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91화 (91/110)

91

세실레는 잠시 제 귀를 의심했다.

없어서 다행이라니. 스치듯 듣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그러나 세실레는 곧 마음을 다잡곤 고개를 저었다.

‘다른 이유가 있겠지.’

아르베우타가 아무런 이유 없이 그런 말을 했을 리 없었다.

그래야만 했다.

아르베우타마저 그녀를 외면한다면, 정말로 버틸 수 없을 테니까.

세실레는 힘주어 주먹을 쥐어 버텼다.

그러나 그녀의 노력과는 달리 그새 빗줄기가 굵어졌다.

이래선 안 됐다. 도움이 되지는 못할지언정 방해만 돼선 안 되는데.

초조해하던 세실레는 이내 입술을 꾹 물었다.

기분을 환기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괜찮아.”

세실레가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희미하게 흘러나온 음성은 금방 빗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하지만 세실레는 계속해서 자신을 다독였다.

마치 최면이라도 걸듯이.

“괜찮아. 아무 일도 아닐 거야. 그냥, 조금만 더 기다리면……, 그러면 돼.”

세실레가 두 손으로 머리칼을 그러쥐었다.

웅크린 몸이 여리게 떨렸다.

그녀의 눈으로 자꾸만 아르베우타의 모습이 보였다.

보기 싫어도 보게 되었다.

세실레는 무심결에 그의 흔적을 좇았다.

더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모르고 싶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그의 모습이 보였다.

세실레는 초조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만 보고 싶은데, 그만둘 수가 없었다.

강제로 펼쳐지는 장면은 눈을 감아도 떠도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바닥에 쓰러진 시신을 보고서야, 세실레는 숨을 집어삼켰다.

발을 적시는 붉은 선혈, 비릿한 혈향, 창백하게 질린 안색까지.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입을 벌리고 죽은 이는 그녀의 아버지였다.

“이, 이게 무슨…….”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목에 무언가가 턱 걸려버린 것만 같았다.

세실레는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지 않으면 꼴사나운 소리를 뱉어낼 것만 같았기에.

그러나 기어코 새는 흐느낌만은 막을 수 없었다.

“어, 떻게 이런 일이.”

아버지와 좋은 기억은 없었다.

그와는 언제고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해왔다.

세실레가 죽은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장례식장에서 죽은 그녀를 원망하기까지 했었다.

그런 그를 기억하고 있는 세실레로서는 영 아버지에게 정을 붙일 수 없었다.

하지만 사이가 어떠했든 간에, 싸늘한 주검으로 마주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죽었다. 사람이 죽었다.

테레사도 죽는다고 했다.

하나둘, 그녀의 곁을 떠나고 있었다.

홀로 남았단 생각에 외로움이 사무쳤다.

“으……, 싫어.”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더는 아무도 잃고 싶지 않았다.

“날 떠나지 마…….”

혼란스러워하는 세실레에게로 디젤라가 다가왔다.

“……언니?”

“…….”

“언니, 괜찮은 거야?”

디젤라가 왜 그러냐는 듯 의아한 눈을 했다.

디젤라 쪽으로 고개를 돌린 세실레의 눈동자가 세게 흔들렸다.

디젤라가 곁에 있다는 것에서 오는 안도감과 동시에 아버지 소식을 전해야 한다는 슬픔이 그녀를 휘감았다.

세실레가 디젤라를 바라보며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차게 식은 뺨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마른 장작에 불씨를 던진 듯 확 치솟아 오른 열기에 목이 멨다.

무어라 말을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세실레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당치 못하다가 멍하니 굳어있는 디젤라의 옷을 잡아당겼다.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디젤라가 주춤 뒤로 물러섰다.

디젤라의 목소리가 세실레와 마찬가지로 떨렸다.

“뭐, 뭐라고 했어?”

“……아버지가…….”

“지금 어디 계신 데!”

세실레는 말없이 디젤라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의 몸을 찬란한 은빛 무리가 휘감았다.

순식간에 그들은 공작이 쓰러진 곳으로 이동했다.

그곳엔 공작이 길가에 피를 흘린 채 너부러져 있었다.

처참한 광경을 발견한 디젤라가 두 손으로 입을 가로막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입에서 희미한 음성이 샜다.

“……마, 말도 안 돼.”

납득할 수 없었다.

멀쩡히 저택에 갇혀 지내던 아버지가 왜 바깥에 나와 주검인 채로 발견된단 말인가.

믿기지 않았다.

닮은 사람인 것이 분명했다.

디젤라는 현실을 부정하듯 도리질 쳤다.

그 옆에 선 세실레도 말없이 시신만 바라보았다.

그들의 위로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한 비바람이 일었다.

건장한 남성조차 제대로 서 있기 힘들 정도로 거센 바람에 몸이 휘청였다.

그러나 세실레는 그렇게 비가 내리고 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죽은 눈으로 시신을 바라보며 중얼거릴 뿐이었다.

“……기분을 좋게 유지…….”

그게 가능한 일일까.

세실레가 눈을 질끈 감았다.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할 겨를도 없다는 말이 맞았다.

먼발치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않았다면.

“그, 그만둬-!”

흠칫, 세실레가 낯을 굳혔다.

곁에 서 있던 디젤라는 듣지 못한 듯, 그녀는 바닥에 엎드려 죽은 아버지의 시체를 흔들었다.

디젤라를 버려두고 세실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걸었다.

그곳에선 아르베우타의 기척과 테르델의 기척이 느껴졌다.

“……저곳이구나.”

저기에 아버지를 이렇게 만든 사람이 있었다.

테르델이었다. 그가 아버지를 죽였다.

세실레는 가라앉은 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뒤로 은빛의 투명한 낫이 그려졌다.

초승달을 닮은 낫은 달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어둑하던 사위가 순식간에 밝아졌다.

덕택에 저택에서 공작부인의 목을 틀어쥐고 협박하던 테르델도 그를 견제하던 아르베우타도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세실레의 뒤에 자리한 은빛의 낫을 발견한 테르델의 입가가 비틀렸다.

“……그때와 같은 무기로군.”

저것은 기억을 잃기 전 세실레가 테르델을 베기 위해 꺼내든 정화의 낫이었다.

신력으로 가득한 낫은 신을 거부하는 모든 것을 처단했다.

테르델이나 각성자는 저 낫에 조금만 닿아도 치명상을 입었다.

그건 디젤라나 아르베우타도 마찬가지였다.

저 낫은 그런 것이었다.

고고한 척, 위대한 척은 다 하는 신을 위한 무기.

각성자들을 모조리 베어 넘기겠다는 의지로 만들어진 무기.

하지만 기억을 잃은 세실레는 그러한 사실을 조금도 몰랐다.

그저 몸이 기억하는 대로 무기를 꺼내 들었겠지.

가차 없이 테르델을 베었을 때처럼.

테르델의 유혹하듯 속삭였다.

“그래, 그 무기로 또 나를 베어 봐.”

테르델은 이 땅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죽지 않았다.

그러나 두 명의 각성자는 아니었다.

그들은 죽는다.

게다가 아르베우타는 이미 영혼이 조각조각 난 상태이지 않나.

무기에 스치기만 해도 그의 영혼은 바스러질 터였다.

세실레가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땐, 아르베우타는 이미 손쓸 수 없이 망가질 테지.

테르델은 몹시도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공작부인의 목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녀의 밑으로 창백한 안색을 한 황태후 파 귀족들이 거머리처럼 몰려들었다.

벌레처럼 우글대는 귀족들은 공작부인 또한 그들처럼 만들고 싶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세실레의 눈에도 오직 그것만이 보였다.

그래서 세실레는 낫을 휘두르려 했다.

아르베우타가 뛰어들어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면.

“그만둬!”

“…….”

“그만두십시오.”

그가 세실레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거칠게 뛰는 심장 소리에 얼어붙었던 생각이 차츰차츰 돌아왔다.

세실레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손에서 힘이 빠지며 낫이 손바닥을 스쳐 지나갔다.

낫은 바닥에 부딪히기 전에 허공으로 사라져 흩어졌다.

은빛의 힘이 흩어졌다.

신력에 반응한 저택에서 괴이한 신음이 흘렀다.

절규와 원망, 원한으로 가득한 울음에 세실레는 눈을 홉떴다.

그 위로 따뜻한 온기가 찾아들었다.

아르베우타였다. 그가 그녀와 이마를 맞대어 시야를 가렸다.

입술 위로 스치듯 오가는 움직임이 간질거렸다.

“……보지 마십시오.”

그제야 세실레가 느리게 주변을 훑었다.

그새 테르델은 사라졌고 저택을 메우던 신음 또한 자취를 감췄다.

그들의 손에 잡혀 있던 어머니는 정신을 잃은 채 바닥으로 너부러졌다.

다행히 잠시 정신을 잃었을 뿐인 듯 큰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의 안전을 확인하고서야 정신이 차츰차츰 돌아왔다.

세실레가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또, 내가, 방해를…….”

“쉬잇.”

세실레가 입술을 물었다.

아르베우타가 세실레의 입술을 힘주어 눌렀다.

대신 손으로 다른 쪽을 가리켰다.

공작의 시신이 있는 쪽이었다.

죽은 줄 알았던 그의 가슴팍이 느리게 오갔다.

희미한 숨소리를 눈치챈 세실레가 급히 숨을 들이켰다.

“……아버지!”

그녀는 아버지 앞에 주저앉았다.

아버지의 주변으로 흩어졌던 은색의 힘이 어른거렸다.

힘이 머리 주변에 모여 있었다. 마치 상처를 치유하려는 듯이.

뒤늦게 그 사실을 눈치챈 디젤라도 뒤로 주저앉았다.

“다, 다행이다…….”

디젤라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붉게 달아오른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흘렀다.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이 빗물에 섞여 대지를 적셨다.

그 주변으로 새싹이 피어올랐다.

각성자로서 발현한 힘이 디젤라의 감정에 반응했다.

땅에서 피어오른 싹이 공작 주변을 둘러쌌다.

그럴수록 공작의 호흡에도 더욱 힘이 실렸다.

마침내 머리에서 흐르던 피가 멎자 공작이 숨을 천천히 들이켰다.

그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

잠시 잠들었을 뿐, 큰 고비는 넘긴 듯 보였다.

아버지의 뺨에 도는 혈색을 보고서야 세실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르델을 쫓을 생각이었다.

바로 지하에서 쥐새끼처럼 도망가는 그가 느껴졌으니까.

세실레가 아르베우타를 돌아보았다.

그 또한 테르델의 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땅을 가를 수 있어요?”

빛이 닿지 않는 땅 아래는 세실레가 손 쓰기 어려운 곳이었다.

하지만 아르베우타와 디젤라는 달랐다.

각성자의 힘의 근원은 땅이었다.

아르베우타가 디젤라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방금의 일로 자신의 힘에 용기를 얻은 디젤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뭔데? 내가 도울 일 있으면 말만 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