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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77화 (7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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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님을 뵙습니다!”

“대륙의 달을 뵙습니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제각각의 외침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세실레는 체면을 잊고 바닥에 엎드린 이들을 바라보면서 느리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에게도 느껴졌다.

이들의 경외심이 잔잔한 물결처럼 일었다, 해일처럼 그녀를 덮쳐오는 것을.

손끝이 저릿해지고 몸에 힘이 차올랐다.

의식해서 힘을 쓰지도 않았는데 환한 빛이 터지며 식장을 환히 밝혔다.

환한 대낮임에도 보름달이 뜬 밤보다 강한 힘이 느껴졌다.

공기 중으로 부스러지는 은빛의 찬연한 빛이 장례식장을 가득 메웠다.

이들 중 대부분은 세실레의 이능을 처음 보았다.

처음으로 마주하는 이능은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

찬란한 빛무리에 귀족들이 시선을 빼앗겼다.

이것은 지금껏 제국을 수호해왔고 이 년간의 지옥 같은 세월을 물리친 성녀의 힘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광경에 곳곳에서 탄성이 터졌다.

이곳이 장례식장이라는 것을 잊을 정도로 그들은 세실레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열에 들뜬 눈빛이 세실레를 향했다.

세실레는 앞에 서서 절 보며 눈물을 터트리는 귀족들을 둘러보았다.

그 누구도 감히 세실레와 시선을 맞추지 못했다.

아무도 비웃거나 시험하듯 세실레를 보지 못했다.

눈동자 가득 들어찬 경외심에 세실레의 가슴마저 떨렸다.

숨이 벅찰 정도로 차오르는 울컥함에 세실레가 눈살을 찌푸릴 무렵, 머릿속으로 가느다란 웃음이 터졌다.

[……나의 딸.]

세실레는 그제야 대신관이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식을 이끌어갈 용기와 능력이 저절로 생기실 테니.’

그래서 세실레는 식순조차 몰랐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제 장례를 치르던 때를 떠올리며 그대로 하면 될 일이니.

하지만 걱정은 무색해졌다.

대신관의 말이 옳았다.

세실레는 무얼 하면 될지 저절로 알 수 있었다.

추모사 같은 건, 불필요한 일이었다.

그녀는 귀족들에게서 시선을 거두곤 바닥에 놓인 관을 보았다.

백합으로 둘러싸인 관 안은 텅 비어 있었고 대신 황태후의 영혼이 원망 가득한 눈동자로 세실레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황태후는 죽어서도 괴로워 보였다.

그녀의 사지는 지하에 휘감겨 있었고 얼굴은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세실레는 황태후를 바라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왜 여기 있습니까. 가엾게도.”

죽으면 세렌디의 곁에서 안식한다는 것은 어린애도 아는 일이었다.

하지만 황태후는 달로 올라가지 못했다.

아니, 올라갈 수 없었다.

집념과 원망이 그녀를 이리 만들었다.

병든 얼굴은 괴로움에 일그러져 있었다.

차오르는 연민에 세실레는 황태후를 향해서 손을 뻗었다.

그러자 황태후가 수일을 굶주린 사냥개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더는 다가오지 말라는 경고와 같았다.

그러나 억압된 영혼은 물러서지 못했다.

그저 움찔거리며 회피하고픈 제 욕망을 분노로 가릴 뿐이었다.

나약한 모습에 도리어 세실레의 엉겨 붙은 슬픔이 사그라들었다.

세실레는 손을 뻗어 헝클어진 황태후의 머리카락을 쥐었다.

그러자 어둡게 물들었던 머리가 순식간에 투명한 빛으로 화했다.

그럴수록 황태후는 발악하며 사나운 울음을 흘렸으나 세실레는 그녀의 머리를 쥔 손을 놓지 않았다.

황태후가 몸부림쳤다.

세실레의 팔을 잡고 긁고 물었다.

그러나 팔뚝을 할퀸 상처는 순식간에 나았다.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세실레는 무심한 낯으로 황태후를 내려다보았고 그럴수록 황태후는 수치심에 몸을 떨었다.

갈수록 반항은 옅어졌다. 대신 서러운 울음이 울려 퍼졌다.

마침내 황태후의 영혼이 완전히 투명하게 되자, 세실레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 어디로든 가세요.”

구천을 떠도는 것도, 달에서 안식하는 것도 더는 세실레의 관할이 아니었다.

황태후가 알아서 할 일이었다.

하여 세실레는 몸을 돌려 다시금 귀족들을 쳐다보았다.

그러곤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례는 이것으로 끝입니다.”

생전 처음 보는 추모에 귀족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어찌할 바를 모르곤 침을 삼킬 뿐이었다.

그러자 묵묵히 자리를 지키던 황제가 일어나 세실레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세실레의 왼손을 잡아 올리며 말했다.

“다들 돌아가 추모의 잔을 들어라. 장례는 이것으로 끝이다.”

황제 부부는 별궁에서 사라졌다.

그 뒤를 따라 신관들 또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황태후는 여전히 빈 관 위에서 흐트러진 채로 울고 있었다.

귀족 중 몇몇은 황태후가 눈에 보였다.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소리는 들렸다.

귀족들은 무너지듯 주저앉은 채 허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무얼 본 거지.”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에 그들은 넋이 나간 채 한참이나 그러고 있었다.

***

장례가 끝난 후, 제국은 고요했다.

세실레와 관련하여 묘연한 소문이 돌기는 했으나 그만큼 그녀를 추앙하는 이들 또한 늘었다.

장례식에 참석했던 귀족들은 하나같이 경외를 표하며 황후궁에 선물을 보냈고 신전의 기부금 또한 산처럼 쌓였다.

덩달아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하던 세렌디테 공작 가에도 수많은 관심이 주목되었다.

디젤라의 귀환만을 바라며 전전긍긍하던 공작 부부는 난데없이 몰린 인파에 놀라움을 표했다.

“이게 무슨 일이죠?”

세렌디테 가문의 일원들은 혼자서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공작 부부가 특히 그랬다.

이 사실을 깨달은 귀족들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그들은 한사코 손사래 치는 공작 부부에게 성의에 불과하다며 거한 선물을 주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황후와 연을 트려는 집요한 움직임이었다.

소식을 전해 들은 아르베우타는 세실레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

“이대로 놔두면 문제가 생길 겁니다.”

“……어쩌면 좋을까요.”

세실레는 가족들을 보고 싶기도, 보기 싫기도 했다.

디젤라와는 어찌어찌 사이가 좋아졌다지만, 부모님과의 골마저 메워진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세실레는 아르베우타에게 선택을 미뤘다.

그가 변방에 가족들을 숨기자 해도, 황궁으로 모시자 해도 그러겠노라 고개를 끄덕일 생각이었다.

‘황궁에 모시자고 하겠지만.’

아르베우타가 예상한 대로의 말을 꺼냈다.

“궁은 넓습니다. 황궁으로 모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좋아요.”

세실레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외면하고 살았던 산을 다시금 마주한 기분이었다.

‘언제고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이제 가족과의 골을 해결할 때도 되었다.

그러나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막 장례식을 마친 뒤라 더더욱.

세실레가 내키지 않는 표정을 하자, 아르베우타가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싫으시면 다른 방법을 찾겠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세실레는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아르베우타가 조심스레 그녀의 어깨를 안았다.

어느샌가 익숙해진 체온에 세실레가 나지막이 숨을 내뱉었다.

자그맣게 들썩이는 가슴을 바라보던 아르베우타가 일부러 장난스러운 웃음을 머금곤 속삭였다.

“역시 상심하셨군요. 제 얼굴을 보지 않는 걸 보아하니.”

“……그럴 리가요!”

세실레가 항변하듯 고개를 돌렸다.

억울하다는 듯 크게 뜨인 눈과는 달리 볼 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르베우타는 말캉한 볼을 쓰다듬으며 자그맣게 속삭였다.

“기분이 저조하면, 놀러 갈까요?”

“……놀다니요. 아직 테르델 건도 남아있고 밀린 업무도 많습니다.”

엄중한 목소리에 아르베우타가 웃음을 터트렸다.

돌연 웃는 그를 세실레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도대체 왜 웃는 것인지, 제 말의 어디가 웃긴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의 뾰로통한 표정을 응시하던 아르베우타가 산뜻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럼 수련을 하는 것으로 하죠.”

“수련?”

“마침 디젤라 양도 수련을 시작할 때가 되었으니까요. 그리고 당신도 이능을 연습하겠다고 했잖습니까. 색다른 환경은 수련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연습을 핑계로 놀러 가자는 거군요.”

정확한 지적에 아르베우타가 매력적인 웃음을 지었다.

“맞습니다. 저는 당신과 놀고 싶습니다.”

솔직한 발언에 세실레는 말문이 막혔다.

이렇듯 당당하게 놀고 싶다고 말하는 그가 낯설었다.

하지만 세실레는 만면에 퍼진 해맑은 낯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여러 의미로 그는 신기한 남자였다.

지금껏 저렇듯 장난스러운 기질을 숨겨왔다는 점에서 더더욱.

‘하지만 이런 시기에.’

국장을 치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모두가 추모하는 시기에 황가의 야유가 알려지면 득보다 실이 더 컸다.

세실레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녀의 속내를 귀신같이 알아챈 아르베우타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디젤라 양에게 물어보는 겁니다.”

“그건 말도 안 돼요.”

“디젤라 양은 분명 좋다고 할 테니까요?”

“……맞아요.”

세실레는 꾸짖는 듯한 표정으로 아르베우타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아르베우타는 쉬이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속삭였다.

“대신 쟈르스에게도 물어보는 거죠. 둘이 동의하면 과반수가 찬성한 겁니다.”

“그건…….”

“아무리 황후 폐하라 하셔도 과반수가 동의한 일은 따라주시겠죠?”

그녀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러죠.”

***

사실상 결론이 정해진 내기였다.

외출하겠냐는 물음에 디젤라는 환호성을 내질렀고 쟈르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합의를 본 것이 황궁 근처에 잠시 나갔다 오는 것이었다.

은밀한 외출인 만큼 준비할 것은 많지 않았다.

가볍게 짐을 정리하는 중에 세실레가 테레사를 돌아보며 물었다.

“테레사, 같이 갈래?”

그간 테레사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

내내 곁에 붙어서 호위하느라 바빴는데 이렇다 할 보상을 주지 못한 것이다.

궁에 있느라 지쳤을 테니, 잠시 바깥바람을 쐬는 것도 좋을 터였다.

하지만 테레사는 뻣뻣하게 굳은 낯으로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저는 바쁜 일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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