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떠나셔야 합니다.”
“……어디로?”
“달로, 떠나셔야 합니다. 폐하.”
“허튼 말을 하는구나.”
세실레는 테레사에게서 몸을 돌렸다.
그러나 곧 테레사에 의해 붙잡혔다.
테레사가 세실레의 팔에 매달려 울부짖었다.
어느덧 바닥을 딛고 단단히 서 있던 다리는 꿇어앉은 채였다.
“폐하, 꼭 떠나셔야 합니다.”
애절한 눈동자를 바라보던 세실레가 느리게 입을 뗐다.
“큰일이라, 내가 이곳을 떠나는 것이 더 큰 일 아닌가? 나는 제국의 황후이고 달이 성녀이며 악령을 물리치는 존재인데.”
스스로 입에 담기 사뭇 부끄러운 말이었으나 사실이었다.
테레사 또한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니 세실레는 테레사가 제 말을 이해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테레사는 도리어 그렇기에 떠나야 한다, 소리쳤다.
“세렌디께서 명이 경각에 달하셨습니다.”
“……신이 죽어?”
“네. 신은 죽습니다. 그러니 승계를 위해 당신이 있는 겁니다. 폐하, 돌아가지 않으면 오키드리아 대륙은 물에 가라앉을 겁니다.”
“……그럴 리가.”
“거짓말이 아닙니다, 폐하.”
세실레는 낯을 굳혔다.
그러곤 되도록 이성적인 시선으로 테레사를 살피려 노력했다.
지금, 누구보다 비합리한 말을 하는 테레사는 어느 때보다도 절박해 보였다.
항상 무표정하던 얼굴이 괴로운 듯 일그러졌다.
그녀를 괴로운 표정으로 응시하던 세실레가 고개를 돌렸다.
테레사는 며칠 새에 눈에 띄게 수척해졌다.
혈색이 돌던 피부는 창백하다 못해 푸른 기가 돌았고 손목 두께가 전보다 반은 줄었다.
마른 근육으로 둘러싸여 탄탄하던 몸도 순식간에 말랐다.
그런 주제에 테레사는 제 몸을 돌보긴커녕 세실레를 붙잡고 울부짖었다.
제발 달로 돌아가 달라며 그녀는 울었다.
흐느끼는 목소리에 잠에 서 깬 시녀들이 방문 밖에서 괜찮으시냐 물을 정도로, 테레사는 간절하게 빌었다.
“신이시여, 정녕 우리를 버리려 하십니까.”
“…….”
“달이 추락하면 인간들만 죽는 것이 아닙니다. 달에 기거하는 모든 이도 함께 죽습니다. 당신을 어머니처럼 따르는 저와 루베르와 같은 이들이 수없이 많은데, 정녕 그들을 버리실 겁니까.”
“……거짓말.”
“분명 후회하실 겁니다. 떠나지 않으면 후회합니다, 반드시.”
참으로 잔인한 말이 아닌가.
진짜인지도 거짓인지도 모르는 말을 따르라 종용하다니.
저 말을 하는 사람은 심지어 테레사였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저를 배신할 리 없다고 굳게 믿어온 테레사.
세실레는 당면한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녀의 입에서 나직한 숨이 흘렀다.
“……생각해볼게.”
“꼭 가셔야 합니다.”
테레사의 애원에 세실레가 완곡히 대답했다.
“보름이 가기 전에 답을 줄 테니, 너도 가서 쉬어.”
테레사는 입을 다물었고 세실레는 테레사에게서 몸을 돌렸다.
테레사에게 잡혔던 소맷자락이 힘을 잃고 나풀댔다.
가볍게 걸친 침의가 지금은 돌처럼 무거웠다.
세실레가 바닥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밖에선 시녀들이 무슨 일이냐며 쉼 없이 방문을 두드렸다.
그제야 테레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깊이 숙였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테레사가 방을 나섰다. 그 앞으로 시녀들이 무슨 일이냐며 수군대는 것이 보였다.
세실레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창밖을 보았다.
휘영청 밝은 달이 떠올라 있었다.
흰 달이 세실레의 시선을 앗아갔다.
멍한 눈으로 달을 응시하던 세실레의 입에서 기다란 한숨이 흘렀다.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아르베우타는 그녀가 기억을 되찾기 전엔 절대 달로 돌아가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테레사는 당장 보름 뒤면 대륙이 가라앉고 달이 추락할 것이라 했다.
세실레에게 있어, 두 사람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욱 괴로웠다.
그녀가 사랑하는 두 사람이 서로 상반된 말을 해서.
그녀는 가느다란 희망의 끈을 잡듯, 사실 테르델이 테레사로 변장한 건 아닐까 고민해봤다.
하지만 아니었다.
수십 번을 보아도 테레사는 테레사였다.
비쩍 마른 몸과는 달리, 그녀에게선 유달리 신력이 넘쳐흘렀다.
새하얀 은빛 무리가 테레사의 몸에서 쉼 없이 솟아났다.
테레사의 정순한 힘을 느껴보던 세실레는 눈을 힘주어 감았다.
혼란스러웠다.
어째서 제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원망스러울 정도로.
세실레가 고개를 느리게 떨구었다.
***
아르베우타는 새벽같이 일어나 연무장으로 갔다.
가볍게 몸을 풀고 대련을 마친 후 아침을 먹는 게 아르베우타가 아침을 보내는 순서였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해가 뜨기 전, 이른 아침부터 힘차게 연무장을 뛴 그는 침실로 돌아왔다.
이젠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을 차례였다.
그런데 어째선지 시종들의 움직임이 소란스러웠다.
“무슨 일이지?”
아르베우타의 물음에 허둥대던 시종 하나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저……황후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세실레가?”
아르베우타의 안색이 단번에 밝아졌다.
세실레가 먼저 그의 공간에 방문한 건 단연코 처음이었다.
그는 시종이 문을 열어주길 기다리는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 성급히 손을 뻗어 직접 문을 열었다.
안에는 가벼운 드레스 차림을 한 세실레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세실레는 내리쬐는 햇볕을 받은 채 있다가, 아르베우타를 발견하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르베우타.”
“여기까지 어쩐 일입니까?”
아르베우타가 세실레의 손등 위로 입 맞추며 물었다.
세실레는 그의 물음에 눈을 깜빡이다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따로 용건이 있는 건 아닌데, 그냥…….”
세실레는 무어라 말을 하다 말고 시선을 피했다.
하고 싶은 말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아르베우타는 재촉하지 않고 세실레가 먼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가나긴 침묵에 그제야 세실레가 느리게 입술을 달싹였다.
“……같이 아침을 먹고 싶어서요.”
숨기는 것이 있는 게 분명한 얼굴이었으나 아르베우타는 재촉하지 않았다.
세실레가 무얼 말하려는지 조금은 짐작되었으니까.
‘어젯밤 테레사가 세실레의 침실에서 난동을 피웠다지.’
침착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테레사가 세실레를 붙들고 고성을 내질렀단다.
게다가 테레사는 지난밤 신전에서 긴 시간을 보내기까지 했다.
내내 비밀이라곤 없는 듯 굴었으면서, 도르데아가 행적을 묻자 입을 다물어 버렸다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달의 문을 열려고 하는 것이다.
세실레를 기어코 그곳으로 끌고 가려는 심산인 게 분명했다.
‘두고 볼 줄 알고.’
아르베우타는 세실레를 달로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기억을 잃기 전, 세실레가 아르베우타에게 당부한 사항이기도 했다.
그녀와의 약속이었다. 아르베우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약속을 지킬 생각이었다.
그는 애써 그린듯한 웃음을 지으며 속삭였다.
“그러시군요. 마침 식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네.”
세실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색이 좋지 않은 얼굴이 희게 질렸다.
세실레를 살피던 아르베우타가 그녀의 두 뺨을 쓸어올리며 말했다.
“우울해하시는 얼굴도 아름답지만, 저는 웃는 모습을 더 보고 싶습니다.”
“……그,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운 거예요?”
기운 없던 얼굴에 열이 화끈 올랐다.
세실레는 무심코 아르베우타와 시선을 마주하곤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녀의 시야로 아르베우타의 진중한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장난과는 어울리지 않는 다부진 얼굴에 설핏 웃음이 어렸다.
날카로운 눈매 끝에 맺힌 서글함에 가슴이 시렸다.
어째선지 그를 마주하기가 부담스러워졌다.
아르베우타의 얼굴을 차근차근 응시하던 세실레가 느리게 시선을 떨궜다.
‘헤어지기 싫다.’
무심코 떠오른 생각에 세실레의 낯이 다시금 차게 식었다.
머리칼이 떨어지며 시야를 가렸다.
아르베우타는 바닥만 응시하는 세실레의 손을 들어 올리며 나직이 말을 이었다.
“가시죠. 햇볕을 쐬며 식사하다 보면 금방 기분이 좋아질 겁니다.”
“……그러겠죠.”
세실레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떨떠름히 대답을 마친 혀끝이 썼다.
‘이게 무슨 짓이야. 먼저 찾아오고선 실례잖아.’
하지만 영 표정을 풀 수가 없었다.
기실 세실레는 쉴 곳을 찾아 헤매는 방랑자처럼, 무심코 아르베우타의 기척을 좇아 침실에 들어섰다.
부부라고는 하지만 남들 보이기에 낯 간지러운 장면이었다.
고지식한 귀족이 보았다면 황제 부부가 예의범절도 모른다며 혀를 찰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르베우타의 침실로 오는 걸음걸음, 남들의 시선 따윈 의식되지 않았다.
세실레는 그저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힐 안식처가 필요했다.
어째선지 그의 얼굴을 보면 모든 게 괜찮아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막상 아르베우타를 마주하고 나니 가슴이 미친 듯이 뛰며, 머릿속으로 폭풍 같은 혼란이 밀려들었다.
떠나기 싫었다. 어째서 제게 찾아온 실낱같은 행복을 이대로 포기해야만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테레사에게서 등 돌리기도 싫었다.
전부 욕심이 났다. 둘 중 누구 하나도 포기하기 싫었다.
그런데 그건, 욕심이었던 걸까.
‘어째서 욕심을 부리면 안 되는 거지.’
이제야 조금 행복해졌다고 생각했다.
소소한 일상을 되찾았다고 생각했다.
하루마다 즐거운 일이 생겼다.
삶의 의미가 생기려 했다.
하지만 그런 건 허락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이런 시련이 닥치고야 말지.
세실레가 입술을 악물었다.
눈꼬리에 맺힌 눈물은 기어코 흐르지 못했다.
그저 더운 숨을 삼키며, 최대한 그럴듯한 낯빛을 유지하려 애쓸 뿐이었다.
티가 나지 않게. 그래서 아르베우타가 그와 한 약속을 어길지도 모른단 걸 알지 못하게끔.
세실레는 목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설움을 애써 묻었다.
그러나 티가 나지 않을 리 없었다.
아르베우타는 세실레의 눈빛만 봐도 그녀의 감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르베우타는 세실레의 여리게 떨리는 눈꺼풀을 바라보며 나직이 숨을 뱉었다.
‘가엾은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