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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달에서 온 이들을 믿지 않았다.
언제고 목적을 위해 그녀에게 시련을 내릴 줄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기에 세실레 또한 기억을 되찾을 때까지 그녀가 달로 돌아가지 못하게 막아달라고 부탁한 것일 테다.
그러니 아르베우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세실레의 귀환을 막을 생각이었다.
그는 세실레에게 단 하나 남은 안식처가 되어주고 싶었다.
뿌리 깊게 박혀,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고 기댈 곳을 제공하는 든든한 고목 나무처럼.
비록 너무 오래되어 텅 비고 말라버려, 썩어 비틀릴지라도.
겉으로 보기엔 흠 하나 없이 위풍당당한 채로 남아 그녀 곁을 지킬 생각이었다.
적어도 세실레가 기억을 되찾을 때까지는.
그때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너무 늦어 후회할 시간조차 남지 않았으니 아르베우타는 배는 서두를 생각이었다.
그가 손을 내려, 조심스레 세실레의 눈가로 손을 가져다 댔다.
그제야 응분을 쓰며 맺혀있던 눈물이 손가락을 타고 흘렀다.
다가온 인기척에 세실레가 놀라선 고개를 들었다.
아르베우타는 눈을 홉뜬 그녀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자꾸 이러시면 제 마음도 찢어집니다.”
“…….”
“너무 아파서, 웃어주었으면 하는데.”
볼 가에 닿은 손이 세실레의 입매를 매만졌다.
꼭 웃어달라 칭얼대는 아이의 어리광 같아서 세실레는 느리게 입꼬리를 휘었다.
어색한 것이 느껴질 만큼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아르베우타는 세실레를 바라보며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햇볕 같은 찬연함이었다.
세실레는 무심코 그에게서 빛이 난다고 생각했다.
세실레는 잠시 숨을 멎고 아르베우타를 응시했다.
그러자 아르베우타가 그녀의 손을 다시금 잡아당겼다.
“음식이 식겠습니다. 갈까요?”
“……네.”
세실레는 그의 손을 마주 잡고 걸음을 뗐다.
손끝으로 온화한 온기가 스며들었다.
덩달아 서걱거리며 얼어붙은 가슴이 차근히 녹아내렸다.
언제까지 갈 온기인지 모르면서도 세실레는 그를 놓을 수가 없었다.
***
정원에 테이블이 놓였다. 그 위로 평소 아르베우타의 식사보다 배는 풍요로운 음식이 놓였다.
결혼 후 처음으로 함께 하는 아침이었다.
그를 의식했던지 시녀들의 움직임이 분주했다.
그러나 막상 당사자들은 즐거운 표정이 아니었다.
자리에 앉아 놓이는 음식을 바라보던 세실레는 조용히 눈을 내리감았다.
부드러운 수란도 맛깔스러운 베이컨도 잔잔한 향을 내는 홍차도.
먹어도 소화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세실레가 움직임을 멎자 아르베우타 또한 식기를 들지 않았다.
그는 심각한 낯을 한 세실레를 바라보며 일부러 가볍게 말을 이었다.
“슬슬 여름이 가려는 모양입니다. 밤이 되면 바람이 서늘하더군요.”
“……맞아요. 저도 어제…….”
세실레는 애써 말을 이으려던 입을 다물었다.
어젯밤 테레사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 탓이었다.
그녀는 울고 슬퍼하며 저를 붙들고 애원했다.
제발 달로 돌아가 달라 빌었다.
그러나 세실레는 아르베우타에게 차마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 또한 테레사와 같이 절박했었다.
울음을 겨우 참아내며 기억을 되찾기 전까지는 지상을 떠나지 말라고 애원했다.
그래서 그러겠노라, 떠나지 않겠다 약속한 것이 얼마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약속을 어길지도 모른다니.
세실레는 혼란스러웠다.
그녀의 혼란스러움을 아르베우타 또한 알았다.
‘더 모른 척하기도 힘들겠군.’
잠시간 고민을 마친 아르베우타가 먼저 입을 뗐다.
“……달로 돌아가지 마십시오.”
갑작스레 튀어나온 말에 세실레가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테레사가 한 말을 아느냐는 듯 세실레의 눈동자 가득 의문이 담겼다.
하지만 아르베우타는 무어라 더 설명하는 대신, 담담히 그가 고민하던 것을 토해놓을 뿐이었다.
“그래도 정 돌아가셔야겠으면, 남은 시간 동안 기억을 되찾으려 노력하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아르베우타.”
세실레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가 무엇을 바라는지는 알았다.
자꾸만 제 기억을 언급하는 걸 보면 잊힌 기억 속에 무언가 중요한 게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헛된 바람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되찾으려 노력해서 됐으면 벌써 모든 기억을 되찾았을 것이다.
세실레가 씁쓸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약속해요. 어떻게 노력하면 좋을지 모르겠지만.”
“미련을 남기시면 됩니다.”
“……미련이요?”
뜻밖의 말에 세실레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아르베우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이곳에서 하고 싶은 것들을 잔뜩 만들어 두십시오. 떠나야 한단 말은 못 들은 척하며 미래를 꿈꾸다 보면 무언가 떠오를지도 모릅니다.”
뜬구름 잡는 말이었지만 세실레는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세실레는 아직 이곳에서 하고 싶은 일이 많았으니까.
디젤라가 쟈르스와 사귀는 걸 알아차린 부모님의 반응도 궁금했고 그녀의 결혼식도 보고 싶었다.
만약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도 보고 싶었고 또한.
우리의 아이도 보고 싶었다.
세실레는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할 말을 삼키며 겨우 말을 이었다.
“약속할게요.”
“…….”
“다음 보름달이 뜨기 전까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할게요. 그러니까…… 제가 약속을 어기게 되더라도 이해해 줘요.”
세실레가 떨리는 눈으로 아르베우타를 바라보았다.
그를 한참이고 응시하던 아르베우타의 입에서 힘없는 웃음이 흘렀다.
“……그거면 됐습니다.”
지난번 그리도 매달리며 애원하던 것이 납득하기 힘들 정도로 순순한 반응에 세실레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말을 고르는 중에, 다시금 아르베우타가 입을 열었다.
“대신.”
그새 엄중해진 목소리가 널따란 정원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저도 보름간 가만히 기다리지만은 않을 겁니다.”
“……무슨 수가 있나요?”
세실레의 물음에 아르베우타가 찬찬히 말을 이었다.
“제가 신전을 조사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얼마든지요.”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사전에 신관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편이 좋겠지만, 그들 또한 세실레가 그러자고 하면 고개를 끄덕일 테다.
설령 그들이 막아서더라도 강제로 이행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남은 보름의 시간,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싶었으니까.
‘테레사가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아야 할 필요도 있고.’
조금 전은 감정적이었으나 앞으로는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할 예정이었다.
그래야 조금의 후회라도 덜 수 있을 테니.
‘끌려가듯 돌아가진 않을 거야.’
그 순간, 머릿속으로 선뜩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안돼!]
정신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고성에 세실레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러자 아르베우타가 자리에서 일어나 세실레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가 흔들리는 세실레의 눈을 보며 나직이 속삭였다.
“저만 보십시오.”
“…….”
“저만 보고 저만 생각하십시오. 머릿속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든 신경 쓰지 말고 감각을 제게만 집중하십시오.”
세실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청명하던 벽안이 흐릿하게 풀려 있었다.
눈물이 맺혀서라거나 피곤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세렌디가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를 바라보던 아르베우타가 눈매를 설핏 찌푸렸다.
세렌디가 이토록 강경하게 나서는 걸 보아하니, 각성자의 힘이 커지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 거겠지.
‘급하긴 급한가 보군.’
세렌디는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명령을 받은 테레사와 루베르도 세실레를 극도로 조여올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달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게끔, 앞으로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것이다.
그 전에 세실레가 기억을 되찾아야만 했다.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어떤 방법으로든 세실레는 흔들리고 말 테니까.
‘그러려면 우선 신상을 찾아야겠지.’
지하의 신상, 그것을 깨부수면 문을 열기 위해 모였던 힘이 약해질 것이다.
그 틈에 세실레가 모든 기억을 되찾길 바라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아르베우타는 우선 세실레를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주며 속삭였다.
“우선은 여기 계십시오.”
“……당신은요?”
세실레의 눈빛이 흐렸다. 몹시 지치고 피곤해 보이는 안색이었다.
그새 수척해진 얼굴을 훑던 아르베우타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신전으로 가 보겠습니다.”
세실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대답할 기력도 없어 보였다.
아르베우타는 답을 기다리는 대신 먼저 걸음을 뗐다.
한참이고 멀어져가는 그를 응시하던 세실레도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흐렸던 머리가 조금 개었다. 몸을 움직이는 데도 큰 무리가 없었다.
세실레가 아르베우타 가까이 다가서선 말했다.
“저도 도울게요.”
“……저 혼자서도 괜찮습니다.”
“내 일인데, 손 놓고 있고 싶지 않아요.”
그새 눈동자에 단호한 빛이 깃들었다.
그녀를 바라보던 아르베우타는 잠시 숨을 고르다, 느리게 말을 이었다.
“생각보다 충격적인 것을 보게 되실지도 모릅니다.”
“괜찮아요.”
“하지만…….”
아르베우타가 입을 다물었다.
딱딱해진 낯을 보아하니 영 내키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를 지켜보던 세실레의 입에 얼핏 웃음이 맺혔다.
조금 전 일로 죽을 때의 기억이 난 탓이었다.
방금도 그때와 비슷한 공포와 허망함을 느꼈다.
마치 무언갈 그녀에게 일깨워주려는 듯이.
잠시 고민하던 세실레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사실 난 죽었어요.”
“무슨 말을 그렇게…….”
아르베우타는 채 말을 잇지 못하고 표정을 굳혔다.
세실레의 죽음은 한두 번 목격한 것이 아니었으나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그 일을 세실레가 기억하고 있을 리 없었다.
기억했다면, 그녀는 지금 아르베우타를 처음 만났던 날의 기억까지 가지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순순한 웃음을 짓고 있는 세실레는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저것은 비유적인 표현일 것이다. 비유적인 표현이어야만 했다.
스산한 느낌에 아르베우타의 잇새로 힘이 실렸다.
그를 지켜보던 세실레가 마치 꿈을 꾸는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때쯤일 거예요. 내가 죽었던 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