하지만 만남은 오래가지 못했다.
가족과 잘 어울리지 못한단 사실이 부끄러워진 세실레가 시선을 피했다.
그러다 이마를 두드리는 굵은 빗물에 안색을 굳혔다.
“아, 이건…….”
마치 잘못한 어린아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세실레가 변명하려는 듯 입술을 우물거리는데, 성큼 다가온 아르베우타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대신 제 망토를 덮어주며 세실레를 안쪽으로 이끌었다.
“비에 젖습니다.”
“……비가 그치지 않아서.”
“우선은 안쪽으로 들어가죠.”
세실레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서자 시녀들이 급히 응접실에 벽난로를 피웠다.
아직 불을 붙이기엔 일렀지만, 젖은 몸을 말리기엔 효과적이었다.
찬 피부에 온기가 닿자 얼결에 몸이 떨렸다.
그러자 아르베우타가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어깨 위로 와닿는 따스한 기운에 세실레는 무심코 안도의 숨을 흘렸다.
그러곤 그쪽으로 기대지 않기 위해 애쓰며 벽난로만 응시했다.
장작이 불티를 내며 타올랐다. 바깥에선 잔잔한 빗소리가 들렸다.
온기가 위안이 되었다.
‘이대로만 있으면 좋겠다.’
딱 이 정도의 거리. 이 정도의 여유.
이것만으로도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세실레는 벽난로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 위로 솜털 같은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숨이 멎을 정도로 뜨거운 감각이었다.
아주 잠시 닿은 것뿐인데도, 각인처럼 남은 감각이 세실레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세실레가 시선을 들어 올려 아르베우타를 보았다.
그러자 그가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마치 저가 무얼 했냐는 듯. 시치미 떼는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풋, 뭐 하는 거예요?”
“기운 차리시라고 그랬습니다. 제가 입 맞춰주는 걸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당돌한 말에 세실레가 시선을 피했다.
“……그럴 리가요.”
“빗줄기가 얇아졌는데요.”
그의 말대로 바깥에 내리는 빗소리가 확연히 줄었다.
자꾸만 제 마음을 반영하는 하늘에 세실레는 부끄러워 미칠 것 같았다.
“정말이지…….”
하지만 말이 더 이어지지 않았다.
무심코 남은 시간이 떠오른 탓이었다.
테르델을 물리치고 부모님이 회복하기까지.
제법 시간이 흘러, 이제 보름까진 열흘 남짓 남았다.
짧은 시간이었다. 그 시간 내로 방법을 찾지 못하면 테레사는 죽었다.
그 사실을 공고히 하듯, 루베르와 테레사는 근래 들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막 떠오른 사실에 더는 웃음이 나지 않았다.
그러자 아르베우타가 손을 뻗어 세실레의 뺨을 쓸었다.
“정말이지. 투정이 많으시다니까.”
“하지만.”
“실은, 찾았습니다.”
“……찾다니요?”
뜬금없는 말에 세실레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르베우타가 그녀를 마주 응시하며 말했다.
“신전 지하에 있는 여신상.”
“…….”
“그걸 부수면 당신은 돌아가지 않아도 됩니다.”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달콤한 속삭임이었으나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아르베우타는 그녀의 생각을 읽은 듯 뒷말을 덧붙였다.
“신상이 부서지면 테레사의 힘도 그녀에게 돌아갈 겁니다.”
“그렇게 되면……테레사도 죽지 않는 건가요?”
“그렇죠.”
세실레가 떨리는 손끝을 뻗어 아르베우타를 끌어안았다.
그녀가 품에 얼굴을 묻으며 속삭였다.
“세상에……. 정말, 너무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그러나 어째선지 아르베우타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마치 자신이 없는 것처럼.
***
신전 지하. 그곳으로 향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일전 테르델을 찾았을 때 본 것보단 조금 작은 구멍은 분명 강제로 낸 것이었다.
아마 힘으로 바닥을 반파해버린 듯했다.
그 아래로 내려가자 그가 말한 대로 여신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신전에 있는 무수한 여신상과 같은 모습이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거기선 피가 흘렀다.
비릿한 혈향, 그 안에서 피어오르는 신성력은 분명 테레사의 것이었다.
“이게, 도대체…….”
세실레는 당황한 표정으로 여신상을 보았다.
그녀가 여신상에 손을 뻗으려던 차, 아르베우타가 그녀의 손을 맞잡아 쥐었다.
어째선지 그의 손이 땀으로 가득 배었다. 꼭 긴장이라도 한 사람처럼.
“……잠깐.”
갈라진 목소리가 흘렀다.
그를 응시하던 세실레의 눈동자가 의아한 빛이 어렸다.
그러나 아르베우타는 답지 않게 대답을 망설이더니, 느리게 입을 뗐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가 순순히 뒤로 물러섰다.
세실레는 의아했으나 아르베우타의 다물린 입술은 열릴 줄을 몰랐다.
말을 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고민하던 세실레는 다시금 여신상 쪽으로 손을 뻗었다.
‘이걸 부수면 된다고 했지.’
여신상은 단단해 보였으나 별다른 결계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조금만 신력을 쏟으면 부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렇게나 귀한 것이 덩그러니 놓여있다니.
하물며 루베르와 테레사조차 보이지 않았다.
내내 그녀를 달로 데려가겠노라 말하던 이들이었다.
여신상 때문에 세실레가 달로 돌아가지 못하게 될 수도 있는데, 자리를 비운 것이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쉬이 포기할 애들이 아닌데.’
하지만 아르베우타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어쩔 수 없나.’
이게 마지막 방법이라면,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세실레는 고민을 마치고 여신상에 신성력을 불어 넣었다.
여신상은 세실레의 힘에 반응하여 크게 진동하더니, 마침내 깨졌다.
덩달아 흐르는 핏물이 어딘가로 증발되어 사라졌다.
테레사에게 힘이 돌아간 것이다.
그리고.
[세실레. 지상에 좀 다녀오련.]
기억.
[아, 저 그게……. 꽃에는 꿀이란 것이 있대서요.]
잊어버렸던 기억이.
[네 욕심으로 저 인간은 영영 소멸하겠구나. 가엾기도 하지.]
그토록 애써도 돌아오지 않던 기억이.
[자의가 아니면 달로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기억을 잃었을 땐, 누구도 절 달로 데려가지 못하게끔 해주세요.]
기억이 돌아왔다.
“……으.”
기억은 생각보다 더욱 역하고 저주받은 것이었다.
아름답고 찬란하기는커녕, 모르고 사는 것이 축복이었을 정도로 괴로운 것이었다.
그리고 세실레는 깨달았다.
이조차 세렌디의 철저한 계획하에 진행된 것임을.
‘왜 모든 게 순조롭다고 생각했을까.’
어째서 그런 순진한 생각을 한 것일까.
세실레는 눈물 젖은 눈으로 아르베우타를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이리되기를 예측했던 사람처럼 담담히 세실레를 부축했다.
***
SIDE STORY. 사라진 기억.
“세실레, 지상에 한 번 다녀오련.”
숨통 한 번 트여준 적 없는 세렌디의 권유였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달 밖을 벗어난 적 없는 세실레에겐 생소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세실레는 세렌디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네, 어머니.”
단조로운 명령에서 처음으로 받은 느낌은 설렘이었다.
‘어떤 곳이려나.’
어쩐지 두근대었다.
지상에는 인간도, 밤과 낮도, 바다와 땅도 있다고 했다.
먼발치서 보는 것과 직접 눈에 담는 건 분명 다를 터였다.
설렘이 그녀를 감쌌다.
그러나 세실레는 감정을 들킬까 두려워 황급히 낯을 굳혔다.
세렌디는 세실레가 무언갈 느끼고 즐거워하는 것을 몹시 못마땅히 여겼다.
그러나 세렌디는 세실레를 질책하지 않았다.
그것이 의아하다고 느끼면서도 세실레는 안도의 숨을 뱉었다.
이래저래, 질책받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
세실레가 처음 지상으로 내려온 곳은 호수였다.
그마저도 세렌디가 지정한 위치였지만, 세실레는 설렜다.
지상이었다. 세렌디의 눈이 그나마 덜 닿는 곳.
푸르고 맑은 호숫물, 지저귀는 새소리, 바람에 고요하게 흔들리는 나무와 흙내음까지.
모든 것이 그린 듯 완벽했다.
세실레는 처음으로 자유를 느꼈다.
그녀는 달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지상엔 신기한 게 많다던데…….’
세실레는 지상에 대해서도 많은 공부를 했다.
인간들의 습성, 자연의 섭리, 동물과 악령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공부만 한 것과 직접 눈으로 보고 듣는 것은 몹시 달랐다.
지상이 이토록 다채로운 색으로 이루어졌다는 것도, 생명력이란 것이 이렇게나 아름답다는 것도 직접 느껴보니 완전히 달랐다.
호숫가에 서 있을 뿐이지만 수많은 것들이 느껴졌다.
세실레는 눈을 감고 나무 등치에 몸을 기댔다. 이대로 백 년은 가만히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곁으로 새가 날아들었다. 주변을 맴돌던 악령은 모습을 감추었다.
“좋다.”
세실레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평생 여기 있고 싶어.”
그녀는 무심코 뱉은 말이 세렌디의 귀에 들어갔을까 싶어, 위를 흘깃 보았다.
하지만 어머니에게선 아무런 응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지상으로 내려가라길래 더욱 감시를 심하게 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무런 감시가 느껴지지 않았다.
“왜 내려가라 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