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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하늘도 황태후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라며 제국민들은 통곡하며 울부짖었다.
거리엔 검은 천이 나부끼고 황궁은 창고를 열어 제국민을 배불리 먹였다.
그들이 황제의 자애로움을 칭송할 때, 귀족들은 장례를 위해 황궁으로 모였다.
즐겨 입는 화려한 옷 대신 어두운 색 정복을 차려입은 귀족들이 속속들이 도착했다.
장례가 치러지는 장소는 외궁 뒤뜰에 자리한 소담한 별궁이었다.
별다른 장식 없이 백합으로 가득 메운 별궁에 시신 없는 빈 관이 놓였다.
식장의 뒤에서 모여드는 이들을 지켜보던 세실레가 한숨을 뱉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황태후가 세실레를 정치의 도구로 삼았듯 황태후 또한 그렇게 되었다.
덕분에 황족을 향했던 비난 여론은 순식간에 잠잠해졌고 골칫거리인 황태후의 측근마저 단번에 쓸어낼 수 있었다.
이제 갓난애로 약을 만들려는 이들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테르델은 어딘가에 살아남아 있겠지만, 그가 부리려던 귀족들 또한 다시는 세상 밖으로 나가지 못할 터였다.
그 탓에 가족은커녕 측근조차 없는 식장은 고요했다.
마치 자신의 장례 때 그랬듯이.
한때 제국을 쥐락펴락하던 황태후의 장례였다.
그러나 누구도 황태후를 위해 울고 있지는 않았다.
기시감이 들어서인지 영 마음이 편치 못했다.
세실레는 괜스레 한숨을 뱉다, 뒤편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아르베우타.”
그는 오늘을 위해 검은색 정복을 차려입었다.
뒤로 넘긴 머리카락 덕에 유달리 분위기가 사납게 보였다.
언뜻 보기에 기분이 나쁜 듯도 했다.
‘역시 심란한가 봐.’
세실레가 지레짐작하는 사이, 아르베우타가 걱정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렇게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까.”
세실레는 괜한 걱정을 얹어주고 싶지 않아 부러 가벼운 목소리로 답했다.
“그냥요.”
하지만 아르베우타는 넘겨짚지 않고 캐물었다.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요.”
기어코 얻어낸 답변에 아르베우타가 돌연 낯을 굳혔다.
‘세실레가 장례식에 참여할 일이 있었나?’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도 세실레가 장례식에 참석한 적이 없었다.
그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을 수도 있으나 무언가 찝찝했다.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세실레는 이미 입을 다물었다.
미묘한 웃음을 머금은 입매는 더 말을 이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물어봐도 답해주지 않겠군.’
아르베우타는 무어라 캐묻는 대신 세실레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검은 옷을 입은 다른 이들과는 달리 세실레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었다.
화려한 장식 없이 차분하게 아래로 떨어지는 드레스 라인은 언뜻 보기엔 단출했지만, 자세히 보면 신관복과 양식이 흡사했다.
허리춤에 끈으로 된 매듭을 제외하면 별다른 장식조차 없었다.
‘노인네들 센스하고는.’
아르베우타가 옷에 관해 냉소적으로 평가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이 옷이 신전에서 만들어 바친 옷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것을 모두 차치할 만치, 세실레는 눈이 멀 정도로 아름다웠다.
홀린 듯 그녀를 바라보던 아르베우타는 결국 옷이 세실레와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인정하고야 말았다.
“오늘도 아름다우시군요.”
아부성 짙은 말에 세실레가 실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갑자기 그러니까……적응 안 되네요.”
“이 정도에 낯설어하면 곤란한데요.”
아르베우타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장례를 위해 뒤로 넘긴 머리 덕에 턱선이 눈에 띄었다.
세실레는 멍하니 아르베우타를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잘났다, 특히 얼굴이.
왜 그토록 매정하던 사람에게 설렜는지 단숨에 납득될 정도로 그는 매력적이었다.
그새 그녀를 맴돌던 미묘한 불안이 눈 녹듯 사라졌다.
대신 뚜렷한 심장 박동이 가슴 부근에서 느껴졌다.
세실레는 한참이나 아르베우타를 바라보았다. 그 사이 투명한 볼이 붉게 물들었다.
아르베우타는 저를 응시하는 세실레의 허리께를 껴안으며 그녀의 손등 위에 입 맞췄다.
붉은 눈으로는 오롯이 그녀를 응시한 채로.
“절 보고 얼굴을 붉히시다니.”
“그게 아니라…….”
“영광입니다.”
짓궂은 웃음이 손등 위를 간질이자 세실레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몸을 떨었다.
얼굴을 마주하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남자가 제게 달라붙어선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만두라고 해야 하는 데 도무지 밀어낼 수가 없었다.
도리어 지난번의 입맞춤이 떠올라 심장이 더욱 빨리 뛰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아무리 경우가 없어도 이곳은 장례식장이었다.
세실레는 잡힌 손을 느리게 빼며 중얼거렸다.
“저, 저는 할 일이 있어서.”
“벌써 그렇게 되었군요.”
아르베우타가 아쉬움을 표하며 세실레를 놓아주었다.
조금 전만 해도 군데군데 비었던 식장이 어느덧 사람으로 가득 찼다.
이번 장례는 오롯이 세실레가 진행하기로 했다.
아르베우타는 그저 의자에 앉아 침울한 척 연기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도리어 세실레를 한껏 볼 수 있다는 기대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녀를 지켜보는 것보다 옆에 있는 것이 훨씬 좋았다.
그는 검은색 옷을 차려입은 이들을 바라보며 답지 않게 투덜거렸다.
“떨어지기 싫습니다.”
“……네?”
“하지만 가야겠지요.”
“그러셔야죠.”
세실레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의 그녀는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었는데.
과거를 떠올리던 아르베우타가 씁쓸한 웃음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아르베우타가 무거운 걸음을 뗐다.
세실레는 아무 생각 없이 아르베우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무심코 얼굴을 붉혔다.
곧고 넓은 어깨, 잘록하게 이어진 허리에 기다란 다리가 오늘따라 눈에 띄었다.
저 몸이, 품이 얼마나 좋았는지 잊히지 않았다.
다시금 이상한 생각을 떠올린 세실레가 부러 머리를 크게 저었다.
‘이럴 때가 아닌데.’
처음으로 대중들에게 모습을 내보이는 자리였다.
완벽한 모습을 보이지는 못할지언정 어설픈 마음가짐으로 임할 수는 없었다.
세실레는 마음을 다잡으려 주먹을 쥐었다.
그러는 사이 황제의 입장을 알리는 시종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실레는 다시금 다짐을 잊고 틈새로 아르베우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어떻게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아르베우타가 빤히 시선을 맞춰왔다.
집요한 시선이었다.
잡아먹을 듯 번뜩이는 붉은 눈동자에 세실레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마치 사로잡힌 기분이었다.
무어라 식순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신관들이 입장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세실레는 한참이나 문틈으로 아르베우타를 바라보다가, 도르데아가 몇 번이고 그녀를 부르고서야 가까스로 정신 차렸다.
“폐하? 입장하실 시간입니다.”
“……그래.”
간만의 공적인 행사였다.
그녀에게 오롯이 책임이 주어진 만큼, 떨렸다.
그러나 잘 해낼 것이다.
세실레는 제게 달라붙은 불안을 마저 털어내고는 걸음을 뗐다.
“달의 주인, 고귀한 세렌디의 딸, 세실레 루나루스 세렌디 르 세렌디테께서 드십니다.”
노쇠한 대신관의 목소리가 장례식장으로 울려 퍼졌다.
***
적막한 식장으로 신관들이 와서 섰다.
황제마저 검은 옷을 차려입은 장례식장 안, 새하얀 옷을 차려입은 신관들의 존재는 가히 이질적이었다.
신관들의 걸음은 마치 자로 잰 듯 똑같았고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눈조차 깜빡이지 않는 정적인 모습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귀족들은 신관을 지척에서 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애당초 만날 일이 없거니와 만나려는 노력조차 해본 적 없었다.
지난 이 년간, 사라진 황후를 찾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들의 옆에 서, 뚜렷한 존재감을 표하는 신관들의 기세는 숨 막힐 정도로 위압적이었다.
신관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고개를 숙인 채 겸손한 자세를 취할 뿐이었다.
그러나 결코 좌시할 수 없었다.
그간 어려운 자리를 여러 번 지켜와, 가식과 행세에 익숙한 귀족들마저 시선을 사로잡혔다.
순식간에 고요하던 장례식장에 묘한 긴장이 감돌았다.
귀족들의 눈동자가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매만졌고 꼿꼿이 선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분명, 평범한 장례식과는 달랐다.
가벼운 마음으로 참석한 이들의 낯에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이 침묵을 이어가던 무렵, 내내 침묵하던 신관들이 돌연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러자 맨 앞에 자리한 대신관의 입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달의 주인, 고귀한 세렌디의 딸, 세실레 루나루스 세렌디 르 세렌디테께서 드십니다.”
황후의 귀환 후 정식으로 임하는 공식 업무였다.
덩달아 그녀의 풀네임이 불린 첫 자리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귀족들은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세실레의 패밀리 네임이 여전히 ‘세렌디테’라는 사실을.
성녀는 인세의 규율에 얽매지 않는다.
황후 자리에 앉히는 것은, 황궁의 일원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제국에서 받들어 모신다는 뜻이었다.
고리타분한 역사서에나 적혀 있을 법한 이야기이지만, 귀족들이라면 모두 한 번쯤 들었던 이야기였다.
코웃음을 치고 흘려들었지마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들은 절로 고개를 들어 세실레를 보았다.
초 몇 개로만 빛을 밝힌 어둑한 식장이 순식간에 밝아진 듯한 착각이 일었다.
은백색 머리카락은 흐드러지며 빛을 반사했고 새하얀 드레스 자락에선 잔영이 일었다.
세실레가 등장하자 식장 가득 메운 백합 향을 대신해, 청량한 향이 일었다.
향수로는 낼 수 없는 짙고 맑은 향이었다.
황후는 아무런 꾸밈 없이 수수한 차림이었다.
흰옷을 입었다는 것만 제외하면 화장도, 제대로 된 액세서리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귀족들은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조금 전 신관들에게 압도당한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숨이 막히고 오금이 저리더니, 마침내 가슴께가 뜨겁게 들끓으며 눈물이 고였다.
울지 않는 것을 자부심으로 삼는 노쇠한 기사도, 막 데뷔한 어린 영애도, 깐깐한 중년의 귀족도, 예외는 없었다.
그들은 내내 고상하게 유지하던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거친 숨을 뱉었다.
그러곤 누가 무어라 할 새도 없이 울음을 터트리며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