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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92화 (9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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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베우타와 디젤라의 힘의 근원은 땅이었다.

그렇기에 둘이 힘을 합치면 대지를 가르는 것도 가능했다.

물론 이론상이었고 아직 디젤라의 힘 다루는 능력이 미숙하기에 모든 건 미지수였다.

그러나 의외로 디젤라는 자신만만했다.

“나 할 수 있어! 아까 감 잡았어!”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가 주변의 나무를 쑥쑥 뽑아가며 지반이 약한 곳을 찾아내기 전까지는.

“여기다! 여기를 집중해서 공략하면 될 것 같아.”

디젤라는 열의에 불타올랐다.

가족을 공격한 테르델을 좀처럼 용서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건 세실레도 마찬가지였다.

아르베우타와 디젤라가 낫의 영향을 받지 않게끔 멀리 보낸 다음, 세실레는 디젤라가 말한 곳에 낫을 꽂아 넣었다.

디젤라의 말대로 이곳의 지반이 약해 보였다.

그리고 이 땅 아래에.

‘테르델이 숨어 있군.’

저택에 있던 귀족들을 모조리 집어삼키며 힘을 비축하는 중인지, 그는 꼼짝 않고 있었다.

‘우리가 땅을 가를 것이란 생각은 못 했겠지.’

테르델이 방심하는 이때가 기회였다.

세실레는 낫을 거두고는 아르베우타를 향해 말했다.

“둘이서 땅을 갈라줘요. ……가능하겠죠?”

땅을 가른다니. 쉽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이것이 최선이었다.

테르델이 방심한 틈을 타, 그가 회복하지 못하게끔 신력으로 둘러싸서 우주로 던져버리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지난번 보았던 테르델은 지상에서만 힘을 쓸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가능할지 미지수였다.

망설이는 그녀의 앞으로 아르베우타가 나섰다.

“가능은 하지만.”

당당한 얼굴과는 달리 말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의아해진 세실레가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대는 보지 않았으면 합니다.”

와중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민망하다는 듯, 그가 머리를 긁적였다.

의아해진 세실레가 그를 보며 물었다.

“……왜요?”

“그게…….”

“다른 모습을 해야 해서요?”

정확한 지적에 아르베우타가 낯을 굳혔다.

설마하니 그녀가 알고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다는 투였다.

이전에도 숨기려는 듯하기에 얼추 짐작했었다.

아르베우타가 그녀에게 변한 뒤의 모습을 숨기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하지만 애석하게도 세실레는 변신한 모습을 이미 봐버린 뒤였다.

‘혼잣말하던 것까지 들었는데.’

당시엔 우울감에 사로잡혀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없어서 다행이란 말도 변신했기 때문인 듯했다.

어째서 변한 모습을 그리 부끄러워하는지 모르겠으나 세실레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어차피 눈으로 보지 않아도 보였다.

세실레는 그 사실을 쏙 빼놓고서 몸을 돌렸다.

그러자 아르베우타가 단숨에 변하더니 성인 남자보다 큰 다리로 바닥을 짓눌렀다.

쾅-!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대지가 요동쳤다.

얼핏 느끼기에 땅이 휘어졌나 싶을 정도였다.

‘이건…… 생각보다 더 대단한데.’

그 또한 더는 테르델을 봐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덕택에 어마어마한 크기의 그림자가 그녀의 머리 위로 드리웠다.

각성자니 힘이니 잘 이해가 되지 않았건만, 이러니 조금 납득이 됐다.

지금 아르베우타의 몸에선 힘이 넘쳐흘렀다.

당장 세실레가 힘을 피워올려도 이길 수 있을지 미지수일 정도로.

“……대단한데요?”

세실레가 불쑥 고개를 들어 말했다.

동시에 사납게 치켜떠진 아몬드 모양의 눈매가 크게 뜨였다.

아르베우타가 동공을 좁히더니 서둘러 크기를 줄였다.

원래대로 돌아온 그를 보며, 세실레가 웃었다.

“발 구르기 한 번에 땅이 갈라지다니.”

“보, 보지 않겠다고.”

“실은 전에도 봤어요.”

“……도대체 언제.”

상심이 큰지 아르베우타의 입에서 희미한 중얼거림이 흘렀다.

하지만 세실레는 대답하는 대신, 아래를 들여다보았다.

마치 깨어날 준비를 하듯, 테르델이 몸을 둥글게 말고 있었다.

주변에 튄 핏자국에서 악령들이 스며 나왔다.

결코 달에 닿지 못할 오염된 영혼이었다.

한때, 황태후와 함께 무한한 광영을 누리던 귀족들의 영혼이 악령이 된 것이다.

흐느껴 우는 악령들 사이에 자리한 테르델을 바라보던 세실레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제 저걸 죽이면 되는 거군요.”

테르델을 향한 일말의 자비도 느껴지지 않는 스산한 목소리였다.

살기 위해 아귀처럼 인간을 먹어 치워 온 인간.

화려한 외양과는 달리 그 속에선 썩은 내가 풍겼다.

“다들 물러서세요.”

그녀의 말에 아르베우타가 디젤라를 데리고 멀찍이 이동했다.

그제야 세실레가 다시금 낫을 소환했다.

은빛의 빛무리가 요요하게 빛나며 진동했다.

세실레는 그대로 낫을 휘둘러 갈라진 틈 사이로 내리쳤다.

정확히 테르델의 심장 끝에 닿은 낫이 그를 반으로 갈랐다.

낫에서 새어 나온 연기는 테르델을 휘감아 도망갈 곳을 봉쇄했다.

세실레의 힘이 테르델을 둥글게 감싸 허공으로 끌고 나왔다.

그가 담긴 은빛의 구가 하늘 위로 둥실둥실 떠 올랐다.

지상에 닿으면 테르델은 어떤 식으로든 재생한다.

그렇다면 평생 지상에 닿을 일 없이 만들면 그만이었다.

구 안에서 칼바람이 일어 테르델의 힘을 계속해서 잘라냈다.

구는 점점 줄어들어 그가 육체를 만들 공간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세실레는 그대로 구를 저 멀리 밤하늘 위로 보내버렸다.

우주의 어딘가, 빛조차 먹어 치우는 먹구름이 구마저 삼킬 때까지 테르델은 저곳에서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살아갈 터였다.

“……끝인가.”

세실레는 멀찍이 사라지는 구를 한참이고 응시했다.

은빛의 구는 더 이상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세실레가 눈을 감고 보여도 감지하기 힘들 정도로 멀리멀리 사라졌다.

그러는 사이 아르베우타가 공작부부를 수습해 마차에 태웠다.

그런 다음 한참이고 하늘을 응시하는 세실레의 팔을 살짝 쥐었다.

“이제 궁으로 돌아가시죠.”

그제야 세실레의 입에서도 가느다란 한숨이 흘렀다.

“……좋아요.”

***

세실레의 의지로 공작부부는 황후궁에서 머물게 되었다.

극진한 보살핌과 귀한 약 덕에 공작부부는 차츰차츰 기력을 되찾았다.

거기에는 디젤라의 공이 컸다.

디젤라가 발현한 식물의 힘으로 약초의 비밀스러운 효능까지 사용할 수 있었던 덕택이었다.

덕분에 황궁 의원들은 작용과 부작용을 기존의 방법보다 더욱 쉬이 파악하여 체질에 맞는 약을 달여냈다.

그 일로 의원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의원들의 말을 떠올려보던 세실레가 디젤라를 돌아보며 말했다.

“네 힘은 참 쓸모가 많구나.”

세실레의 칭찬에 디젤라가 부끄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수줍음을 견디지 못한 볼가가 발갰다.

“뭐어……. 그냥 타고났지.”

주저하면서도 당당히 내뱉는 말에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간만에 가족들과 함께하는 자리였다.

어머니와 아버지, 디젤라 사이에 둘러앉은 세실레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맺혔다.

손에 들린 잔은 따스했고 창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은 선선했다.

창밖엔 여전히 부슬비가 내렸으나 전보단 한결 나았다.

세실레는 잠시간의 행복을 즐겼다.

그러나 내내 얼굴로 안절부절못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어머니의 것이었다.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지 한참을 망설이더니 겨우 입을 뗐다.

“저기……제가.”

“편히 말씀하셔도 돼요.”

“그렇지만……. 죄송합니다, 제가 어찌.”

그녀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대신 내내 입술만 꾹 물고 있던 공작이 입을 열었다.

“……황실에 누를 끼쳐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화목하던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저를 어색하게 여기는 부모님을 바라보던 세실레는 온기를 품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들은 그녀를 불편히 여기고 있었다.

그저 미안을 표하는 것 이상으로, 마치 상전을 대하듯 했다.

‘자리를 비켜주는 편이 낫겠어.’

세실레는 잔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부모님 또한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녀를 따라 일어났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세실레는 그대로 걸음을 뗐다.

그 뒤로 공작부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저기!”

세실레는 말없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공작부인은 한참을 머뭇거리기만 했다.

무슨 하기 힘든 말이라도 하려는 듯 손에 땀이 가득했다.

그를 가만 바라보고 있자니, 디젤라가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아! 미안하단 말을 못 해서 이러고 있어?”

“얘, 얘는? 무슨 말을 그렇게 버릇없게 해.”

“언니는 이렇게 말해주는 걸 좋아할 걸, 그렇지?”

디젤라의 물음에 공작부인이 화들짝 놀라선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여식이 교육을 못 받아서 주책을…….”

“악! 아파!”

“쉿, 조용히 못 해!”

공작부인이 디젤라의 머리를 내리눌렀다.

어서 너도 허리를 숙이라는 뜻이었다.

디젤라는 거기에 반발하며 발을 굴렀다.

그러자 공작이 엄한 눈으로 질책에 동조했다.

세실레는 그들을 바라보다 느리게 입을 열었다.

“……저는 정말로 괜찮아요. 그러니 쉬세요.”

“네, 네! 황후 폐하께서도 평안한 시간 보내십시오.”

세실레는 그 말에 답하지 않고 응접실을 나섰다.

뒤에선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무어라 꾸짖고 반항하는 소리였다.

세실레는 그것이 퍽 정답다 여겼다.

걸을수록 그 소리는 점점 잦아들었다.

대신 빗소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세실레는 테라스로 가 비 내리는 바깥을 바라보았다.

호수로 빗방울이 쉼 없이 떨어졌다.

내내 내린 비 덕에 호숫물이 넘치기 직전이었다.

세실레는 흘러넘칠 듯 말 듯 한 호수를 바라보았다.

그 뒤로 따라 나왔는지 디젤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엄마는 언니만 챙기고. 완전 짜증 나.”

“…….”

“언닌 거기서 뭐 해?”

“……그냥, 구경.”

“치, 부럽다. 언니는 맘대로 해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하고.”

“……그런가.”

“그래. 엄만 맨날 나보고 뭐라고 해. 사과 하나 제대로 못 하면서, 안 그래?”

디젤라는 진심으로 화가 난 듯 보였다.

그런데 어째서 그것마저도 부러운지.

세실레의 입에서 무심코 말이 흘렀다.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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