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준비해 온 식사를 마친 후 수련이 시작되었다.
오늘은 디젤라가 처음으로 능력을 쓰는 법을 배우는 날이었다.
그렇기에 모두가 디젤라를 주목했다.
갑자기 시선 집중을 받은 것이 부끄러운지 디젤라가 툴툴거렸다.
“왜들 이렇게 쳐다봐?”
디젤라의 수련을 도우러 온 것이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세실레는 집중을 못 하는 디젤라를 엄하게 꾸짖었다.
“디젤라. 집중해야지.”
“……나도 알아.”
디젤라는 그제야 깊이 숨을 내쉬고는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러곤 아르베우타가 말한 대로 무언갈 느껴보려 노력했다.
다른 이들은 디젤라가 무언갈 발현할 때까지 기다릴 뿐이었다.
능력을 끌어내기까지는 아무도 도움을 줄 수 없었다.
그나마 세실레가 눈을 감곤 디젤라의 힘에 변동이 있나 살필 뿐이었다.
하지만 꽤 오랜 시간, 디젤라는 별다른 진척이 없었다.
정확히는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낯선 듯 디젤라는 자꾸만 주변을 힐긋거리며 눈치 보기 바빴다.
허둥대는 그녀를 바라보던 세실레가 다시금 엄하게 꾸짖었다.
“디젤라. 딴짓하지 말고.”
“으, 하지만!”
“할 수 있어.”
하지만 디젤라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부루퉁한 얼굴을 보니 단단히 심사가 뒤틀린 모양이었다.
세실레는 디젤라가 갑자기 왜 저러나 싶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디젤라가 돌연 뾰족한 소리로 외쳤다.
“언닌, 아무것도 몰라!”
“……갑자기?”
“언니는 다 잘했으니까 그렇지. 난 이런 거 못 해.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야, 진짜.”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세실레의 입에서 물음이 흘렀다.
“내가 다 잘했다고?”
그건 크나큰 착각이었다.
세실레 또한 각고의 노력 끝에 얻어낸 것이었다.
게다가 이능을 제외한 다른 것들은 디젤라도 노력하면 충분히 지닐 수 있었다.
세실레와 같은 신비한 능력도.
무엇보다 디젤라는 얼마 전만 해도 새로운 힘을 가지게 된다며 흥분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디젤라가 저런 말을 하는 이유는.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속상하구나.’
머리와는 달리,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가 많았다.
게다가 디젤라는 오늘 처음으로 수련을 시작했다.
많은 눈이 지켜보고 있으니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디젤라의 마음도 이해가 됐다.
세실레는 씩씩대면서도 흘깃대며 눈치를 살피는 디젤라를 보며 중얼거렸다.
‘귀엽긴.’
숨을 고른 세실레가 차분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알아. 많이 힘들지?”
“……안 힘들거든.”
“우리가 너무 갑작스러운 걸 요구했을지도 몰라.”
“…….”
“괜찮아, 오늘 힘들면 내일부터 시작해볼까?”
사근사근한 물음에 디젤라가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아, 언니가 엄마야?”
그제야 세실레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이제 할 마음이 좀 생겼어?”
세실레의 차분한 청안을 마주한 디젤라가 괜히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내가 언제 하기 싫다고 했나…….”
하기 싫다고 했다. 방금도 지금도, 내내 투덜거리지 않았나.
그러나 아무도 디젤라의 변명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세실레는 웃었고 아르베우타도 웃었으며 쟈르스만이 못마땅한 듯 꿍얼거릴 뿐이었다.
“……다들 오냐오냐하니까 버릇이 나빠지지.”
“쟈르스, 지금 뭐라고 했어?”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긴. 방금 내 욕했지!”
“그럴 리가요. 저는 디젤라 님께서 옥체 보전하시어 더욱 강한 여성이 되시길 바라 마지않고 있습니다.”
디젤라는 정중한 척 고개를 숙이는 쟈르스를 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말은 잘하지.”
말은 저런 식으로 하지만 디젤라는 쟈르스가 자신을 못마땅히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잘 모르는 디젤라가 보기에도 쟈르스의 기준은 엄격했다.
그 또한 그 기준에 맞춰 살려 노력해왔고 말이다.
디젤라는 그러한 쟈르스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영 섭섭함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순순히 디젤라의 편을 들어준 적이 없었다.
어린 애 다루듯 하거나 어쩔 수 없이 수긍할 뿐이었다.
그런 일이 반복될수록, 디젤라는 쟈스르가 자신을 좋아하는 게 맞는지 의심했다.
그토록 깐깐한 사람의 눈에 자신이 들었다는 사실이 의아해진 탓이었다.
그저 언니의 명령에 따르는 건가 싶어 불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디젤라는 쟈르스와 떨어져서 지낼 수 없었다.
이미 그는 디젤라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됐다.
잠시라도 떨어져서 지내는 것 자체가 상상되지 않았다.
그러니 억지 응원이라도 받아낼 생각이었다.
‘싫어도 어쩔 수 없어. 못 놔주니까.’
굳은 결심을 마친 디젤라가 당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응원해줘.”
“……네?”
쟈르스가 안면을 뻣뻣하게 굳혔다.
느리게 돌아가는 목에선 뼈 소리라도 날 듯했다.
그러나 디젤라의 표정은 단호했다.
말을 무를 생각은 없는지, 디젤라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생기 넘치게 빛났다.
그녀를 살펴보던 쟈르스가 냉큼 입을 열었다. 더한 요구를 하기 전에 선수 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디젤라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쟈르스를 향해 속삭였다.
“싫,”
“춤추고 노래하면서 응원해줘. 그래야 힘이 날 것 같아.”
“…….”
“쟈르스가 춤추고 노래하는 게 아니면, 싫어.”
또박또박한 목소리에 쟈르스는 마치 사형 선고라도 받은 듯이 몸을 굳혔다.
그는 숨조차 쉬지 못하고 굳어버렸으나 디젤라는 개의치 않았다.
도리어 고개를 기울이며 쟈르스를 재촉할 뿐이었다.
“언제 해줄 거야. 응원. 이러다 해지겠다.”
디젤라의 투정에 모두의 시선이 쟈르스를 향했다.
황제 내외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여기서 시간 끌지 말고 빨리 응원이나 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나라의 주축이자 최고 권력자인 황제 부부를 앞에 두고 꾀부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게 쟈르스는 아니었다.
쟈르스의 꿈은 고향으로 돌아가 호의호식하며 사는 것이었고 그러기 위해선 황제에게서 어마어마한 재산을 뜯어내야만 했다.
이미 약속한 광산이며 휴양지만 몇이던가.
그것들을 떠올리던 쟈르스가 입술을 악물었다.
고작 응원 때문에 포기할 순 없었다. 어차피 관중은 단 셋뿐이었다.
먼 고대에 황제를 위해 제 자식을 바친 인간도 있다는데, 가무쯤이야.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이 아닌가.
쟈르스는 눈을 부릅뜨며 디젤라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디젤라가 못내 즐겁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사랑하는 디젤라, 힘내라고 해줘.”
“사……랑하는 디젤라 님. 힘내십시오.”
“그게 뭐야, 더 신나게 불러야지!”
“……사랑, 하는.”
“더!”
“사, 랑, 하, 는, 디젤라님, 힘내십시오.”
기이한 어깨춤과 함께 노래 같지 않은 무언가가 완성되었다.
아르베우타는 대놓고 비웃었고 세실레는 시선을 피해버렸다.
언제 왔는지 세실레의 뒤에 선 사슴마저 눈을 깜빡이다, 못 볼 걸 봤다며 홱 몸을 돌려버렸다.
동물에게마저 외면당한 쟈르스가 수치심에 몸을 떨었다.
그들 중 오직 디젤라만이 흥에 겨워했다.
“더 해줘.”
“……이쯤 하시죠.”
낮은 목소리에 디젤라가 쟈르스의 낯을 살폈다.
쟈르스는 딱 울기 직전이었다.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디젤라가 얄밉게 입꼬리를 비틀며 속삭였다.
“흐응, 네가 그렇게까지 원하니 강한 여성이 되기 위해 노력해볼게.”
얄궂은 속삭임에 쟈르스가 눈매를 굳혔다.
자신이 무어라 할 때마다 디젤라가 약 오른다는 듯 방방 뛸 땐 이유를 몰랐는데, 지금은 알 것 같았다.
디젤라가 말하던 비꼬듯 말하는 게 이런 거구나.
막상 당해보니 기분이 몹시 나빴다.
딱 한 대만 꿀밤을 때리면 바랄 게 없을 정도로.
하지만 그랬다간 황제고 황후고 가만있지 않을 터였다.
디젤라는 그래도 쟈르스는 하면 안 됐다.
그랬다간 목숨이 위험할 테니까.
쟈르스는 이런 법이 어딨냐는 설움을 목으로 삼켰다.
***
수련이 재개되었다.
세실레는 눈을 감고 디젤라의 힘을 살폈고 아르베우타 또한 할 수 있는 만큼의 조언을 해줬다.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따스하던 햇볕이 점점 강해지며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그러나 여전히 디젤라의 힘은 미지수였다.
아르베우타처럼 붉은 기운이 조금이라도 느껴지면 말을 했을 텐데, 그녀에게선 아무런 능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침내 디젤라가 먼저 백기를 흔들었다.
“나 이제 못해! 너무 힘들어!”
그녀는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것이 섭섭한지 와락 짜증을 뱉었다.
그 순간, 세실레는 디젤라의 안에서 피어오르는 무언갈 보았다.
“……디젤라, 방금.”
“몰라, 못해! 아니, 안 해!”
“방금 보였어.”
세실레의 말에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보았다니. 도대체 뭘 보았단 말인가.
하지만 아르베우타만은 그녀의 말을 곧장 알아들었다.
“희미하게 느껴졌는데, 역시.”
“뭐, 뭐야. 뭔데?”
그제야 디젤라도 사태를 파악하곤 흥분해서 외쳤다.
착잡하던 디젤라의 얼굴에 그제야 화색이 돌았다.
드디어 그녀 또한 이능을 갖는 것이다. 언니가 그러듯이.
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었다.
디젤라의 힘을 더 자세히 파악하려면, 수련을 이어가야 했다.
세실레는 디젤라를 응시하며 차근차근 말을 이었다.
“글쎄, 수련을 더 해봐야 알겠지?”
지긋한 시선에 디젤라가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그녀도 신비한 능력을 갖는 것이었다.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물론이지!”
디젤라의 의욕이 활활 타올랐다.
그녀가 방방 뛰는 사이 또다시 눈앞에 힘이 아른거렸다.
세실레는 눈을 감곤 팔랑팔랑 나비처럼 피어오르는 붉은 힘을 가만 바라보았다.
디젤라의 뒤에서 아르베우타 또한 힘을 피웠다.
두 개의 붉은 힘은 같은 듯 달랐다.
세실레는 그들이 하는 양을 눈을 감고 응시하다, 각각의 형태를 그리는 힘에 숨을 삼켰다.
“……이건.”
“뭐가 보입니까?”
아르베우타의 물음에 세실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그녀는 아르베우타의 힘이 무엇인지 정확히 느낄 수 없었다.
테르델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두 사람이 비슷한 힘을 근원에 두고 있다는 것만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르베우타의 힘은 바닥으로 가라앉아 동물의 형상을 그려내었고 디젤라의 힘은 식물의 형상을 그려내었다.
그녀가 본 것을 그대로 말하자 아르베우타가 곤란한 듯 중얼거렸다.
“……이런.”
세실레가 눈을 깜빡이며 아르베우타를 보았다.
덥기 때문이라기엔 아르베우타의 얼굴이 몹시 빨갰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열이 나는 것 같은데.”
“정말로 아무것도 아닙니다.”
세실레가 다가서려 하자 아르베우타가 주춤하며 물러섰다.
그러자 세실레가 의아하다는 듯 한참이고 그를 바라봤다.
집요한 시선에 아르베우타가 기어코 비밀을 실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