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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럴 필요까지는…….”
그제야 테르델의 눈빛이 조금이나마 누그러들었다.
그 무렵, 계속해서 상황만 살피던 호위 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그 서신, 저도 볼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아지텔 남작 가의 영식이여.”
테르델이 기사를 돌아보며 웃었다.
호명 당한 기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를 아십니까?”
“물론이지요. 친부께서 대공령에 자주 들리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유독 몸이 약하다던 여동생 엘리 양은 건강한지요? 일전에 북부에서만 자라는 설꽃이 약재가 된다고 하여 지원한 기억이 있습니다.”
테르델의 말에 기사의 딱딱하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맞습니다.”
기사의 눈동자가 쉼 없이 떨렸다.
하지만 그는 영 못 내키는 것이 있는지 입술을 달싹이기만 했다.
테르델은 그가 무슨 말을 삼키는지 조용히 살폈다.
‘분명, 대공은, 수도 출입금지. 였는데.’
기사가 삼킨 말을 파악한 테르델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맺혔다.
‘출입 금지 명령을 내렸었구나.’
하지만 그가 정말로 무슨 짓을 벌였는지는 모르는 게 분명했다.
사실 황태후가 죽었던 것이 저 때문이라는 증거 따윈 어디에도 없었을 테니.
황제 또한 그저 숨기고 넘어가려는 모양이었다.
그것이 테르델에겐 큰 도움이 되었다.
안도한 테르델이 기사와 시선을 마주했다.
“경도 제 수도 방문 소식을 들었지요? 황제 폐하께서 화려한 환영식을 열어주시지 않았습니까.”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기사는 제대로 반박조차 하지 못하고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구멍이 막힌 듯 말도 제대로 흐르지 않았다.
테르델이 기사의 정신을 흐릿하게 만들어 놓은 탓이었다.
테르델은 몽롱한 눈동자로 고개를 끄덕이는 기사를 바라보며 우아하게 웃었다.
“이번엔 제가 두 분을 정식으로 모시겠습니다. 황제 폐하께 받은 은혜를 갚아야지요.”
그의 말에 기사는 다시금 고개만 끄덕였다.
인형과도 같은 모습이었으나 멀리서 둘을 지켜보던 공작 부부는 이야기가 잘 풀리고 있는가 하며 흡족해했다.
기사의 허락에 경계를 늦추지 않던 다른 병사들마저 긴장을 풀었다.
내밀한 사정을 잘 모르는 그들은 대단한 대공 각하께서 친히 황명을 들고 왔다는 사실에 별다른 의문을 품지 않았다.
테르델은 쉬이 속아 넘어가는 그들을 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그럼 저를 따라오시죠. 멀지 않은 곳에 아주 멋진 별장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아주 멋진 별장.
그 말에 공작 부부의 얼굴에도 설렘이 깃들었다.
그들은 제대로 바깥나들이를 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황실의 허락하에 밖으로 나와도 곧장 황궁에 들렀다, 다시 저택으로 돌아가는 식이었다.
아주 오랜 시간을 그렇게 살았다.
그런데 별장이라니. 뜻밖의 소식에 절로 웃음이 흘렀다.
그러나 기쁨에 젖었던 공작부인의 입꼬리는 금방 내리 앉았다.
‘미안하다고 말하려 했는데.’
아직 세실레에게 전하지 못한 말이 있었다.
그녀는 전의 일을 사과할 생각이었다.
네 생일을 잊어서, 황실 어른의 말에 복종하라 다그쳐서 미안하다고 할 생각이었다.
부모가 되어서 해준 것도 없으면서, 편조차 들어주지 못해 미안했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별장을 간다니.
‘언제쯤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또다시 아득한 시간을 기다려야 할지도 몰랐다.
일 년, 이 년이 넘을지도 몰랐다.
그 긴 시간 동안 기다릴 순 없었다.
공작부인이 먼저 황궁을 들리면 안 되느냐 묻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녀는 일순 찾아오는 두통에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
머리가 무언가에 두들겨 맞은 듯 어질거렸다.
흐릿한 잔상 위로 어째선지 세실레를 임신했을 때가 떠올랐다.
***
태생이 몰락한 귀족 가문이라 나름의 자유를 누리고 살았던 그녀는 다른 귀족들이 으레 그러하듯 정략혼 했다.
사랑은 없었으나 남편 또한 나무랄 곳 없는 사람이었다.
몰락했대도 명색이 귀족이었다.
물려받은 유산과 저택이 있었고 마을의 영주가 찾아와 축복해줄 정도로 커다란 결혼식을 열었다.
꽃과 같은 미래가 펼쳐질 줄 알았다.
첫날 밤에 세실레를 임신하기 전까지는.
임신은 신혼에 설레하던 부부에게 찾아온 덫과 같은 고난이었다.
‘그 배에 성녀가 있다더군.’
막 열아홉 된 새신부가 남편과 첫날밤을 보내자마자 황실 일원들이 그녀를 찾아왔다.
그녀는 고작 하룻밤을 보내고 임신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전에, 공작부인으로 격상되고 유폐됐다.
성녀를 지키기 위함이랬다.
고결한 성녀를 낳아 황후 위에 올리기 위해서라면 응당 겪어야 할 일이라 했다.
어린 부부는 그것이 무얼 뜻하는지도 모르고서 부모와 혈연, 친구들을 모두 고향에 두고 수도의 저택에 감금되었다.
크고 으리으리한 저택은 묘하게 서늘했다.
부부는 사람이 오래간 살지 않아 그런 것이라며 애써 불안한 마음을 억눌렀다.
저택의 이 층 높이보다도 높은 성문의 창살이 마치 감옥처럼 솟아오르고 주위를 수많은 기사가 둘러쌌다.
무언가 이상하게 흘러간다고 생각했으나 소용없었다.
황실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이 제국과 성녀를 위한 것이라며 항변하려는 부부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렇게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는 성녀란 말이 한 치의 의심도 들지 않을 만큼 곱고 어여뻤다.
말도 못 하는 갓난아이가 울지도 않고 푸르른 눈을 커다랗게 뜨고선 입술을 오물댔다.
어미의 뱃속에서 막 나왔음에도 아이는 따로 씻기지 않아도 될 정도로 깨끗했다.
범상치 않은 아이였다.
세렌디테 공작부인은 저 아이를 정녕 제 배로 낳은 것이 맞는지 믿을 수 없었다.
부부 중 누구도 닮지 않은 아이가 생소했으니까.
열 달 내리 품고 있었으면서도 선뜻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녀가 무심한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는 사이 신관들이 아이를 데리고 가버렸다.
그들이 무언지 모를 의식을 행하는 동안, 부인은 뒤에서 기운 없는 눈으로 아이를 보았다.
신관들은 아이를 정화한 물로 씻기고 옷을 입히더니 이름마저 지어주었다.
부부의 의사는 조금도 묻지 않고 행해진 일들이었다.
‘이름은 세실레, 세실레 루나루스 세렌디 르 세렌디테. 당신이 낳았으나 당신의 아이가 아닌 고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니 항상 모심에 부족함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 말하는 신관과 참관하는 황실 어른들의 얼굴이 어두웠다.
정숙한 공간에서 막 출산을 마친 공작부인은 반박할 여지조차 없었다.
그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막 제가 낳은 아이를 안지도 못한 채. 그러겠노라 고개만 끄덕였다.
그게 세실레였다.
낳아서 한동안은 정을 붙이기도 어려웠던 아이.
디젤라를 낳고서야 다시금 시선을 주게 된 아이.
디젤라를 키우며 갓난아이 키우는 것이 이리도 힘든 일이구나 깨닫고서야 얌전히 잘 노는 세실레가 유독 기특하게 느껴졌다.
그제야 다시금 세실레를 돌아보게 되었다.
해줄 것이라곤 노는 것을 지켜보는 것뿐이라지만, 그래도 황실로 보내기 전까지는 행복한 기억이 가득하길 가슴으로 바랐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지.’
고작 일곱 살 어린아이를 반강제로 황실에 보내고 나서야 그리움이 일었다.
그간 해주지 못한 것만 떠올라 가슴이 답답했다.
그래선지 아주 가끔 세실레를 만나러 가면, 울분이 솟았다.
해주지 못한 것이 너무나도 많아서, 그런 만큼 더욱 행복하게 크기를 바랐는데.
막상 마주한 세실레는 시들어가는 화초와 다를 것이 없었으니까.
온몸에 짐과 같은 장신구를 걸치고서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세실레는 어느 모로 봐도 불행해 보였다.
눈여겨보지 않아도 곳곳에서 그녀를 폄훼하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공작부인은 그럴수록 세실레를 다그쳤다.
네가 더 잘하면 되지 않겠느냐 했던 말은, 실은 속상함의 토로였다.
그리 말을 뱉고 나서도 세실레의 미미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바라보니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러나 부인은 해명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다음을 기약해야만 했다.
참으로 바보같이 보낸 시간이었다.
부인은 세실레와 마지막으로 헤어진 뒤 자신의 지난날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그런데 드디어 만나게 되었다고 어찌나 고대했던가.
이번에 만나면 미안하다는 말부터 할 생각이었다.
해준 것 없는 부모였으니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 말조차 전할 여력이 없단 말인지.
부인의 손끝이 여리게 떨렸다.
오랜만의 나들이로 설렜던 마음이 기이하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남편의 손을 잡으며 천천히 말했다.
“뭔가 이상해요.”
“무엇이 말입니까, 부인.”
공작이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무언가 똑바로 짚어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더듬더듬 생각나는 대로 읊을 뿐이었다.
“……분명 디젤라가 편지를 보냈을 땐,”
뭐라고 보냈더라. 기억을 되짚는 그녀의 위로 가벼운 웃음이 흘렀다.
“디젤라? 그 아이의 편지엔 잘 지낸다는 말이 적혀 있었지.”
잘 지내니 다행 아닌가, 하는 가벼운 낯이었다.
공작부인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
다행인 일이었다. 그래서 이상했다.
부인의 입에서 희미한 음성이 샜다.
“……세실레가 황성에서 잘 지낼 리가 없잖아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하지?”
공작이 낯을 딱딱하게 굳혔다.
하지만 공작부인의 혼란스럽던 눈동자는 도리어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드디어 내내 느끼던 모든 의아함이 해갈된 기분이었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힘주어 잡은 채, 공작을 향해 일갈했다.
“정신 똑바로 차려요. 황실에서 우릴 이렇게 대접할 이유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간 가둬놓고 사람 취급도 하지 않더니 갑자기 별장으로 모신다니요?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말이 너무 심하지 않소.”
“현실을 똑바로 보십시오. 우리 세실레가 항상 힘들어하던 게 누구 때문인데. 황태후를 배출한 타리베르 가문의 대공이 우리를 위한다고요? 그가 친척의 상을 치른 것이 엊그제인데!”
“…….”
“북부의 왕이라, 참으로 거만도 하지. 제국에 허락된 제위는 오직 황제와 황후의 것입니다.”
올바른 말에 공작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