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테레사에게 저를 돌보는 것 말고 다른 일이 있던가.
낯설었으나 세실레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일전에도 신전에 들른 적이 있댔지.’
테레사 또한 신수라고 했다.
그녀가 따로 맡은 임무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더라도 개인사가 있을 수도 있고.’
테레사가 괜한 꾀를 부리는 이는 아니니, 더 물었다간 실례가 될 수도 있었다.
생각을 마친 세실레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쩔 수 없지.”
“불충을 용서하십시오.”
“불충까지야.”
세실레가 괜찮다는 듯 웃었다.
때마침 멀리서 디젤라의 활기찬 물음이 들려왔다.
“언니! 아직도 준비 안 끝났어?”
“이제 끝났어.”
세실레는 별다른 생각 없이 몸을 돌렸다.
간만의 외출이었다.
***
세실레 일행이 자리를 떠난 후, 테레사는 신전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녀가 막 떠나려던 차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도르데아였다.
도르데아는 잠시 간의 요양 중이라, 시녀복이 아닌 간편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테레사가 멈칫하자 도르데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딜 가는 겁니까.”
……상관 마십시오.”
날카로운 대꾸에 도르데아가 헛숨을 터트렸다.
평소의 테레사답지 않았다.
원래의 그녀라면 어딜 가고 언제쯤 돌아올지 따위를 낱낱이 보고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테레사는 그러지 않고 자리를 비우려 하고 있었다.
인상은 날카로워졌고 눈동자에 거짓이 깃들었다.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뜻이며, 그로 인해 테레사 또한 괴로워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도르데아는 오랜 세월 동안 참으로 많은 사람을 만나왔다.
그간의 연륜이 말하기에 테레사는 떳떳하지 못한 것을 숨기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껏 정의롭게 살아온 테레사가, 황후에게도 비밀로 하고 벌이는 일이라니.
도르데아는 썩 예감이 좋지 않았다.
미묘하게 일그러진 테레사의 낯을 바라보던 도르데아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황후 폐하께선 싫어하실 겁니다.”
테레사가 몸을 굳혔다.
도르데아는 제 추측이 제법 맞아 들었음을 눈치채곤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당신이 하려는 일을 폐하께서도 못마땅히 여기실 겁니다. 못난 종을 구하러 오신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
정곡을 찌르는 말에 테레사는 느리게 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러나 대답과는 달리 테레사는 즉시 걸음을 뗐다.
도르데아의 말을 이해는 하되 마음먹은 일을 주저하진 않을 모양새였다.
‘분명 후회할 텐데.’
도르데아는 혀를 찼다.
그러곤 황제가 남긴 친위대를 향해 속삭였다.
“가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지켜보시오.”
“네.”
본래 황명만을 받드는 친위대는 잠시, 도르데아의 명을 따랐다.
황후가 도르데아를 신뢰하는 것을 안 아르베우타가 혹여나 그녀의 안위를 위협하는 이들을 감시하라 붙인 것이었다.
그때는 왜 그런 걱정을 하나 싶었는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도르데아는 제 손에 쥔 쪽지를 조심스레 펼쳐 들었다.
날림체로 적힌 쪽지엔 지엄한 황명이 적혀 있었다.
신전과 그 무리를 주시하라.
황제는 이미 무언가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러나 도르데아는 황제의 영민함보다도 이제 막 평온이 깃든 황궁에 일어날 일들이 두려웠다.
“일이 어찌 되려고,”
쪽지를 든 주름진 손이 잘게 떨렸다.
***
테레사는 어두운 표정으로 신전을 찾았다.
그녀의 등장에 지나가던 신관들이 먼저 안부를 물어왔다.
“성녀님의 호위기사가 아닙니까. 성녀님은 잘 지내시는지요?”
그러면 보통 테레사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러노라 답해주곤 했다.
가끔은 신이 나선 세실레의 자랑을 늘어놓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테레사는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고는 걸음을 뗐다.
의아한 행동에 신관들이 의문을 표했으나 테레사는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루베르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신전 곳곳을 돌아봐도 루베르가 없었다.
신전의 신력이 강해, 루베르의 위치를 정확히 찾아내는 것이 어지간히 어려웠다.
마지막으로 모퉁이를 돌아보던 테레사가 얼굴을 구겼다.
“도대체 어딨는,”
“나 찾아?”
돌연 모습을 드러낸 루베르에 테레사가 불쾌한 낯을 하고는 중얼거렸다.
“……미리 좀 나오지 그러셨습니까.”
“그래서 기분 나빠?”
“아닙니다.”
그러나 표정은 영 아니었다.
대놓고 짜증을 표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주저함은 묻어 있지 않았다.
루베르는 테레사를 한참이고 응시했다.
자신을 희생해서 문을 열어야 한다는 신탁을 받고도 테레사는 별다른 동요가 없어 보였다.
‘겉으로만 그런지는 몰라도.’
속내가 어떠하든 평소처럼 버티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신께서 왜 엄마 곁에 붙여놓았는지 알겠군.“
세렌디는 언제고 세실레를 위한 희생양이 필요할 때가 오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테레사는 희생양에 가장 어울리는 존재였다.
뒤탈 없이, 묵묵히 저를 불 싸지를 만한 존재였으니까.
그러나 루베르에게 있어, 희생이란 그다지 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당장 그만해도 세렌디를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하고 희생했는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제는 그 대상이 세실레로 바뀌었을 뿐이다.
’전부 엄마를 위해서야.‘
루베르는 심심찮은 감상을 접곤 대답했다.
“그래. 알겠지만 엄마가 알아선 안 돼.”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오늘도 정화 작업을 시작하지.”
“네.”
루베르는 선심 쓰듯 테레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조막만 한 손을 내려다보던 테레사가 그 손을 잡았다.
그러자 세실레의 은빛의 기운보다는 거뭇한 빛이 흘러나와 둘을 감쌌다.
둘은 신전의 지하에 도착했다.
퀴퀴한 곰팡내로 가득한 지하는 성스러운 신전에 자리한 곳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음습했다.
군데군데 오래된 핏자국이 말라붙어있고 빛을 밝히는 초 하나 없이 어두웠다.
오직 하나, 여신의 신상만이 새하얗게 빛났다.
그러나 신상마저도 눈에서 검붉은 눈물을 흘렸다.
신상의 얼굴을 따라 발치에 고인 호수는 청명한 호숫물과는 달리 붉었다.
파동 하나 없이 잠잠한 호수를 바라보던 루베르가 딱딱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준비는 되었나.”
“네.”
테레사는 망설임 없이 외투를 벗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붉은 물이 테레사의 발끝에 닿는 순간, 악문 잇새로 채 삼키지 못한 신음이 흘렀다.
“……큭.”
그러나 테레사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호흡이 가빠지고 들어가기 싫은 몸이 바둥대도, 기어코 호수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이윽고 호수가 테레사를 삼키고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루베르의 입에서 나지막한 숨이 흘렀다.
“……미련하기는.”
루베르 또한 테레사가 겪는 고통을 알았다.
돌이켜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사지가 떨릴 정도의 통증이었다.
견디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문을 열기 위해선 테레사의 신력을 최대로 증폭해야 했으니까.
테레사는 이미 오랜 시간 지상에 머무르며 오염되었다.
오염을 씻어내고 온전한 힘을 되찾기 위해 정화 작업은 필수였다.
루베르는 다시금 잠잠해진 호수를 응시하다,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무렇지 않아 했던 얼굴에서 눈물이 흘렀다.
루베르는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아내었다.
불필요한 감정이었다.
그가 짜증스레 중얼거렸다.
“이래서 어린 몸이 싫어.”
어려지지 않았다면 느낄 리 없었을 감정이, 단단하던 루베르의 마음에 균열을 내고 있었다.
***
세실레 일행은 완만한 언덕에 자리를 잡았다.
커다란 느티나무가 세워져 있는 언덕이었다.
사방이 숲에 둘러싸여, 인기척이라곤 없었다.
새 지저귀는 소리와 시냇물 흐르는 소리, 여름치고는 서늘한 바람이 부는 장소에 일행 모두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가장 먼저 함성을 터트린 것은 디젤라였다.
“와, 너무 좋다!”
그녀는 바깥 외출을 해본 적이 없었다.
저택을 빠져나와 황궁까지 오기는 했지만, 그때도 언니에게 항의하겠다는 일념으로 가득해 제대로 주변을 살피지 못했다.
사람으로 북적이는 도심은 물론이고 이렇다 할 자연 광경마저 본 적이 없었다.
평생을 갇혀 살아온 디젤라에게 빽빽하게 솟은 나무 사이로 덩그러니 놓인 언덕의 풍경은 놀랍기만 했다.
“진짜 멋지다!”
디젤라는 아이처럼 방방 뛰었다.
일전의 아프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힘이 넘쳤다.
디젤라가 신나 하는 사이 쟈르스는 돗자리 위에 샌드위치며 과일 따위를 늘어놓았고 아르베우타는 세실레의 모자가 날아갈 것 같다는 핑계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아르베우타의 품에 안겨 디젤라를 지켜보던 세실레의 입가에 웃음이 서렸다.
“……정말 행복하다.”
무심코 나온 말에 어째선지 눈앞이 흐려졌다.
열이 오르는 눈을 두어 번 세게 감았다 뜨고 나니 센 바람이 불어 머리칼이 흩날렸다.
은백색 머리카락이 요란하게 시야를 가리는 중에 디젤라의 치맛자락도 함께 날렸다.
방방 뛰며 온전히 바람을 맞이하는 통에 다리가 언뜻 드러났다.
눈앞에 보이는 살 색에 세실레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디젤라, 조심해야지!”
“으응? 뭘? 뱀이라도 있어?”
“뱀은 무슨! 옷이 날리잖아.”
“그게 뭐 어때서?”
“어떠냐니!”
세실레가 아르베우타의 품에서 벗어나 디젤라의 앞으로 갔다.
흥분했음에도 뛰지 않는 걸음은 마치 무도회를 거닐 듯 가뿐했다.
당사자조차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몸에 밴 교양은 오래된 교육의 결과였다.
아르베우타가 사뿐히 사라지는 세실레를 보며 헛헛한 웃음을 뱉는 사이, 세실레는 디젤라를 향해 설교를 시작했다.
“디젤라. 다리를 보이는 건 남녀노소 불문하고 부끄러운 일이야.”
“그게 왜 부끄러운데?”
“가려야 하는 부분이니까.”
세실레가 당연한 걸 묻느냐는 표정으로 답했다.
그러나 디젤라는 시큰둥할 뿐이었다.
“왜? 난 쟈르스의 맨다리도 봤는걸?”
“그, 그건……사귀는 사이니까.”
세실레가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채 시선을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