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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86화 (86/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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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괴로움은 잠시일 테니, 마음껏 슬퍼하고 혼란스러워하십시오. 보름만 견디시면 됩니다. 고작 보름입니다.”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달로 돌아가는 것이 모든 일의 해결책이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세실레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테레사가 이러한 말을 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유일하게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가슴을 칼로 벤 듯했다. 심장이 찢어지게 아팠다.

슬픔인지 배신인지, 정의조차 내릴 수 없는 감정에 머리가 새하얗게 표백되었다.

그녀는 겨우 힘을 쥐어짜, 느리게 말을 뱉었다.

“……나더러 지금, 네 희생을 당연히 여기라고 말하는 거야?”

“만약 이번 기회를 놓치시면 다음은 루베르가 되겠지요. 루베르가 제 뒤를 이어 죽을 겁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세실레의 눈꺼풀이 쉴 새 없이 떨렸다.

하지만 테레사는 잔인하리만치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다음은 달과 오키드리아 대륙, 전부가 될 겁니다. 그게 신위를 타고난 자가 짊어져야 할 책임입니다.”

“……뭐?”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는 겁니다. 회피하지 마십시오. 그게 당신이 걸어야 할 길입니다, 폐하.”

테레사의 표정은 굳건했다.

언젠가 그녀를 지켜주겠노라 맹세하던 날과 같았다.

그 맹세가 지금을 위해서였던 건지.

지난날의 모든 것을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세실레의 입에서 희미한 음색이 샜다.

“……널 믿은 걸 후회해.”

세실레는 흐릿해지는 눈을 수어 번 치켜뜨며 떨리는 입술로 재차 말을 이었다.

“……고작 그런 걸 위해 내 곁을 지켰다니. 네 인생도 참으로 허망하구나, 테레사.”

하지만 테레사는 무어라 반박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세상의 큰 변화를 일으키는 데에, 제 목숨은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도리어.

“제 임무를 잘 수행한 듯하여 다행입니다.”

이로 인해 세실레가 더욱 큰 슬픔에 젖을 수 있다면, 그걸로 다행인 일이었다.

그래야 달의 문이 순조롭게 열릴 테니까.

“정말로 다행입니다, 신이여.”

세실레는 그들을 잠시 응시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루베르도 테레사도 그녀를 뒤쫓지 않았다.

고작 보름이었다.

적어도 보름간, 그들은 세실레를 철저히 몰아붙일 생각이었다.

정적 속에 걸음을 옮기던 세실레의 시야가 흐려졌다.

덩달아 하늘 가득 먹구름이 끼었다.

이어, 보름간 그치지 않을 장대비가 대지를 적시기 시작했다.

***

깊은 고랑의 그림자, 빛조차 스며들지 않는 어두운 곳.

코끝을 후벼 파는 오물과 악취, 파리 떼가 들끓어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새까만 형체가 꿈틀거렸다.

“크, 크큭.”

진흙처럼 어그러져 인간의 형체를 띄지 않던 것이 느리게 기지개를 켰다.

강하고 정순한 힘이 지하로, 어둠으로 파고들었다.

엉망이 된 그의 형체를 회복하고도 남을 만큼 깊은 슬픔이었다.

“……이리될 줄 알았지.”

찢어질 듯 거친 목소리가 천지를 울렸다.

어둠 속에서 테르델이 서서히 모습을 갖췄다.

아무런 형체도 띄지 못하던 진흙이 차차 사람의 형태를 갖춰갔다.

그의 낯에 잠시간 어려있던 절망과 좌절은 없었다.

오직 희열과 열망뿐이었다.

저를 이리 만든 아르베우타를 잘근잘근 씹어 삼키고 고고하던 세실레를 저와 같이 추락시키려는 갈망, 오직 그 갈망으로 테르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르델이 있는 곳은 수도의 지하였다.

그 어느 때보다도 신력으로 가득한 곳에서 테르델은 개운한 기분을 느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깊은 절망이 수도에 뿌리내린 덕이었다.

테르델에게 있어선 마지막 기회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몹시도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몸에 넘쳐흐르는 힘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이 힘을, 그는 아주 조심해서 사용해야만 했다.

황궁에 각성자가 한 명 더 생겨버렸으니까.

쏟아지는 장대비를 맞으며 서 있던 테르델이 황궁을 응시했다.

한참이고 황후궁을 응시하던 테르델의 입에서 즐거운 음색이 흘렀다.

“다들 발악하기 바쁘군.”

어떻게든 인간의 힘을 키워보겠다며 애쓰는 것이 테르델로선 우습기만 했다.

하지만 상념은 잠시였다. 지금은 축배를 들기에 너무 일렀다.

테르델은 무언가를 찾듯 고개를 기울였다.

덩달아 화려한 자주색 머리칼이 보석처럼 흩어졌다.

그러자 내내 바닥을 서성이던 새가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올랐다.

새카만 날개를 펼친 새가 수도를 크게 한 바퀴 돌더니 무언갈 찾은 듯 어딘가에 멈춰 섰다.

덩달아 테르델의 무표정한 얼굴에도 웃음이 맺혔다.

“아주 먹음직한 먹잇감을 잊고 있었군.”

그의 시야로 세렌디테 공작 부부가 눈에 들어왔다.

어설프게 차려입은 그들은 떨리는 눈동자로 사위를 훑고 있었다.

떨리는 손도 꼿꼿이 선 허리도, 모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황궁으로 향하는 길인지 그들이 탄 마차는 수도의 대로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장대비에 문제가 생겼던지, 마차가 앞에 막혀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마부조차 곤란한 표정을 지을 뿐 별다른 수를 쓰지 못했다.

정확히, 때맞춰 도착한 먹이였다.

테르델은 이것이 세렌디 신이 안배한 것이라 짐작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리도 운 좋게 테르델의 앞에 저 부부가 모습을 드러낼 리 없었으니까.

테르델의 입가에 매혹적인 웃음이 깃들었다.

“하여간 여전하다니까.”

세실레가 그리 질색하며 어미의 곁을 떠나려 한 이유가 짐작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테르델에게도 기회였다.

테르델은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테르델이 그들 앞에 가서 섰다.

처참한 장대비를 가르고 나타난 선명한 자주빛의 남자는 공작 부부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오랜 시간 세상과 격리되어 모르는 것투성인 공작 부부의 눈이 의아함에 젖었다.

그들을 호위하는 기사와 병사들도 경계를 곧추세웠다.

하지만 테르델은 비무장 상태인 데다, 언뜻 보아도 귀족이었다.

섣불리 공격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호위 병사들의 대표로 나선 기사가 말없이 테르델을 응시했다.

그러나 테르델은 개의치 않고 곤란한 표정으로 창밖에 얼굴을 비춘 공작 부부를 향해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누, 누구신지…….”

그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한 번 보면 결코 잊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한 빛을 띤 남자는 분명 처음 보는 이였다.

공작 부부가 망설이는 사이 테르델이 재차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저는 북부의 왕, 테르델이라고 합니다.”

“……왕이라고요?”

제국 위에 있는 작은 소왕국을 일컫는 것일까. 혹은 무언가 그들이 모르는 것이 있나.

공작 부부는 무어라 묻지도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그들의 무지함을 드러낼까 부끄러웠던 탓이었다.

그러나 테르델은 무어라 더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매끄럽게 눈매를 휘었다.

대단한 미남자에 고풍스러운 의상, 제국과는 확연히 다른 의복 양식에 공작 부부는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저들이 모르는 어딘가의 왕이라 믿는 모양새였다.

순진한 모습에 테르델이 비웃음을 숨긴 채 선량한 낯으로 말했다.

“네, 황제 폐하의 은혜로 잠시 수도에 머물고 있지요.”

“……그러시군요. 그런 분이 왜 저희에게.”

타국의 왕이 구태여 접근한 이유를 알 수 없었던 공작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황제가 친히 귀족들을 조심하라 이른 뒤였다.

정체도 모르는 남자가, 호위도 없이 빗속을 가르며 다가오는데 호의적으로 대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테르델은 공작의 의심 따위 모르는 척 유려하게 말을 이을 뿐이었다.

“여기 폐하의 친서입니다. 잠시 황궁이 복잡하니, 별장에서 머무시라는 내용이 담겨 있지요.”

“……보여주십시오.”

세렌디테 공작이 날카로이 눈을 빛냈다. 진위 여부를 확인하려는 눈이었다.

테르델은 순순히 품에서 서신을 꺼냈다.

그것을 받아든 공작은 낱낱이 서신을 훑었다.

하지만 양식이며 인장, 필체까지.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저택에 날아온 서신과 같은 양식이었고 별다른 위조 흔적도 없었다.

그것을 확인한 공작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왜 타국의 왕이 혼자 돌아다니십니까?”

어떻게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러자 테르델이 웃음을 터트렸다.

배를 잡고 웃는 모습에 공작이 불쾌한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를 잠시 응시하던 테르델이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죄송합니다. 제 설명이 짧았군요. 예로부터 제국은 타리베르 대공을 북부의 왕이라 부르며 높여 주었습니다. 감사하게도 말이지요.”

“……타리베르 대공! 그러면 돌아가신 황태후 폐하의 친척 되시겠군요.”

공작이 안색을 달리했다.

이제 보니, 죽은 황태후와도 머리 색 같은 것이 유독 닮았다.

이채가 도는 공작의 눈동자를 응시하던 테르델이 매력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렇습니다. 마침 장례식에 참석할 겸 왔다가 잠시 머물고 있습니다.”

“그러시군요. 멀리서부터 고생이 많으십니다.”

내밀한 사정을 모르는 공작으로서는 테르델의 말이 그럴듯하게 들렸다.

게다가 타리베르 대공은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권위 가이지 않은가.

이전의 대공이 죽어 세대가 바뀐 모양이지만, 그 위세가 달라졌을 리 없었다.

그러니 대공이 바쁜 황제를 대신해 저들을 인도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다면, 어째서 혼자서 저리 돌아다니냐는 것.

그를 의식한 테르델이 공작의 궁금증을 곧장 풀어주었다.

“워낙 성격이 자유로운 탓에 호위가 붙는 걸 견디지 못합니다. 못 내키시면 황궁에 가서 황제 폐하께 확인을 받고 움직이시지요.”

나긋한 목소리와는 달리 눈매가 서늘했다.

얼핏 골칫거리들이 까다롭게 군다는 경멸의 표현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그를 응시한 공작이 입을 다물었다.

테르델의 표현대로, 공작 부부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이렇듯 황제의 허락 없이는 바깥에 나돌지도 못하는 허울뿐인 가문이 아니던가.

그에 공작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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