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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89화 (89/110)

89

기척을 알아차린 아르베우타의 입에서 안도의 숨이 흘렀다.

“……세실레. 어디에 있었습니까.”

하지만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가벼운 드레스 차림으로 빗물에 흠뻑 젖은 세실레의 눈동자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바짝 달라붙은 천에 몸의 실루엣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데도 그녀는 비를 피하지 않았다.

아르베우타는 비틀거리며 제게 걸어오는 세실레를 조심스레 안아 들었다.

거리낌 없이 그의 품에 안겨든 세실레가 힘없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테레사가.”

세실레가 입술을 달싹이다, 괴로운 듯 입을 다물어버렸다.

아르베우타가 가볍게 그녀의 이마를 쓸며 중얼거렸다.

“말씀하십시오.”

아르베우타가 낯을 굳혔다. 이어질 말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예상했던 말이 세실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테레사가 죽는데요. 내가 무슨 선택을 해도.”

세실레의 눈이 바짝 말라 있었다.

장대비에 젖은 눈가와 뺨만이 엉망으로 젖었다.

그녀는 마치 끈 떨어진 인형 같았다.

여기서 조금의 충격만 가하면 마지막으로 쥐고 있던 이성의 끈마저 놓아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것이 세렌디와 다른 이들이 원하는 것이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아르베우타는 그녀를 놓아줄 수 없었고 결코 달로 돌려보낼 생각도 없었다.

고민하던 아르베우타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빗물에 젖은 긴 은색의 속눈썹이 나풀거리며 그를 향했다.

기운 없는 시선에 찰나 의아함이 깃들었다.

그를 확인한 아르베우타가 자그마한 사죄의 말을 뱉었다.

“……기운 내시란 의미로 하는 겁니다.”

그는 세실레가 무슨 뜻이냐 물어볼 틈도 없이 입을 맞추었다.

달싹이던 여린 입술이 그의 입술에 짓눌려 뭉개졌다.

아르베우타는 흐린 숨을 뱉는 입술 새로 제 혀를 집어넣곤 진득하게 안을 훑었다.

그러곤 늘어지는 몸을 단단히 받쳐 들었다.

잡아먹힐 것 같을 정도로 날 것의 움직임이었다.

아르베우타는 움찔거리는 혀를 낚아채고 얽고 핥았다.

입천장과 치열을 진득하게 훑고 가빠진 숨마저 모조리 앗았다.

처음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잊을 정도로 그가 뜨거운 입안을 거침없이 농락했다.

“흐……읏.”

희미한 신음이 흘렀다. 그제야 몽롱하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왔다.

아르베우타가 시선을 들어 세실레를 살폈다.

이전보단 한결 정신을 차린 듯 보였다.

하지만 비에 젖은 몸이 여전히 차가웠다.

아르베우타는 뒤로 물러나 젖은 세실레의 위로 망토를 벗어 덮어주었다.

그러는 동안 세실레는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제 머리 위로 내려앉는 온기에 겨우 정신을 차리곤 얼굴을 확 붉혔다.

“무, 무슨.”

아르베우타가 당황치 않고 부드러이 말을 받았다.

“드디어 정신 차리셨군요.”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하지만 여전히 비가 멎지 않았으니, 이걸 어쩐다.”

아르베우타가 세실레의 뺨을 조심스레 쓸었다.

짓궂은 웃음에 세실레가 시선을 피하며 급히 말했다.

“이, 이럴 때가 아닌데…….”

“매번 그런 말을 하시는군요.”

“하지만.”

세실레가 똑바른 눈으로 아르베우타를 쳐다보았다.

엄한 눈빛에 아르베우타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럴 때가 아니죠. 마침 당신을 찾고 있었습니다.”

“……저는.”

세실레가 고개를 숙였다.

잠시 기습 키스에 잊고 있었지만, 그녀는 조금 전만 해도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테레사의 죽음. 어떠한 선택을 해도 테레사는 죽는다.

혼란스러운 사실을 상기한 세실레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 위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를 그쳐주십시오.”

“……할 수 없어요.”

“할 수 없어도 하셔야 합니다.”

세실레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르베우타는 세실레의 창백한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러곤 힘없는 푸른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그러지 않으면 더 슬프게 울 테니까.”

“……그게 무슨 말이죠?”

아르베우타가 아프게 웃으며 말했다.

“테르델이 회복한 것 같습니다.”

“……테르델이. 설마 나 때문에?”

세실레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질척해진 대지에 닿아 있었다.

빗물이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멍한 머리로도 제국의 여름에 이렇듯 장대비가 쏟아지는 것이 정상적이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실레는 허공으로 손을 들었다.

그녀의 손바닥으로 빗물이 투둑투둑 떨어졌다.

“나 때문에 비가 내리는구나.”

세실레는 눈을 감아 내렸다.

그녀가 내린 비였다. 이 비엔 슬픔과 좌절이 덕지덕지 묻어났다.

테르델은 이 슬픔을 먹고 회복한 모양이었다.

“아…….”

충격받은 듯 눈썹이 어그러지며 아래로 휘었다.

아르베우타가 늘어진 세실레의 손을 잡아 올리며 손등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손등에 번지는 뜨거운 입김에 세실레가 움찔 몸을 떨었다.

“또 우시는군요.”

“……하지만.”

“저랑 약속해주십시오. 지금보다 빗줄기가 더 거세지게 하지는 않겠다고.”

진중한 목소리에 세실레가 느리지만 똑바른 말투로 물었다.

“……급한 일이 있군요.”

“금방 돌아올 겁니다.”

아르베우타의 눈빛이 진지했다.

세실레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다 못 내킨 듯 고개를 저었다.

테르델을 홀로 상대할 아르베우타를 상상하니 영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세실레가 망설이자 아르베우타가 그녀의 어깨를 지그시 내리누르며 속삭였다.

“여기 계십시오.”

“……어째서. 테르델을 상대하려면 도움이 필요한 거 아니었나요?”

“아뇨. 당신은 이곳에서 기분을 좋게 하는 데만 집중하세요. 그게 더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렇군요.”

꼭 짐이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반박할 수도 없었다. 아르베우타의 말대로였다.

그의 말대로 가서도 큰 도움이 되진 않으리라.

도리어 방해만 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이렇듯 바보처럼 구는 자신에게 스스로조차 넌덜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빗물이 더욱 거세어졌다. 여름의 습한 공기가 걷히고 서늘한 비바람이 들어찼다.

그것을 마주하던 아르베우타가 진중한 눈으로 세실레를 돌아보았다.

“보십시오. 지금 세상이 이렇게나 당신에게 반응하고 있습니다.”

“…….”

“당신이 내뱉는 숨결, 하는 생각 하나하나가 지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께서 하시는 일은 그 무엇도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호소하듯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세실레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못 내킨듯한 표정에 아르베우타가 무릎을 굽혀 그녀를 끌어안았다.

무심결에 안긴 세실레가 눈을 크게 떴다.

그 위로 나직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곧장 걸음을 뗐다.

순식간에 텅 빈 품에 세실레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찰나의 온기에 가슴이 뛰었다. 착실히 박동하는 심장에 서서히 빗줄기도 얇아졌다.

세실레는 허공을 맴도는 온기를 꽉 그러쥐었다.

이 감정을 유지할 생각이었다. 적어도 그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

별장은 황태후 파의 귀족들을 전염병 취급하며 모아놓은 저택이었다.

몰락한 귀족의 저택을 몰수해서 사방에 철창을 두르고 병사들로 하여금 지키게 했다.

정돈되지 않은 정원에 잡초가 무릎 높이까지 올라와 흐늘거렸다.

비가 오는 탓에 저택은 더욱 우중충한 분위기였다.

멀리서 봐도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마차에 탄 공작 부부는 어리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빼 주변을 둘러봤다.

경계가 일반적인 별장답지 않게 삼엄했으나 그들에겐 꽤 낯익은 광경이었다.

그러나 저택은 별장이란 이름을 붙이기엔 척 보기에도 으스스했다.

‘또 이런 취급이로군.’

공작부인의 낯이 서늘하게 질렸다.

그제야 분위기를 눈치챈 공작 또한 얼굴을 굳혔다.

“……하지만, 이건 말한 것과 다른 것 같은데.”

공작부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결연하기까지 했다.

어렴풋이 공작의 말을 들은 테르델이 드러내놓고 코웃음 쳤다.

“그대들에게 잘 어울리는 별장이 아닌가.”

“……뭐라고 하셨습니까.”

“주제를 알아야지.”

테르델은 제대로 답하지 않고 말의 배를 걷어찼다.

덩달아 말이 요란하게 앞발을 들곤 질주하며 나아갔다.

덩달아 소란을 눈치챈 병사들이 테르델 일행을 발견하곤 경계를 곧추세웠다.

테르델은 그들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힘이 넘쳐흘렀다. 지금이라면 그 무엇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는 거침없이 손을 내저었다. 동시에 땅이 요란하게 진동하더니 병사들이 힘없이 고꾸라졌다.

“아, 아니!”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공작이 눈을 부릅떴다.

그 모습을 똑똑히 목격한 공작부인의 눈에도 의아함이 서렸다.

“……어째서?”

황명을 받아 별장으로 데리고 왔다면서, 별장을 지키는 병사들의 목을 베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무언갈 해결하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마차는 쉼 없이 달리고 있었고 일행은 점점 저택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부! 마부, 멈춰 서게!”

마부는 공작부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바깥의 빗소리가 요란했다. 부인이 무어라 입을 떼려던 차, 마차가 크게 휘청였다.

공작이 부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부인, 조심하시오.”

그의 말에 부인이 와락 소리쳤다.

“지금 한가한 소리나 할 때입니까? 어째서 대공이 병사들을 쓰러뜨렸는지, 무슨 수를 쓴 건지, 수상한 게 한둘이 아닙니다.”

“……그, 그렇지만 어차피 달리 방법도 없고.”

공작은 이미 체념한 기색이었다.

그를 가만 내려다보던 부인이 거칠게 그를 밀어냈다.

“됐습니다. 마부! 마차를 멈추게!”

쩌렁쩌렁한 고성에 그제야 마차의 속도가 줄었다.

빗물에 흠뻑 젖은 마부의 눈동자가 어째선지 몽롱했다.

꼭 술에 취한 자의 것 같았다.

흐릿한 눈동자를 마주한 부인이 몸을 굳혔다.

그 사이 마차가 멈췄다. 멈춘 마차의 창 앞으로 테르델이 모습을 드러냈다.

즐거운 듯 그의 입가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이제야 눈치챘습니까.”

그의 눈동자에 명백한 조롱이 깃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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