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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오랜 기간 유폐되어 살았다고는 하지만 아주 어린 시절 배운 기본 지식마저 잊은 것은 아니었다.
파리한 공작의 낯을 바라보던 부인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
“뭔가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이번만 제 말을 믿어주세요. 거기!”
부인이 마부를 불러 세웠다.
그녀는 의아해하는 마부를 바라보며 엄격한 얼굴로 말했다.
“방향을 다시 틀게. 다시 황궁으로 가야겠어.”
“……네?”
“가서 황후 폐하를 뵙고 다시 이동하겠네. 아무리 황실이 번잡하다 해도 두 사람 몸 들일 곳 없을까.”
마부가 망설였다.
막 기사의 말을 탄 대공 또한 의아하다는 낯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에 마차에 탄 모두가 몸을 사렸다.
누가 보기에도 이 무리의 권력은 대공에게 몰려 있었다.
섣불리 마차의 방향을 바꾸었다간 후에 큰일을 당할 수도 있었다.
기이한 압박감에 마부가 망설였다.
그러자 공작부인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 부인!”
공작이 말렸으나 소용없었다.
그녀는 마차의 계단을 밟고 내려섰다.
하필이면 비가 내리는 탓에 그녀의 치맛자락이 진득한 구정물에 물들었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황궁까지는 코앞이었다. 고작 저 거리를 못 걸어,
마차를 타야만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싫으면 두 분이서 가십시오. 저는 갈 겁니다.”
공작부인이 거침없이 흙탕물을 밟았다.
스무 해가 넘고서야 자의로 디딘 걸음이었다.
“부인…….”
공작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부인을 붙잡기엔 대공의 눈치가 보인 탓이다.
그가 망설이는 사이, 테르델이 말에서 내려섰다.
그는 여유롭게 부인의 앞으로 다가섰다.
순식간에 다가온 장신의 남자에 그녀가 숨을 들이켰다.
테르델은 경계하는 빛이 가득한 공작부인의 낯을 보며 웃었다.
“경거망동 삼가시오, 부인.”
상냥한 대꾸와는 달리 질책이 가득 묻어나는 눈빛이었다.
감히 멋대로 행동하지 말라는 질책에 그녀가 몸을 굳혔다.
스무 해가 넘도록 귀가 닳도록 들어온 말이었다.
먹는 것, 입는 것, 말하는 모든 것을 감시받고 조절 당하며 살아왔다.
시달리도록 들어온 이야기가 귓가를 맴돌았다.
그러나 상념은 잠시였다.
그녀는 질리도록 쥔 치마를 더욱 움켜쥐며 꼿꼿이 허리를 폈다.
겁에 질린 눈동자가 오기로 타올랐다.
“참으로 이상도 하지요. 모든 걸 다 가진 당신이 무엇이 그리 두려워서 우릴 이리 핍박하는지.”
“부인, 말씀이 참으로,”
“지나치지 않습니다. 귀한 성녀랍시고 가둬놓고 키우더니 황실로 데려가 구박데기로 만들어 놓지 않았습니까. 하찮은 몰락 귀족 출신인 우리가 정권을 잡을까 경계했다기엔 의문이 참으로 많지요. 북부의 왕씩이나 되신다는 대공이 빈털터리 귀족이 무어 무섭다고?”
부인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몸을 떨면서도 꼿꼿이 테르델을 올려다보았다.
발악하는 것과도 비슷한 모습이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조차 무슨 일이냐며 수군댔다.
여럿의 시선을 의식한 테르델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간 맺힌 게 많은 모양이시군요.”
“하! 많기만 할까. 아주 원망하고 있습니다.”
“원망이라…….”
“그 긴 시간 동안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은 나를 원망하고 있습니다. 나는 떳떳하니, 죄는 숨기려 드는 당신들에게 있겠죠.”
경멸 어린 시선에 테르델이 입꼬리가 드러내놓고 비틀렸다.
그는 공작 부인에게 바짝 다가가, 그녀에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황실의 명예에 먹칠하려 드는군.”
“…….”
“지금 황궁이 왜 번잡한지 아나? 네 멍청한 딸년 때문이야. 디젤라 그것이 기어코 문제를 일으켜 수습하느라 바쁜 것을, 천한 몸뚱이 밀어 넣을 곳도 없겠냐 물으면 할 말이 없지. 기어코 배려를 걷어차는 멍청이는 이쪽에서도 사절이니.”
공작부인이 눈을 부릅떴다.
그녀는 지금 저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의 입에서 떨리는 음률이 샜다.
“디, 디젤라가 왜…….”
“알고 싶으면 가서 직접 보십시오. 황후가 곤란해질 것은 감수해야겠지만.”
테르델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여유로운 낯에 여전한 웃음이 머물렀다.
“기껏 일을 덮는 중입니다. 갑자기 공작 저가 소란스러워진 이유가 무어 있겠습니까. 황실에서 두 분의 명예가 실추될까 우려되어 피신할 곳을 마련해주는 것인데, 건방지기는.”
충격적인 말에 공작부인이 비틀거렸다.
그제야 일이 심상찮지 않게 흘러가는 것을 눈치챈 공작이 달려와 그녀를 받아들었다.
테르델은 휘청이는 두 사람을 차갑게 바라보다 다시 말에 올랐다.
몽롱한 눈을 한 기사 또한 황급히 공작 부부를 마차 안으로 모셨다.
“가지.”
테르델의 말에 마부는 묻지도 않고 방향을 틀었다.
마차 안은 쥐 죽은 소리도 없이 고요했다.
그제야 테르델의 입에서 만족스러운 웃음이 흘렀다.
꼴에 성녀를 낳은 몸이라고 세뇌도 암시도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고작 해봐야 인간, 평생에 걸쳐 뿌리박은 멍청함은 어디 가지 않았다.
여전히 순진하고 아둔했다.
제 자식이 걸려들면 이성을 잃고 덫에 낚여 바르작대는 꼴이라니.
‘한심하긴.’
테르델은 망설임 없이 별장으로 움직였다.
황제가 황태후 파들을 몰아넣은 아주 멋지고 아름다운 별장으로.
그곳에서 그는 제게 온 마지막 기회를 맞이할 생각이었다.
***
아르베우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는 중에 신관들이 주변을 누비다, 그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조아렸다.
그들의 인사를 건성으로 받아넘기던 아르베우타가 마침내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어디 있는 거지?”
아무리 찾아도 지하가 보이지 않았다.
요란한 피 냄새가 진동하는 데도, 지하의 입구만큼은 찾아낼 수가 없었다.
쉬이 찾을 수 없을 거란 생각은 했지만, 상상 이상이었다.
신체 일부를 짐승의 형태로 변형시켜도 소용없었다.
신력으로 가득한 신전이 아르베우타를 거부하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덕분에 감각이 둔해지고 진만 빠졌다.
한참 신전을 헤매던 아르베우타의 입에서 한숨이 흘렀다.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군.”
그는 한참이고 고민하다가 무심코 벽에 몸을 기댔다.
‘분명 출입구가 있을 텐데.’
고작 보름이었다. 보름 안엔 찾을 수 있으리라 자신했으나 이대로면 그보다 더 걸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루베르나 테레사를 불러다 묻기엔, 그들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입을 열지 않을 게 분명했다.
고민에 잠긴 사이, 먼발치서 혼란이 느껴졌다.
비서관이 신전을 찾아온 모양이었다.
“하나하나 손이 가지 않는 게 없군.”
아르베우타는 짜증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시가 촉박한데, 문제가 자꾸 생기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안았다.
***
그는 비서관의 말을 듣고 빠르게 외궁으로 갔다.
외궁의 집무실엔 이미 비서관 두엇이 와선 곤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들을 흘깃 훑던 아르베우타가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지?”
“저, 그게……공작 내외께서 중간에 경로를 바꾸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목격자들의 증언이 모두 다릅니다.”
아르베우타가 잇새를 악물었다.
그가 짜증을 삼키며 말했다.
“구체적으로 말해주었으면 좋겠군.”
“그, 그게. 중간에 웬 노란 머리의 사내가 오더니 기사의 말을 뺏어 탔다고 하는 이도 있고, 보라 머리라고 하는 이도 있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함께 있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 못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증언의 공통된 점이라곤 돌연 공작부인이 마차에서 내리신 것과 황궁으로 향하던 마차가 방향을 튼 것뿐입니다.”
“……미치겠군.”
시간이 촉박한데 공작부부까지 난리였다.
신경질적인 모습에 비서관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럴 땐 쟈르스가 나서서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 황제의 신경을 달래주곤 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황후궁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황후의 여동생에게 붙잡혀 종노릇을 한다던데, 비서관들은 쟈르스가 부러워 미칠 것 같았다.
그들이 안절부절못할수록 아르베우타의 속만 썩어들어갔다.
그는 한참이고 생각을 거듭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테르델이로군.”
목격자의 증언이 모두 달랐다.
단순히 그들이 잘못 보았기 때문이라기엔 그곳에 있던 목격자가 너무 많았다.
그렇다면 기억이 조작되었단 뜻이었다.
이런 짓을 벌일 수 있는 사람은 테르델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분명 큰 부상을 입고 물러났다.
적어도 수십 년은 재기하기 힘들 정도의 부상이었다.
그래서 안심했건만, 어째서.
의아해하는 그에게로 창밖으로 쏟아지는 장대비가 보였다.
본래 제국의 여름은 덥고, 건조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폭우는 퍽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아르베우타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심상찮은 비였다.
빗물 가득 어두운 절망과 슬픔이 가득했다.
‘설마. 세실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아르베우타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황후궁 쪽으로 달려갔다.
짧은 순간에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비 퍼붓는 소리가 점점 커다래졌다.
그녀가 또 다른 비극을 마주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때아닌 폭우가 내리고 테르델 또한 힘을 되찾은 것이리라.
아르베우타는 비에 젖는 줄도 모르고 미친 듯이 달렸다.
하지만 막상 도착한 황후궁은 고요하기만 했다.
정원엔 찻잔 세 잔이 놓인 테이블만이 덩그러니 있었다.
‘이미 늦은 건가.’
설마 어디로 가버린 건 아니겠지.
그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빗물로 엉망이 된 머리를 쓸어넘겼다.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 정도로 쏟아지는 폭우 사이로 요란하게 일렁이는 호수의 표면이 보였다.
아르베우타는 잠시 무섭도록 깊고 어두운 호수를 응시했다.
‘설마.’
개미 한 마리 없는 황후궁의 정원이 지나치게 고요했다.
그는 떨리는 걸음으로 호숫가로 다가섰다.
그러곤 한참이고 빗물에 어그러진 호수 표면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호수 안에선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지.”
잡념을 떨쳐낸 그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그가 시력을 돋우기 위해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러자 동공이 날카롭게 좁혀지며 적안에 이채가 감돌았다.
예민한 동물의 감을 일깨운 그의 뒤로 불쑥 인기척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