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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힘을 쓰면.”
“쓰면?”
“짐승으로 변합니다.”
갑작스러운 고백에 세실레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강가에서 테르델과 싸울 때는 안 변했잖아요.”
“전력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
“물론 일부분이 바뀌어, 황급히 숨긴 적도 있습니다.”
“설마, 눈을 가렸을 때의 일인가요?”
“그땐 꼭 잡아야 할 것 같아서……. 속여서 죄송합니다.”
아르베우타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는 민망한 듯도 부끄러운 듯도 했다.
몸 둘 바를 모르는 그를 응시하던 세실레가 웃음을 터트렸다.
‘저렇게 안절부절못하다니.’
무슨 대단한 비밀을 말하려나 했다. 그런데 짐승이라니.
토끼나 강아지 따위를 상상한 세실레는 아르베우타가 짐승으로 변한 모습을 꼭 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아르베우타는 웃음의 의미를 다르게 해석했다.
그의 입에서 황급히 변명이 흘렀다.
“그, 그게. 짐승이긴 한데. 막 그렇게 이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군요.”
“귀엽지도 않지만, 아니, ……귀엽다고 했나.”
“귀여운 거군요.”
담담한 목소리에 아르베우타가 고개를 저었다.
“덩치만 큽니다.”
사실을 고백하는 아르베우타는 낯이 화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어지간히 치부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보여 달라 조르고 싶었으나 곤란해할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여기엔 그의 비서관과 디젤라까지 있지 않은가.
‘단둘이 있을 때면 보여주겠지.’
세실레는 디젤라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럼 식물은 뭘까요? 식물로 변하나?”
“그런 건 아닐 겁니다. 제 능력은 동물의 신체 능력을 빌려 쓰는 것이니, 디젤라 양은 식물의 힘을 빌리겠군요.”
“……식물의 힘?”
식물이 무얼 하느냐고 물으면 선뜻 떠올리기 힘들었다.
잎사귀를 푸릇하게 물들이고 열매를 피운다.
그런데 그걸 사람이 한다고 생각하니 상상하기 어려웠다.
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가장 먼저 정적을 깬 건 아르베우타였다.
“아마도 치유 쪽이 아닐까요? 약초라던가.”
“으음, 그럴 수도 있겠네요.”
아르베우타와 세실레가 의견을 나누는 사이, 디젤라가 투덜대며 말했다.
“치유라니! 나도 멋진 힘을 갖고 싶어!”
디젤라가 쾅, 발을 굴렀다.
그 순간 땅이 진동하더니 숲의 나무가 뿌리를 드러냈다.
쾅, 와지직, 우지끈.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나무가 뛰어오르더니 다시 땅속으로 숨었다.
그것을 보고 있던 쟈르스의 입에서 심란한 목소리가 흘렀다.
“……난 끝이다.”
***
세실레 일행은 짧은 외유를 마치고 황궁으로 돌아왔다.
짐이 몇 없는 데다 비밀리에 떠난 외유라 맞이하러 나온 사람은 많지 않았다.
시종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동안, 도르데아는 조용히 뒤에 서 있었다.
평소와 같은 엄한 얼굴에 불안함이 깃들었다.
그녀는 불안한 눈동자로 주변을 훑다, 황제를 발견하곤 걸음을 옮겼다.
그녀를 발견한 아르베우타가 황궁 뒤편을 향해 눈짓했다.
신전과 이어진 오솔길이었다.
황후가 잠들면 그리로 오라는 뜻이었다.
은밀한 신호에 도르데아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
세실레는 간만의 외출에 금세 잠들었다.
그간 황후궁으로 온 서신과 선물 내역을 간략하게 읊은 뒤, 세실레의 취침을 돕던 도르데아는 어둠을 틈타 오솔길로 숨어들었다.
그곳엔 아르베우타가 서 있었다.
그는 도르데아를 발견하곤 심각한 낯으로 말했다.
“친위대에게서 보고는 들었다.”
“……테레사가 무엇을 꾀하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친위대가 알아낸 것은 테레사가 신전 곳곳을 헤매던 것뿐이었다.
그 뒤로는 불현듯 튀어나온 은빛의 힘에 시야가 가려지더니,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친위대 기사의 보고를 떠올리던 아르베우타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렀다.
“루베르가 손을 써서 따돌린 모양이야.”
“루베르 군이요?”
“그대도 그 아이가 평범한 아이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겠지.”
도르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베르에 대해선 평범한 시녀들 사이에서도 말이 나오고 있었다.
그는 성인 어른도 열기 힘든 문을 번쩍 열고 분명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홀연히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게다가 루베르는 황후 앞에서만 아이처럼 굴었다.
황후 폐하가 자리에 안 계시면 그리도 오만방자할 수가 없었다.
하는 말이며 행동이며 시녀들을 마치 아랫사람처럼 부리듯 굴었는데, 거기에 불만을 가진 이가 많았다.
하지만 황후궁의 내밀한 사정이었다.
도르데아는 루베르와 관련한 말이 밖으로 흐르지 않도록 단단히 입단속 했다.
그런데 황제는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한다.
도대체 그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인지.
도르데아는 침묵했다. 그러나 아르베우타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자네가 꼭 해주어야 할 일이 있네.”
“무엇입니까.”
“앞으로 테레사와 루베르가 하는 말, 행동 따위를 모두 내게 보고하도록.”
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도르데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 방법을 물었다.
“어떻게 전할까요.”
“내가 직접 가지.”
“……네?”
“이곳에 나처럼 기척을 잘 숨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
“들키면, 세실레를 보러 왔다고 하면 되고.”
그럴듯한 말에 도르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아르베우타는 시선을 돌려 신전을 바라보았다.
신전에서 지독한 피 냄새가 났다.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어둑한 지하, 찌든 피로 가득한 곳에 다시금 생피가 들이부어 졌다.
테레사의 냄새였다.
비릿한 향을 맡던 아르베우타가 코끝을 찡그리며 웃었다.
“쉬이 내줄 줄 알고?”
***
고요한 황후궁의 침실로 새까만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체불명의 사람은 더위를 쫓으려 살짝 열어놓은 창 틈새로 몸을 비집고 들어와 세실레의 옆에 섰다.
얇은 커튼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더니 조용히 가라앉았다.
바로 옆에서 느껴지는 스산한 시선에 세실레가 조용히 잠에서 깼다.
‘테르델인가.’
세실레는 근래에 감각이 몹시 예민해졌다.
덕분에 아주 작은 소음에도 잠에서 깨는 부작용이 생겼다.
그래서 그녀는 신전으로 통하는 오솔길에서 아르베우타와 도르데아가 나누는 이야기까지 모조리 들어버렸다.
거기까진 아무래도 좋았다.
아르베우타가 저 몰래 도르데아에게 임무를 맡길 정도로 주시해야 하는 상황인가 싶었으니까.
하지만 낯선 이의 침입이라니.
경계하던 세실레는 곧 그자의 신원을 파악하곤 느리게 눈을 떴다.
어른거리는 은빛의 힘, 테레사였다.
“……테레사?”
세실레의 물음에 내내 모습을 보이지 않던 테레사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숙면을 방해하여 죄송합니다.”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어디 갔다 온 거야?”
“주변을 순찰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왜 피 냄새가 나?”
테레사가 조용히 세실레를 응시했다.
테레사에게서는 처음 보는, 무기질적인 시선이었다.
언제고 충성심과 경외로 가득한 시선을 보내던 테레사는 마치 돌덩이 보듯 세실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낯선 시선에 세실레가 의아함을 느꼈다.
그러나 찰나였을 뿐이다. 테레사는 금방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변에 짐승이 있었습니다.”
“……그래.”
지나치게 얄팍한 변명이었다.
테레사는 단 한 번도 들짐승을 앞에 두고 칼을 휘두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세실레는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도리어 어째서 아르베우타가 그런 부탁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무언가 숨기고 있군.’
하지만 속내를 겉으로 드러내서, 괜한 경계심을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었다.
세실레는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나 테레사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한여름에도 얼음장처럼 추웠다.
하지만 세실레는 개의치 않고 경계하듯 몸을 빼는 테레사를 향해 말했다.
“고생 많이 한 모양이네. 차라도 마실래?”
“……괜찮습니다.”
“마침 나도 잠이 오지 않아. 그럼 내 말 상대라도 되어줘.”
“……알겠습니다.”
테레사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을 푼 그녀는 평소의 테레사의 모습과 같았다.
세실레가 느끼기에도 테레사는 테레사였다.
무슨 비밀이라도 있는지 자꾸만 거짓말을 하고는 있었지만.
세실레가 테레사의 모습을 오롯이 담았다.
그녀는 회귀 전부터 세실레를 따르던 충신이었다.
또한 저를 오랫동안 보호해온 신수라고 했다.
그렇기에 세실레는 테레사를 믿었다.
테레사가 무슨 비밀을 숨기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세실레와 방향을 달리한다면, 과감히 쳐낼 생각이었다.
‘마지막 밤이 될지도 모르겠군.’
세실레는 더는 힘 들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진실을 고백한 아르베우타를 믿고 싶었다.
게다가 테레사는 평소에도 아르베우타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봤었다.
루베르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둘이서 나와 그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거라면.’
그땐 세실레가 둘에게서 등을 돌릴 생각이었다.
그러니 세실레는 그들이 허튼 말을 하지 않기를 바랐다.
더는 제 주변의 사람을 잃기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테레사의 입에서 나온 것은 의외의 말이었다.
“폐하, 곧.”
평온하던 테레사의 낯이 그새 희게 질려 있었다.
그녀의 뒤로 떠오른 것은 커다란 보름달이었다.
찬란한 달빛 아래서 테레사는 마치 물가에 내던져진 물고기처럼 밭은 숨을 내쉬었다.
“곧 달로 가는 문이 열릴 겁니다.”
달, 또 달 이야기인가.
어쩐지 지긋지긋해진 세실레가 지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나더러 어찌하라는 거지?”
세실레는 테레사가 또 기다리라는 말 따위를 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테레사는 어느 때보다 진지한 낯으로 세실레를 응시했다.
그녀는 몹시도 간절하고 애처로워 보였다.
당장이라도 바스러져 세상을 떠날 듯 보였다.
세실레의 눈에 언뜻 테레사의 영혼이 보였다.
희미하게 부서진 영혼은 더는 세상에 머무를 힘이 없어 보였다.
세실레가 놀라선 중얼거렸다.
“테레사, 너 도대체…….”
테레사는 변명조차 하지 않았다.
도리어 마지막 힘을 끌어내듯 목울대부터 긁어내는 목소리로 호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