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84화 (84/110)

84

과거를 되짚는 듯한 목소리는 조용하고 사근사근했다.

거짓을 꾸며내거나 비유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아르베우타의 기억에는 없는 이야기에 그의 눈꺼풀이 충격으로 떨렸다.

그는 재차 확인하듯 더듬더듬 물었다.

“……죽었다고요?”

“네. 어지럽더니 피를 토하고 죽었어요. 허망한 생이었죠. 그리고 돌아오니 당신과 결혼한 첫날 밤이었어요.”

“……첫날밤.”

아르베우타는 그때의 기억을 되짚었다.

첫날 밤, 그때 무얼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하지만 세실레는 모조리 기억하고 있었다. 마치 어젯밤 일처럼, 생생하게.

“당신은 집무실에서 술을 마셨고 저는 어쩌다 되살아났죠. 어영부영 살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심장이 내려앉는 이야기에 아르베우타는 숨을 멎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그러고 보니 세실레가 어쩐지 달라졌다고 느꼈었다.

당시엔 어째서 변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펜듈럼이 깨지며 무언가 변화가 생긴 것으로 생각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아니란다.

그녀는 죽었다 살아 돌아왔단다.

믿기 힘든 끔찍한 이야기에 아르베우타가 잇새를 짓씹으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나를 떠났구나.

채 삼키지 못한 말이 목 언저리를 맴돌았다.

감히 그녀에게 어째서 말하지 않았느냐고, 왜 숨겼냐고 다그칠 수 없었다.

그래서 아르베우타는 침묵했다.

침묵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더불어 끝없는 자괴감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그간 저 혼자 모든 짐을 짊어진 척, 그녀를 위하는 척했던 것이 부끄럽고 수치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아르베우타의 몸이 떨렸다.

누구보다 강인하다 여겼던 몸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기 직전이었다.

그는 무엇이고 집어 내던지고 싶은 마음을 꾹 억누르며 참았다.

어째서 그리 태연히 웃을 수 있냐고 묻고 싶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할 자격조차 없었으니까.

아르베우타가 좌절에 젖어가는 동안, 세실레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어쩌면, 이번에도 죽어야 하는 때가 다가왔는지도 몰라.”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충격적인 말에 기어코 분을 억누르지 못한 아르베우타가 고성을 터트렸다.

하지만 세실레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그저 눈을 깜빡이고서 서선, 조곤조곤 제 속내를 털어놓았다.

“……비슷한 때에 비슷한 일이 일어나려고 하고 있으니까요.”

“비슷한 일이 아닙니다. 달로 돌아가도 당신은 죽지 않을 테니.”

“하지만 이곳을 떠나겠죠.”

세실레는 눈을 내리깔았다.

죽은 후에도 그랬다.

그녀는 영혼이 하늘로 부유해 쉼 없이 오르던 것을 여전히 기억했다.

바닥에 발붙이려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마치 그녀와 지상을 잇는 끈이 사라졌다는 듯, 그녀는 구름처럼 하늘로 날랐다.

숨 막힐 정도로 가볍고 정적인 공간이었다.

하늘로 올라갈수록 미련도 집착도 잊혔다.

죽어서 원망스럽던 것도, 가족들의 말도, 후회도,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렇게 모든 감정도 기억도 지워지려던 무렵,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

무언가 상기해낸 세실레가 안색을 굳혔다.

‘밉지? 너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지? 돌아가. 돌아가서 복수하자.’

섬뜩하도록 달콤한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를 맴돌았다.

몹시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어디서 들었던 것인지를 떠올리던 세실레가 숨을 멎었다. 그건,

“……세렌디.”

세렌디 신의 목소리였다.

‘그렇다면 왜?’

신이 무엇을 위해서 세실레를 그리 부추겼을까.

어쩐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그리 복수심을 갖고 회귀했는데, 막상 살아 돌아오니 마주한 현실이 지겹기만 했다.

결국 테레사의 도움으로 도망쳤으나 세실레는 다시금 제국의 수도로 돌아와야만 했다.

악령이 들끓었기 때문이다.

세실레가 없으면 안 되게끔, 세렌디는 이 모든 것을 설계해 놓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모든 것들이 설명되지 않았다.

‘어째서 그런 짓을.’

무심코 떠오른 사실들이 퍼즐 조각 맞추듯 맞아 들어갔다.

세렌디는 세실레를 구태여 살리고 제국의 수도에 묶어 놓았다.

그러고는 기어코 그녀가 만들어놓은 비극에 휩쓸리도록 인도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건, 신의 탓이라는 건가.

어디에 원망을 토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이 밀려들어, 세실레는 몸을 떨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세실레!”

아르베우타가 가까스로 그녀를 안아 들었다.

아르베우타의 품에 안긴 세실레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세렌디가.”

“…….”

“……모르겠어, 아무것도. 하지만 알아야겠어요. 그러니 저도 신전에 갈래요.”

결연한 눈동자에 아르베우타가 못 이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뜻대로 하십시오.”

아르베우타가 세실레의 등을 받쳐 일으켜 주었다.

그의 어깨 부근을 지지하던 세실레의 손에 힘이 실렸다.

누군가 인생을 멋대로 휘젓고 있었단 사실을 깨닫는 건, 썩 달가운 기분이 아니었다.

그런데 기어코 세렌디는 제 연인마저 앗아가려 하고 있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곰곰이 되짚어보던 세실레는 무심코 떠오른 사실에 아르베우타를 응시하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내게 말해주지 않은 게 있잖아요.”

“질문하십시오.”

아르베우타의 눈동자에 얼핏 괴로움이 어렸다.

일부러 숨기고 있던 것을 밝히는 것이 퍽 내키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세실레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묘하게 시선을 피하는 아르베우타와 눈동자를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절 피하다가 갑자기 행동을 바꾼 이유, 말해주세요.”

날카로운 물음에 아르베우타가 고개를 숙였다.

그는 한참이고 침묵하다 느리게 입을 뗐다.

“……펜듈럼, 아니 저주 때문입니다.”

“저주?”

“당신의 어머니가 건 저주. 나와 당신이 가까이에서 이야기만 나눠도 살이 썩어들어가고 다리를 절고 기어코 죽게 만들던 저주가 몇 번이고 당신을 죽였으니까요.”

“…….”

“저는 다시는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르베우타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를 잠시 응시하던 세실레의 안색이 차츰차츰 굳었다.

한참을 침묵하던 그녀의 입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샜다.

“……저주라니.”

질린 얼굴을 한 세실레에게로 나직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세렌디는 당신의 행복을 바라지 않습니다.”

“…….”

“테레사도 루베르도 결국 세렌디의 말에 따를 뿐이죠.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당신이 기억을 잃기 전 달로 돌아가지 못하게 해달라 제게 부탁을 했겠습니까.”

“말도 안 돼.”

세실레가 주춤 이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아르베우타가 세실레의 어깨를 잡으며 재차 말을 이었다.

“세실레. 신은 당신 생각만큼 이상적이지 않습니다. 그녀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잔혹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러기엔 너무 여려.”

세실레가 고개를 들어 아르베우타를 바라보았다.

확신으로 가득한 눈동자에서 붉은빛이 일렁였다.

“결국, 당신이 선택할 문제입니다.”

“……선택.”

세실레가 시선을 피했다.

선택을 종용하는 말이 지금만큼은 너무나도 날카롭게 들려왔다.

세실레의 입에서 나른한 숨이 흘렀다.

그녀는 잠시 침묵하다가 먼저 걸음을 뗐다.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얼마든지요. 여태껏 기다렸으니 보름은 제게 긴 시간이 아닙니다.”

세실레는 말없이 신전으로 향했다. 아르베우타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내 온화하던 둘 사이에 다시금 찬 바람이 불었다.

더운 여름 낮이었다.

***

테레사는 황후궁 지붕에 앉아 신전으로 향하는 세실레를 바라보았다.

루베르도 마찬가지였다.

서늘한 바람에 땀을 식히고 있던 루베르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테레사.”

“……말씀하십시오.”

“보름의 첫날이야 소감이 어때?”

담담한 물음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비웃음도 동정도 아니었다.

그저 선선히 소감을 묻는 것에 테레사가 헛웃음을 뱉었다.

“소감이랄 것이 있습니까? 그저 때가 왔을 뿐입니다.”

“……때가 왔다, 라.”

뜻밖의 발언에 루베르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그러나 테레사의 표정은 여전히 덤덤했다.

그녀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세실레의 동태를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황후 폐하께서도 희생하시지 않습니까. 결국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 세상은 움직이는 것입니다. 제 목숨이 그분께 도움이 된다면 저는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네 말이 맞아.”

루베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은백색 머리칼이 바람에 반짝이며 빛났다.

얼마간 머물지 않았으나 지상의 공기는 루베르의 마음도 흐려놓기에 충분했다.

온갖 희로애락이 얽힌 곳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이토록 괴로운 일이었다.

그건 엄마도 마찬가지일 테다.

‘어차피 달로 돌아가면 다 잊힐 테니.’

지금의 사랑도 슬픔도 한낱 기억 조각에 불과했다.

세실레가 달에 가 신이 되면 없어질 감정이었다.

희생은 잠깐이었다.

그간 세실레가 지상에서 겪은 인고의 시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테니.

‘보름만 괴롭고 말 일입니다.’

세실레의 고통은 이제 딱 보름만 남은 것이다.

보름의 혼란이 지나면, 세실레는 진정 새로이 태어날 터였다.

그때가 되면 저 무지한 아르베우타도 깨달으리라

감히 인간이 신을 탐하는 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지.

그 또한 그저 세실레의 승계를 위해 희생당한 제물에 불과했다.

주제를 모르고 날뛴 것은 그의 미련함이었다.

덕분에 엄마가 더욱 괴로워지지 않았나.

하지만 승계 직전의 혼란은 신이 될 자의 마지막 고비였다.

루베르는 희게 질린 세실레의 얼굴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마음껏 우세요, 엄마. 이게 마지막 눈물이 될 테니.”

루베르는 신전으로 향하는 세실레를 응시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떠나려는 그를 보고 테레사가 물었다.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엄마를 데리고 와야지.”

지붕 위에 올라섰던 몸이 사뿐히 땅에 닿았다.

루베르는 세실레가 걸었던 곳을 그대로 밟으며 자그맣게 속삭였다.

“테레사, 티타임을 준비해줘. 엄마가 목이 많이 마르실 테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