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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85화 (85/110)

85

세실레는 신전으로 향하는 오솔길에 들어섰다.

정갈한 신전과 화사하게 꽃이 핀 정원은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평화로웠다.

일전에 세실레가 이능으로 피워낸 꽃이었다.

화사한 꽃 무리를 찬찬히 훑어보던 세실레에게로 정원을 손질하던 신관이 화색을 띠며 다가왔다.

“성녀님, 어쩐 일이십니까?”

“……그냥 둘러볼 것이 있어서요.”

“그러시군요. 이쪽은…….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신관이 깊이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그를 잠시 내려다보던 아르베우타가 되었다며 손을 내저었다.

그로서도 신관에게 이렇다 할 대우를 받는 것이 영 편하지 않았다.

아르베우타가 딱딱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되었네. 신전을 둘러봐도 되겠나.”

나지막한 어조에 신관이 세실레를 보았다.

그녀만 허락하면 상관없다는 투였다.

결백한 낯의 신관을 응시하던 세실레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해줘서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원래 성녀님의 것입니다.”

신관이 티 한 점 없이 해맑게 웃었다.

별다른 생각 없이 신관을 응시하던 세실레가 무심코 떠오른 생각에 신관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루베르는 어딨죠? 요즘 통 보이질 않던데.”

“아, 그분께서는.”

신관이 머리를 긁적였다.

마치 말하기 곤란한 것이 있다는 듯이.

세실레가 의아한 낯을 했다.

그제야 신관이 고민을 마치곤 입을 뗐다.

“……성녀님께 무얼 숨기겠습니까. 실은 루베르 군이 최근에 크게 상심한 모양입니다.”

“……상심?”

“네. 아무래도 성녀님께서 자신을 소홀히 여긴다고 느낀 모양입니다. 몇 날 며칠을 황후궁 쪽을 바라보며 식음을 전폐하더군요. 그 뒤로 테레사 경과 몇 번 어울리는 걸 봤는데……, 아마 지금은 황후궁 쪽에 있을 겁니다.”

“……테레사와 어울렸다고.”

“네, 아. 그 전에 기도실에 잠깐 들리긴 했습니다만,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그 애가 신탁을 받았을지도 모르겠군.”

“네? 신탁이요?”

“아무것도 아녜요. 아르베우타, 저는 루베르를 먼저 만나보고 올게요.”

세실레는 곧장 걸음을 돌렸다.

아르베우타는 그녀를 말려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걸음을 뗐다.

‘순서야 어찌 되든 상관없겠지.’

원래라면 루베르와 세실레를 최대한 만나지 않게 할 생각이었다.

루베르는 필사적으로 세실레가 달로 돌아가야 한다며 설득할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세실레도 무언갈 눈치챈 듯 보였다.

조금 전, 흐느끼던 세실레를 떠올리던 아르베우타는 애써 세실레에게서 시선을 떼고 신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하로 가는 문을 찾는 것이 먼저였다.

그 뒤는 세실레의 선택에 달려있었다.

***

세실레는 황후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황후궁으로 갔다던 루베르를 찾기 위함이었다.

신전과 이어진 오솔길을 걷는 내내 세실레의 머릿속은 온갖 생각으로 복잡했다.

루베르가 정말로 신탁을 들었는지, 들었다면 루베르 때문에 테레사가 그리 애원한 건지.

또한 왜 제게 먼저 말하진 않았는지. 그리고.

……달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가 정말로 그것뿐인지.

묻고 싶은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생각에 잠겨 걷다 보니 금방 신전과 황후궁의 중간 부근에 들어섰다.

그곳에 흰옷을 입고 사랑스러운 얼굴을 한 루베르가 서 있었다.

세실레는 루베르를 발견하곤 자리에 멈춰 섰다.

혼잡하던 머릿속의 생각이 뚝 끊어지고 세실레의 입에서 희미한 음성이 흘렀다.

“……루베르.”

“엄마! 오랜만이에요!”

루베르가 세실레에게 달려와 안겼다.

원래라면 세실레도 루베르를 그린 듯 안아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루베르를 안아줄 수 없었다.

세실레는 그대로 자리에 멈춰 섰다.

그녀가 루베르를 반기지 않는 대신 루베르가 더욱 힘주어 세실레를 끌어안았다.

루베르의 뺨으로 부드러운 옷자락이 와 닿았다.

서늘한 분위기가 느겨졌지만 루베르는 부드러운 품만으로도 만족했다.

엄마가 제 곁에 있는 것만으로 더 바랄 것이 없었으니까.

그가 방긋 웃으며 세실레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엄마, 이리로 와여.”

“…….”

“제가 엄마를 위해 다과를 준비해 뒀어요.”

세실레는 말없이 루베르가 이끄는 대로 따랐다.

우선은, 루베르가 하는 양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저 어린아이의 탈을 쓴 것이 무슨 속내를 숨기고 있는지 몹시도 궁금해졌으니까.

***

테레사는 황후궁 앞 호수 부근의 정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테이블 위로 찻잔이 세잔 놓였다.

작금의 상황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세실레는 그들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빈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루베르가 기다렸다는 듯이 활짝 웃었다.

“엄마, 오랜만이에요!”

“그래. 루베르.”

세실레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항상 마주 보고 웃어주던 얼굴에 냉담함이 깃들었다.

세실레는 찻잔에 일렁이는 찻물만 응시했다.

머리가 제대로 정리가 되질 않았다.

‘무슨 이야기부터 꺼내면 좋으려나.’

고민하는 사이, 루베르가 먼저 활기차게 이야기를 이었다.

“엄마. 안색이 좋지 않아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명랑한 표정이었다.

이전이었다면 세실레 또한 루베르의 장단에 맞춰주었을 것이다.

그럴 만한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세실레에겐 조금의 여유도 없었다.

잠시 침묵하던 세실레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한테 할 말 없니?”

루베르의 올망졸망한 눈동자 가득 영악한 빛이 깃들었다.

무언갈 숨긴 채, 세실레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를 시험해 보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루베르가 세실레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엄마는요?”

당돌한 대꾸에 세실레가 눈살을 찌푸렸다.

“……네게 속은 기분이야.”

저 엄마라 부르는 귀여운 얼굴에 속았다.

자신과 똑 닮은 외양에, 의지를 주었다는 감격에, 저와 비슷하게 느껴지는 힘에 속아 루베르의 기만을 보아 넘겼다.

그 대가가 이런 것인지.

세실레의 입술이 흐리게 달싹였다.

도대체 너는 누구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하지만 물어봐야 빤했다.

엄마의 아들이라고, 엄마를 위해 달에서 왔다고 사랑해달라고 속삭이겠지.

그래서 지금까진 그렇게 해주었다.

루베르를 보면 자신의 어린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더욱 그랬다.

어디에도 기댈 곳 없는 아이, 숨기는 것이 몇 있더라도 거두어 키울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나 보다.

“널 거둔 걸 후회해.”

세실레가 그간의 원망을 가득 담아 읊조렸다.

그러자 루베르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제대로 다물지 못했다.

생각보다 크게 흔들리는 모습에 무심코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정신 연령은 아이와 같댔지.’

그렇다면 루베르의 입을 열어, 더 많은 정보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잠시 고민하던 세실레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어느덧 그녀의 표정이 엄격하게 굳어 있었다.

“나는 거짓말하는 아이는 싫어해.”

“루베르는 거짓말 안,”

“했어.”

“……엄마?”

“루베르. 자꾸 나를 실망시키는구나.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전부 믿어주려 애썼는데.”

서늘한 시선에 루베르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그러치 않아요!”

조금 전의 영악한 기색은 어디로 가고 루베르의 표정은 다급해 보였다.

그는 씩씩대며 입술만 오물대더니 이윽고 느리게 입을 열었다.

“내가 언제 거짓말 했다구 그래여?”

동요하고 흔들린다.

세실레는 루베르가 분에 차 해명하는 것을 바라보다 느리게 입을 열었다.

“……거짓말했어. 나한테 정체를 숨기는 것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 앞에선 다르게 행동한 것도 전부 거짓말이잖아.”

“그게 왜 거짓말이야!”

“거짓말 맞아. 그러니까 루베르, 내가 더는 네게 실망하지 않게 하렴.”

질책 어린 눈빛에 루베르가 입술을 악물었다.

그는 분한 듯 자그마한 손을 힘주어 쥐더니, 얼마 가지 않아 씩씩대며 입을 뗐다.

“……실망시키지 않아요. 하지만.”

“하지만?”

“엄마도 이번 일은 테레사의 말을 따르는 게 좋을 거예요.”

루베르가 느리게 고개를 떨궜다.

세실레는 고개를 푹 숙인 루베르를 한참이고 바라보다 느리게 입을 뗐다.

“……왜?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루베르가 흘깃 세실레를 바라보았다가 시선을 피했다.

지금의 엄마는 전과 달랐다.

허튼 말을 하면 꼬투리가 잡혀, 밝혀선 안 될 것까지 말하고 말 것만 같았다.

세실레의 말이 맞았다.

루베르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거짓말은 이어져야만 했다.

세실레가 신이 되기 전까지는.

루베르는 혹여 실수하진 않을까 조심하며 말을 골랐다.

“엄마가 선택할 문제가 아녜요.”

“…….”

“……문을 열기 위해 테레사가 희생했어요. 문이 열려도 닫혀도 테레사는 죽어요. 그러니까……, 그녀의 희생을 헛되이 하기 싫으면 엄마가 달에 가야 해요.”

“……뭐라고? 지금, 뭐라고 했어?”

세실레가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못 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안색을 굳혔다.

듣고도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테레사가 문을 열기 위해 무얼 했다고?

놀라는 세실레를 바라보던 테레사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하지만.”

“……테레사. 누구 멋대로 그런 짓을 벌였지?”

“죄송합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

“저는 그러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니까요.”

세실레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저 눈썹을 추켜 올린 채 테레사를 응시할 뿐이었다.

날카로운 낯을 한 것과는 달리 몸이 떨렸다.

분노인지, 실망인지, 혹은 다른 어떤 것인지.

세실레는 가슴 속을 요동치는 격정을 감내할 수 없었다.

내내 침묵하던 세실레의 입에서 기어코 신음을 닮은 목소리가 흘렀다.

“……네가 정말로 날 생각했다면, 그러지 않았겠지.”

테레사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세실레의 말이 맞았다.

정말로 세실레를 위한다면, 그녀와 먼저 관계를 구축하지도 희생을 알리지도 말아야 했다.

그저 그림자처럼 뒤를 따르며 그녀가 모르는 중에 죽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테레사는 그러지 않았다.

테레사가 세실레를 바라보며 말했다.

“전부 황후 폐하를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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