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아기도 태어날 때부터 맨몸으로 나오잖아.”
“그건 아기니까 그렇지.”
“그럼 언니는 씻을 때도 가려?”
“당연하지.”
“뭐어? 그게 더 이상해!”
“이상하다니? 그럼 넌 지금까지 다 벗고 씻은 거야?”
세실레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마치 희귀종을 본 듯한 눈빛에 디젤라가 짜증스레 대꾸했다.
“언니도 어릴 때 나랑 벗고 씻었거든?”
“……그래?”
“이것 봐. 황궁 물 먹더니 달라졌어.”
디젤라가 혀를 찼다.
노골적인 비난에 기세등등하던 세실레가 시선을 피했다.
“달라졌다니…….”
“그럼 말해 봐. 왜 다리를 드러내면 안 되는데? 그건 누가 지은 법이래? 언제부터 존재했는데? 증거 있어?”
“증거는 예법 책에…….”
“으, 고리타분해.”
디젤라가 끔찍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아무렇지도 않게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며 불쑥 다리를 내보였다.
“봐봐, 내 다리가 이상해?”
“아니, 예쁘지.”
“그런데 왜 가려야 해?”
“……그러게.”
세실레는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귀족으로서 당연한 행동이라느니, 인간이 짐승과 다른 이유라느니, 따위의 말을 읊었다간 다시금 ’으, 고리타분해.‘라는 말을 들을 것이 빤했다.
도리어 그녀 또한 의문에 빠졌다.
왜 씻을 때마저 갑갑하게 몸을 가려야 하는지.
‘벗어볼까? 그럼 도르데아가 기겁할 텐데.’
갑작스러운 생각에 웃음이 터졌다.
두 눈 가득 경악을 금치 못하며 뒤로 물러설 도르데아를 생각하니 어쩐지 장난기가 일었다.
‘한 번쯤 해볼 만한 가치가 있겠어.’
세실레가 여럿 뒤로 넘어갈 계략을 꾸미는 중에 다시금 시원한 바람이 일었다.
세실레는 자연스레 치맛자락을 붙잡았으나 디젤라는 아니었다.
그녀의 치마가 널리 퍼지며 무릎 위까지 드러났다.
세실레는 별다른 감흥 없이 신나 하는 디젤라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번엔 그늘에서 자리를 정리하던 쟈르스가 황급히 달려왔다.
그는 답지 않게 얼굴을 붉히곤 화급히 소리쳤다.
“무, 뭐 하는 짓입니까.”
“왜? 넌 또 뭐가 문제야.”
“치, 치마가.”
“치, 치마가 뭐.”
뻔뻔한 물음에 쟈르스가 와락 외쳤다.
“치마가 펄럭이지 않습니까!”
똑같은 레퍼토리에 디젤라가 질린 듯 고개를 저었다.
“으휴, 재미없어.”
“재미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건, 이건……폐하, 뭐라고 말 좀 해보세요.”
쟈르스가 세실레를 향해 간곡한 눈빛을 보냈다.
언니 말은 듣지 않느냐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세실레는 이미 디젤라의 말발에 밀린 뒤였다.
세실레가 별다른 방도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자 쟈르스가 안색이 새하얘져선 소리쳤다.
“당신 다리는 저만 볼 수 있단 말입니다!”
불현듯 튀어나온 이야기에 소란하던 언덕이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가장 먼저 침묵을 깬 이는 디젤라였다.
그녀는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윽고 웃음을 터트렸다.
“푸, 푸하하핫. 쟈르스,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웃지 마십시오.”
“내 다리가 그렇게 탐 난단 말이야? 더 보여줄까?”
“……됐습니다.”
쟈르스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자 디젤라가 끈질기게 달라붙어 쟈르스를 약 올리기 시작했다.
“왜, 더 봐. 너한테만 보여줄게.”
“괜찮습니다.”
“보고 싶다며. 괜찮아, 네 거 해. 어차피 너는 내 거니까.”
“저는 제 것입니다!”
그러나 울분을 토하는 것과는 달리 쟈르스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디젤라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걸 보면 쟈르스도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아르베우타가 세실레에게 다가오며 재밌다는 듯 중얼거렸다.
“녀석, 재밌게 사는군.”
아르베우타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깃들었다.
둘을 보는 눈동자엔 얼핏 부러움이 묻어나는 듯도 했다.
아르베우타를 지켜보던 세실레가 고개를 기울여 물었다.
“당신도 보고 싶어요?”
“……네?”
“……농담이에요.”
세실레가 시선을 피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거지?’
충동적으로 뱉은 말이었다.
그러나 막상 말하고 보니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괜히 먼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날씨 너무 좋네.”
뜬금없는 말에 아르베우타가 웃음을 터트렸다.
커다란 웃음소리에 괜히 부끄러워진 세실레가 고개를 돌렸다.
“그냥 해본 말이라니까요.”
“그렇습니까.”
하지만 아르베우타는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그는 더욱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세실레를 향해 말했다.
“아쉽군요. 저는 보고 싶었는데.”
“……네?”
“본 지 너무 오래되어서요. 당신 다리, 저도 보고 싶습니다.”
“뭐, 뭐라는 거에요!”
세실레가 학을 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아르베우타는 개의치 않았다.
도리어 세실레에게 바짝 달라붙어 사근사근 속삭였다.
“저는 당신의 소유입니다. 그러니까 숨기실 이유가 없지요.”
“아뇨. 폐하는 폐하의 것입니다.”
“싫습니다. 저는 당신의 것이 되고자 합니다.”
“거절하겠습니다.”
매정한 대꾸에 아르베우타가 세실레를 번쩍 안아 올리며 물었다.
“정말로요? 정말로 저를 거절하실 겁니까?”
순식간에 높아진 시야에 세실레가 황급히 아르베우타의 어깨를 붙잡았다.
등과 엉덩이를 단단히 받쳐 몸엔 흔들림이 없었지만, 깜짝 놀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세실레는 눈을 크게 뜨곤 아르베우타를 바라보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이, 게, 무슨 짓이에요!”
그새 푸른 눈동자에 책망하는 기운이 서렸다.
아르베우타는 세실레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돈해주며 조곤조곤 속삭였다.
“놀랐습니까?”
“다시는 그러지 말아요.”
하지만 아르베우타는 말없이 미소 지을 뿐이었다.
심상찮은 웃음이었다.
세실레가 왜 그러느냔 표정으로 바라보자, 아르베우타가 돌연 매혹적으로 입꼬리를 휘며 말했다.
“싫습니다.”
“……네?”
“당신의 것도 되지 말라 하시고 다리를 보여준다더니 아니라고 하시고. 이런 법이 어딨습니까. 안는 건 제 맘대로 할 겁니다.”
“……그게 무슨 억지에요. 어서 내려줘요.”
세실레가 디젤라 쪽을 흘깃 살폈다.
단둘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붙어있으려니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하지만 세실레의 걱정과는 달리 디젤라와 쟈르스는 노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뭘 하는지 두 사람의 입에는 샌드위치가 하나씩 물려 있었다.
잠깐만 한 눈을 팔면 이상한 짓을 벌인다.
우스운 상황에 세실레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렀다.
“뭐 하는 거람.”
그러자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한눈을 파시는군요.”
목덜미를 파고드는 숨결에 세실레가 깜짝 놀라선 손사래 쳤다.
“그, 그게 아니라.”
화들짝 놀라는 모습에 아르베우타는 괜한 장난기가 일었다.
그래서 그는 괜히 놀리듯 말을 이었다.
“지금 저를 앞에 두고 누굴 보신 겁니까. 쟈르스?”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러나 아르베우타는 이미 늦었다는 듯 웃을 뿐이었다.
이미 그의 입술은 목덜미를 파고든 지 오래였다.
목선을 타고 오르는 간지러움에 세실레가 숨을 급히 들이켜며 외쳤다.
“수, 수련한다면서요.”
“……한 시간 정도는 괜찮습니다.”
“한 시간이요?”
세실레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러자 아르베우타가 눈만 들어 물었다.
“그럼 두 시간?”
“장난치지 말아요.”
세실레는 금방 장난인 걸 알아차렸다.
아르베우타의 눈동자 가득 장난기가 서글서글 어려 있었다.
도대체 왜 그런 장난을 하느냐고 꾸짖고 싶은데, 아르베우타의 웃음이 너무나도 시원해 보였다.
그제야 딱딱하게 다물린 세실레의 입가에도 웃음이 서렸다.
세실레는 한참 샌드위치로 난리를 피우는 디젤라 쪽을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잠깐은 괜찮을지도 모르겠네요.”
쥐꼬리만 한 속삭임이었으나 아르베우타는 용케 알아들었다.
그는 세실레가 말을 물리기 전에 그녀를 안아 든 채 숲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무 등치는 두 사람이 몸을 숨기기에 좋았고 서늘한 그늘은 더위를 식혀 주었다.
여름철 풀벌레 소리가 어찌나 요란한지 어지간한 소리는 모조리 묻힐 정도였다.
아르베우타는 제 외투를 벗어 바닥에 깐 다음, 세실레를 앉혔다.
그러곤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자리는 마음에 드시나요?”
답지 않은 퍼포먼스에 세실레가 대답했다.
“……장난치지 말고 와서 앉아요.”
“분부대로.”
아르베우타는 성큼 세실레의 곁에 앉았다.
앉았다기보다는 완전히 몸을 끌어안는 자세였다.
무심코 와닿는 온기에 세실레는 느리게 숨을 내쉬었다.
아르베우타는 달싹이는 세실레의 입을 가로막곤 속삭였다.
“더 뭐라고 하지 마십시오.”
세실레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아르베우타의 가슴에 보란 듯 몸을 기댔다.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는 데다 아르베우타는 분명 기대라고 이렇게 앉았을 테니까.
따스한 체온이 세실레를 감싸 안았다.
더울라치면 산바람이 일어, 청량하게 땀을 식혔다.
등 뒤를 든든한 몸이 받치는 것이 이리도 기분 좋을 줄이야.
‘언젠가 한 번 이렇게 안긴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세실레가 몽롱해진 머리로 생각을 이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조금 졸렸다.
그녀는 조금 더 자세를 편히 잡아보려는 욕심에 아르베우타의 허벅다리에 손을 댔다.
그러자 아르베우타가 돌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수, 수련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쉰다면서요?”
“……갑자기 몸이 찌뿌둥하네요.”
아르베우타는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걸어 나가는 귀 끝이 붉었다.
세실레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푸르른 녹음 속에서 검갈색 머리칼이 유독 두드러졌다.
위풍당당한 걸음걸이엔 주저함이라곤 없었다.
그는 이 숲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도리어 숲을 정복하러 온 것 같은 기세등등함이었다.
아르베우타를 지켜보던 세실레의 얼굴에도 열이 올랐다.
세실레는 괜히 고개를 숙인 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왜 이런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