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세실레가 고개를 들어 아르베우타를 올려다보았다.
충동적인 행동이었으나 후회는 없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로 열이 몰렸다.
멀리서 지켜볼 때부터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서로 살갗을 닿으며 함께하기까지 했다.
아르베우타의 진심을 들으면 홀가분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도리어 갈증이 더욱 짙어졌다.
그러면서 내내 생각해왔다. 디젤라와 쟈르스처럼, 우리도 엉켜 있으면 어떨까 하고.
게다가 둘은 부부였다.
부부라는 사이에 사적으로 무얼 하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입맞춤 정도야 괜찮지 싶었다.
일전 이마에 짧게 입 맞췄을 때도 기분이 좋았으니까.
생각을 마친 세실레가 그의 허벅다리를 손으로 디디며 아르베우타를 올려다보았다.
아르베우타의 입술에 세실레의 이마와 콧등이 스쳤다.
그를 올려다보는 눈동자에 생기가 넘쳐흘렀다.
순수한 호기심과 열망으로 넘쳐흐르는 눈동자에 아르베우타가 헛숨을 터트렸다.
겁도 없이 제게 들이대는 세실레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기억하고 있다면 이런 일을 벌일 리 없지.’
하지만 애석하게도 세실레는 아직 기억을 되찾지 못했다.
그렇다면 갑작스럽게 굴어, 그녀를 놀라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신사답게 구는 수밖에.’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르베우타가 신사다운 키스의 적정선을 고민하는 사이, 세실레가 그의 얼굴을 제 쪽으로 끌어왔다.
그러곤 눈을 꼭 감은 채, 고개를 틀어 그와 입을 맞췄다.
아르베우타는 잠시 망설이다, 이내 숨을 크게 들이켜곤 세실레를 안아 올렸다.
품 안 가득 부드러이 안겨 오는 몸이 품에 꼭 맞았다.
쓰리도록 가냘픈 몸체는 지나치게 가벼웠다.
아르베우타는 팔 하나에 모조리 안기는 어깨를 보듬으며 어설프게 눈을 뜬 세실레를 응시했다.
세실레는 그새 입술을 떼고 호흡을 골랐다.
마치 이것으로 충분한 위로가 되었다는 듯, 희미한 웃음이 깃든 입가엔 뿌듯함마저 묻어나왔다.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눈물이 날 정도로 행복한 감각에 가슴께가 뻐근했다.
더는 놓치고 싶지 않았다.
욕심이 났다.
서두르지 않겠다, 스스로와 한 다짐은 잊힌 지 오래였다.
눈이 벌게지고 호흡이 가빠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오늘 신사답게 굴기로 약속했다.
아르베우타는 흐트러진 세실레의 머리칼을 정돈하며 침묵했다.
손끝을 부드러이 빠져나가는 은백색 머리칼에 손끝이 떨렸다.
‘중병이군.’
그는 서둘러 세실레와 멀어져야겠다는 결론을 내리곤 손을 뗐다.
그러자 세실레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어왔다.
“……왜.”
“…….”
“별로였어요?”
반짝이던 청안이 흐릿하게 물들었다.
모로 휘어진 눈썹을 보고 있으니 내내 유지해오던 신경줄이 뚝, 끊어진 듯한 기분이었다.
아르베우타는 급히 호흡을 고르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럴 리 있습니까.”
“……내키지 않으면 다음부턴 거절해도 괜찮아요.”
“그러지요.”
단호한 목소리에 세실레가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아르베우타를 가볍게 밀었다.
그만 내려달라는 의사 표시였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아르베우타가 그녀를 더욱 힘주어 안은 탓이었다.
얼결에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세실레가 겨우 중심을 잡았다.
그 순간, 아르베우타가 그녀의 손을 잡아채며 중얼거렸다.
“그러면 반대도 괜찮단 뜻이겠지요.”
“……네?”
푸른 눈동자 가득 의문이 담겼다.
그러나 아르베우타는 무어라 더 말을 잇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어느덧 점잖던 붉은 눈동자에 야성이 깃들었다.
세실레는 홀린 듯 아르베우타를 바라보았다.
집요한 시선에 눈조차 감을 수 없었다.
아르베우타는 꼼짝없이 굳은 세실레를 응시하다, 다른 손으로 세실레의 눈을 가렸다.
그러곤 조금 전 나누었던 입맞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세실레의 입술을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저만을 각인하도록. 그리하여 다시는 그를 잊지 못하도록.
한참이고 깊은 입맞춤이 이어졌다.
***
루베르는 신전 앞 거목 나무 위에 올라 황후궁을 응시했다.
몇 날 며칠이고 이어진 행동에 다른 신관들이 루베르를 달래려 노력했으나 소용없었다.
루베르는 끼니도 거르고 내내 나무 위를 지켰다.
고집스러운 행동에 신관들이 혀를 차며 루베르의 처지를 동정했다.
“성녀님께서 불러주지 않으니 상심한 모양이야.”
“어린 것이 버려졌다 여기나 보지.”
“어쩌겠나. 언제고 성녀님이 곁에 있어 주실 수도 없는 노릇이니.”
차라리 잘된 일이란 의견까지 나왔다.
어차피 며칠 저러다 말 것이라고.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모조리 틀렸다.
루베르는 상실감 때문에 이러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추측은 맞았다.
루베르가 얼마 가지 않아 나무에서 내려온 것이다.
보름달이 뜨는 밤이었다.
그간 내내 뜬 눈으로 황후궁을 응시하던 루베르의 눈동자가 결연하게 빛났다.
‘때가 되었어.’
영롱한 눈빛은 몇 날 밤 지샌 어린아이의 것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치 맑았다.
아무것도 먹지 않았음에도 뺨엔 홍조가 돌았고 움직임엔 활기가 느껴졌다.
신관들은 의아하게 여겼으나 루베르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오늘 신탁이 내려오겠군.’
세실레의 힘이 강해졌다. 더불어 아르베우타의 힘 또한 강해졌다.
곧 디젤라 또한 발현할 터였다.
그렇게 되면 엄마의 귀환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 있었다.
그 전에 세렌디가 답을 보낼 것이다.
루베르는 확신할 수 있었다.
오늘이 그날이라는 것을.
“루베르! 이걸 좀 먹……, 어, 어디로 가는 거지?”
그러나 루베르는 대꾸하지 않고 먹을 것을 준비한 신관들 사이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러곤 일전에 세실레가 들어갔던 기도실로 빠르게 몸을 숨겼다.
“루베르! 루베르군! 기도도 좋지만 잠시 식사를 하게!”
밖에서 소란이 일었으나 루베르는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기도실에 앉아 몇 번이고 숨을 골랐다.
기도와 수련은 수백 년간 해온 것이었다.
루베르는 숨을 고르고 빠르게 생각을 비워냈다.
그러자 희미한 목소리가 루베르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시간이 없다, 아가.]
“어떻게 할까요?”
[……제물이 필요하겠어.]
루베르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녀입니까?”
[그래. 테레사. 그 아이를 제물로 바쳐 문을 열어라.]
노쇠한 목소리는 전보다 더욱 힘이 없었다.
루베르는 작은 손이 질리도록 힘주어 쥐며 대답했다.
“네.”
루베르는 감았던 눈을 떴다.
***
황태후의 사망 소식은 제국 전역에 널리 알려졌다.
황제가 불효를 한다던 소문과는 달리 황태후는 전염병을 앓고 있었다고 밝혀졌다.
증거로 황태후 측근의 귀족들 또한 심각한 증세를 보였다.
순식간에 옮는 병이라 했다.
때문에 황태후의 시신은 빠르게 태워버리고 대신 빈 관으로 국장을 치르기로 결정되었다.
더불어 황태후의 측근들 또한 동떨어진 저택 하나를 비워 격리했다.
가솔들은 전염병이란 말에 식겁했고 몇몇 의문을 품는 이들 또한 저들이 저지른 죄가 두려워 함부로 나서지 못했다.
그들이 몸을 사리는 중에 다른 소문이 퍼졌다.
황후궁이 유폐된 것은 전염병으로부터 황후를 보호하기 위함이며, 병의 전파를 막기 위해 황제가 고군분투해왔단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게다가 황태후 파 귀족들이 전염병에서 낫기 위해 갓난애를 납치했다는 말이 돌면서 여론은 점점 황족에게 호의적으로 변했다.
그러는 중에 황궁에서도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오후, 따로 정원에 모인 시녀들의 입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들의 얼굴엔 모두 화색이 돌았고 열띤 목소리는 사그라들 줄을 몰랐다.
“황후 폐하 말이야, 정말 멋진 분 아니니?”
“솔직히 좀 놀랐지.”
“좀이 뭐야, 진짜 깜짝 놀랐어!”
그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먼저 말을 꺼내기 바빴다.
그도 그럴 것이 실종되었던 도르데아를 황후 폐하께서 찾아온 것이다.
잔악한 악당의 손에서 구출해냈다고 들었다.
영웅담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지만, 시녀들이 감격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도르데아는 황후의 훈육 시녀였고 한때 황후를 체벌했다.
당시 황태후의 권력이 막강해 아무도 말을 얹지 못했으나 도르데아가 한 일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일이었다.
당장에 죄를 물어도 이상치 않았다.
실제로 시녀들은 황후가 언제고 도르데아를 처벌하리라고 생각했다.
황태후의 측근과 묶어 한 번에 보낼 계획인 것이 아니냔 말도 돌았다.
그렇기에 황후의 무심한 행보에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녀들 또한 그간 황후를 모심에 부족함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그러한 의심은 모조리 사라졌다.
정말로 황후가 저들을 용서했단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따라서 시녀들은 도르데아의 귀환과 동시에 가문 곳곳에 ‘안심해도 좋다.’는 편지를 보냈다.
덩달아 그녀들 또한 긴장을 놓았다.
황후궁의 폐쇄 조치는 풀어졌고 도르데아는 귀환했으며 황후의 여동생도 정신을 차렸다.
더는 몸을 사릴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새삼 떠오른 사실에 시녀 하나가 소탈한 웃음을 뱉었다.
“정말 잘 됐지, 뭐야.”
“잘 된 정도니? 나는 한 달 내로 고향에 돌아갈 생각이었어.”
“이젠 남아있으려고?”
“얘는. 당연한 걸 물어.”
활기찬 웃음이 번졌다.
파릇한 꽃이 핀 정원에 퍼지는 웃음이 맑았다.
이제 남은 것은 황태후의 국장뿐이었다.
이번 국장은 황후가 주도하기로 결정이 났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이들 중 누구도 국장을 염려하지 않았다.
황후 폐하께서 어련히 잘 해내리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 하나 있었다.
조금 전 일을 떠올린 다른 시녀가 뾰로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신전에서 나설 건 뭐니?”
“그러게. 이번엔 제대로 치장해드릴 생각이었는데.”
그녀들이 이리 불만을 가진 이유가 있었다.
이번 장례식의 치장을 신관들이 담당하겠다며 나선 것이다.
비록 장례라지만, 황후가 대대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첫 자리였다.
그간 벼르던 건을 빼앗긴 사실에 시녀들은 내심 섭섭함을 표했다.
“반짝반짝하고 화려하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그러자 다른 이가 산뜻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뭐, 이제 시작이잖아? 어차피 장례라 많이 꾸미지도 못했을 거야.”
“그렇지, 아직 기회는 많아.”
“맞아.”
시녀들이 모조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들의 눈동자엔 활기가 가득했다.
장례를 앞둔 이들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화기애애한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