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90화 (90/110)

90

“무, 무슨.”

부인이 무어라 말을 잇기도 전에 테르델이 마부에게 속삭였다.

“가자. 목적지가 코앞이구나.”

“……네.”

마부가 재차 마차를 끌었다. 테르델 또한 말을 타고 앞으로 나섰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무슨 짓을 벌이려고.”

부인의 입에서 희미한 음성이 샜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테르델이 말했다.

“그대들은 미끼가 되어주어야겠소.”

“……미끼?”

“내가 그대의 딸을 지극히 원하고 있거든.”

소름 끼치는 웃음이 귓가를 맴돌았다.

웃음소리가 어찌나 큰지 바깥의 빗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이상해도 단단히 이상했다.

조금 전 대공이 쓰던 힘도, 기이하리만치 우렁찬 목소리도.

분명 마법 따위의 묘연한 수를 쓰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달리 벗어날 방법이 있을까.

없을 것이다. 그녀의 머릿속에 조금 전 몽롱하던 마부의 눈동자가 그려졌다.

‘내 딸을 원한다고.’

그렇다면 그가 한 모든 말은 거짓이었단 뜻인가.

곰곰이 생각을 되짚던 부인이 입술을 악물었다.

그러곤 불쑥 창문으로 손을 뻗어, 달리는 마차의 잠금을 풀었다.

바깥 잠금도 안의 잠금도 모조리 풀자, 순식간에 마차 문이 덜컹거리며 열렸다.

달리는 마차 안으로 비바람이 몰아쳤다.

“부인! 무슨 짓입니까.”

공작이 희게 질려선 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돌아보는 대신, 앞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그러곤 여전히 웃음을 터트리는 테르델을 향해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 멈추지 않으면 뛰어내릴 겁니다.”

“……마음대로. 생각해보니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테르델이 탄 말이 차차 속도를 늦추었다.

얼마 가지 않아 그는 마차 옆에 섰다. 그가 위태롭게 지탱하고 선, 공작 부인에게로 손을 뻗었다.

비쩍 마른 중년의 여인은 조금만 힘을 주어도 바닥으로 나동그라질 정도로 약해 보였다.

번거롭게 피를 흘리지 않아도, 마른 목을 한 손으로 쥐어 비틀면 생을 마감하리라.

온전한 시체를 세실레에게 선물로 보내는 것도 좋겠다.

어미는 죽이고 아비는 미치게 만들면, 제아무리 세실레라 해도 견디지 못하고 정신을 놔버리겠지.

테르델의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온몸에 전율이 일 정도로 즐거운 상상이었다. 세실레가 저와 같은 나락에 발을 담그는 것은.

테르델이 부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 원하는 대로 죽여주지.”

테르델의 손이 공작부인의 가느다란 목을 움켜쥐었다.

공작부인은 희게 질려선 앞으로 손을 내뻗었다.

그녀의 허리를 공작이 잡아챘다.

공작이 덜덜 입술을 떨며 말했다.

“왜, 왜 이러십니까. 우리가 무얼 했다고.”

“글쎄, 원래 죽음엔 이유가 없는 법이지.”

테르델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맺혔다.

그는 손에 더욱 힘을 주어 부인의 목을 움켜쥐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악력에 부인은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

바둥대는 두 손이 힘없이 테르델의 팔뚝을 할퀴었다.

여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보다도 못한 힘이었다.

“간지럽지도 않군.”

그리도 죽음을 바라더니, 진짜 죽음을 앞에 두고선 이리 반항하는가.

“그러게 내 앞에서 죽음이란 말을 쉬이 꺼내지 말았어야지.”

자비 없는 손아귀에 더욱 힘이 실렸다.

목이 졸려 죽기도 전에 목뼈가 비틀려 부러지려 했다.

부인의 다리가 붕 떠 마차 밖으로 나왔다. 게다가 마차는 여전히 달리는 중이었다.

이대로 테르델이 손을 놔도, 부인은 바닥에 내쳐져 죽을 터였다.

코앞으로 마주한 죽음 앞에서 부인이 눈을 홉떴다.

그녀가 초인적인 힘으로 더듬더듬 말했다.

“내, 내 아이들, 건, 드리지……크흡.”

부인의 입에 흰 거품이 맺혔다.

사지가 잘게 경련하더니 이내 힘이 완전히 빠졌다.

그제야 망설이던 공작이 그녀의 몸을 크게 붙들며 소리쳤다.

“아, 안돼! 안 된다고!”

그러나 공작부인은 이제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옅게 흔들리는 속눈썹만이 반응하는 것의 전부였다.

그녀의 흰자위를 바라보던 공작이 품에 찬 검을 빼 들었다.

장식용 검이었다. 게다가 공작은 제대로 검을 잡아본 적이 십수 년 전이었다.

당연히 달리는 마차 안에서 쉬이 중심을 잡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공작이 몸을 비틀거리며 테르델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테르델은 몸을 휘어 가뿐히 공작의 검을 피했다.

발을 헛디딘 공작이 마차 밖으로 퉁겨지며 바닥을 굴렀다.

그대로 돌부리에 머리를 박은 공작의 머리에서 선혈이 흘렀다.

테르델은 공작부인을 마차 안으로 내던진 다음 공작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에 맞춰 달리던 마차도 서서히 멈췄다.

“쯧.”

테르델이 혀를 찼다.

제법 날카로운 돌부리에 걸린 탓에 상태가 중해 보였다.

치료한다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르나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다.

“……여자는 아직 살아있었지.”

한 명이면 충분했다.

귀찮은 짐을 두 개나 달고 다닐 필요는 없으니.

테르델은 마차로 가까이 다가갔다.

다행히 공작부인의 숨은 미약하나마 붙어 있었다.

그는 그녀를 들쳐업고 저택으로 향했다.

저택은 슬픔과 절망으로 넘쳐흘렀다.

고통으로 몸부림치고 있을 귀족들은 단단히 세실레를 원망하고 있을 터였다.

그들의 증오가 테르델의 힘이 되어줄 예정이었다.

***

아르베우타는 공작 부부의 기척을 좇았다.

그의 뒤를 최정예 기사 몇이 따랐다.

번쩍거리는 황금빛 기사 복에 주춤대던 이들은 마차의 향방을 묻는 질문에 겁에 질려선 대답했다.

문제라면, 목격자의 증언이 죄다 다르다는 것이었다.

“오른쪽으로 갔습니다.”

“시장 입구 쪽이지 않았나?”

“시장 입구라니? 황성 쪽으로 향한 것 같은데?”

서로 다 다른 말에 정보를 묻던 기사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말에 타고 있던 아르베우타가 잠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코끝으로 비릿한 혈향이 느껴졌다.

‘어디선가 맡아본 것 같은데.’

인상을 찌푸리던 그가 안색을 굳혔다.

오래되어 잘 기억나진 않으나 공작의 냄새인 것 같다.

공작 냄새가 여기까지 흘러들어올 정도면, 피를 상당히 흘린 모양이었다.

게다가 계속 비가 내려, 자꾸만 냄새가 지워졌다.

아르베우타가 곧장 말머리를 돌렸다.

그러자 말에서 내려 수소문하던 기사들도 곧장 말에 올라탔다.

그들은 한달음에 아르베우타를 따라 달려갔다.

얼마 가지 않아 아르베우타는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샜다.

“느려.”

그는 거침없이 본 모습을 드러내었다.

순식간에 입고 있던 옷이 찢어지고 울룩불룩한 근육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모습을 목격한 이들의 입에서 기함이 터졌다.

하지만 뒤를 쫓던 기사들만큼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도리어 침착한 표정으로 상체를 더욱 숙이며 말을 재촉했다.

아르베우타는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나아갔다.

말을 탔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였다.

주위의 사물이 흐릿하게 보였으나 날카로이 찢어진 동공은 순식간에 사물을 판정했고 예리한 코는 빗물 속에 번지는 피 냄새를 바로 잡아냈다.

기실 그런 것이 없어도 아르베우타는 그들이 어디로 향했는지 짐작했다.

일전 황태후 파의 귀족들을 가둬놓았던 저택이다.

테르델이 공작 부부를 그리로 유인한 것이 틀림없었다.

“마지막 발악을 하는군.”

가만히 있었으면 목숨이라도 건졌을 텐데.

그가 날카로운 이를 드러냈다.

“……세실레가 없어서 다행이야.”

세실레 앞에선 짐승의 모습을 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 부끄러웠다.

무엇보다도 그는 테르델을 갈기갈기 찢어발길 생각이었다.

조각조각 내서 더는 재생하지 못하게끔 먹어 치울 예정이었다.

퍽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닐 테니, 보지 않는 것이 나았다.

여러모로.

***

세실레는 무릎 속에 얼굴을 묻었다.

아르베우타가 사라지니 자꾸만 불안한 생각들이 밀려들었다.

이렇게 시간을 허비해도 되나 싶어 괴로웠다.

루베르와 테레사마저 자신을 떠나버린 것 같아 외로웠다.

곁엔 아르베우타 또한 없었다.

잠시간 떠난 것임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그녀가 벌인 일을 처리하러 갔다.

그러니 최대한 좋은 기분을 유지해야만 했다.

“……그래야 아르베우타에게 도움이 될 텐데.”

하지만 그게 영 쉽지 않았다.

멍하니 중얼대던 세실레가 창밖으로 손을 뻗었다.

아주 조금 가느다래진 빗줄기가 여전히 굵었다.

그러던 차에 차차 해가 지고 있었다.

밤이 되면 달이 떠오른다.

그 뜻은 보름 중 하루가 지나간다는 뜻이었고 더불어 세실레의 힘이 강해진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오목하게 모습을 드러낸 달을 바라보다, 무심코 아르베우타의 자취를 좇았다.

그가 뿜어내는 기척이 몹시도 강하기에, 아르베우타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는 들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사람도 건물도 없는 외진 곳이었다. 그 뒤를 황궁 기사들이 따랐다.

짐승의 모습을 한 아르베우타는 상당히 거대했으나 어쩐지 귀여웠다.

‘언젠가 저 모습을 본 것 같은데.’

기억을 되짚던 세실레는 그녀가 황궁을 떠나, 폐 신전 터에서 살 때 아르베우타를 보았던 걸 떠올렸다.

당시엔 그가 어찌나 밉고 싫었던지. 황궁으로 돌아가는 것조차 목줄을 멘 기분이라 괴로웠다.

과거를 되짚던 세실레의 입가에 여린 웃음이 맺혔다.

‘그런 일도 있었지.’

세실레는 무심코 웃었다.

그땐 지겹게도 싫었는데 지금은 그가 너무 좋았다.

너무 사랑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멀리서도 그의 자취를 좇게 되었고 시선을 마주하면 저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졌다.

살갗이 닿으면 심장이 크게 내리박히다가 위로 솟았다. 떨리고 설렜다.

아르베우타가 없이 살았던 시절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가 좋았다.

미칠 듯이.

그런데 이제 끝이라니.

‘테레사는, 아니, 나는 어쩌면 좋지?’

세실레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제 무릎을 더욱 힘주어 끌어당겼다.

그러곤 동아줄을 붙잡듯 아르베우타가 하는 양만 계속해서 바라봤다.

모든 오감을 집중하자, 그가 느끼는 것이 세실레에게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근육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 귀로 스치는 바람 소리.

그리고.

“……세실레가 없어서 다행이야.”

그가 하는 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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