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세실레의 입에서 희미한 물음이 흘렀다.
“……도대체 왜.”
한때는 어떻게든 그녀의 눈에 들고자 했다.
부단히 노력하면 언제고 알아줄 것이라고.
물론, 지금은 아니었다.
인정받겠단 미련은 버렸다.
그럼에도 그녀의 행보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죽는 순간에도 저를 원망하는 이유가 뭔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세실레는 죽어가는 황태후를 오롯이 응시했다.
그녀를 살리고자 흩뿌렸던 이능은 다시금 세실레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마치 등 뒤로 불을 켠 듯, 세실레가 환히 빛났다.
환한 빛에 절로 시선을 옮긴 황태후가 증오스러운 목소리로 읊조렸다.
“내가, 내……가! 내가, 선택받은 존재다!”
“……고작 그게 전부에요?”
“내가! 선택, 받, 은……큭.”
그러나 황태후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처참한 모습을 지켜보던 세실레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해할 수도, 하기도 싫었다. 도리어 저런 자에게 인정받으려 애쓴 세월이 부질없이 느껴졌다.
“……저런 이유로.”
세실레가 주먹을 말아쥐었다.
허탈해선지 몸에서 힘이 빠졌다.
테르델이 즐거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도통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세실레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저렇게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나 이런 걸 보고 즐거워하는 당신이나 똑같군요.”
“그야 제가 황태후를 저리 만들었으니까요.”
“……가엾은.”
세실레는 고개를 틀어버렸다.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역겨웠다.
더는 한계였다.
세실레는 아예 자리를 뜨고자 했다.
그러나 황태후의 시신이 망령처럼 세실레의 눈길을 자꾸만 잡아끌었다.
최소한의 연민일 수도 과거에 대한 회한일 수도 있었다.
무어라 정의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엉켰다.
기어코 눈시울이 붉어지려던 차, 뜨겁고 커다란 손이 세실레의 눈가를 가렸다.
아르베우타였다.
어느새 나타난 그가 세실레의 허리를 단단히 잡고 등 뒤에 섰다.
믿음직스러운 체온에 세실레의 입에서 안도의 숨이 흘렀다.
시야를 가린 새까만 어둠에 차차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제야 세실레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렀다.
“이제 됐어요.”
“아니요. 아직입니다.”
그 순간 비릿한 혈향이 느껴지더니 발밑이 요란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건…….’
익숙한 기운이었다.
정확히는 강가에서 아르베우타와 테르델을 마주쳤을 때와 비슷했다.
잘은 모르겠으나 아르베우타가 테르델과 맞붙는 것 같았다.
‘눈은 왜 가린 거지.’
답답해진 세실레는 몸을 뒤틀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힘이 지상에 집중되어 있어.’
아르베우타와 테르델, 두 사람의 힘이 모두 땅에서부터 흘러나왔다.
‘상성이 비슷한 탓인가.’
고민하던 세실레는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테르델은 자신이 곧 오키드리아 대륙이라고 했다.
아르베우타는 각성자였고 그의 힘을 테르델이 일깨워줬다고 했다.
‘어쩌면.’
테르델이 각성자의 근원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아르베우타의 힘 만으론 부족하겠군.’
게다가 테르델은 그림자로 변해 몸을 숨기는 데 능했다.
대륙, 그림자, 인간.
공통점을 떠올려보던 세실레는 놓치고 있던 사실을 하나 떠올렸다.
바로 땅이었다. 지난번 테르델도 마치 땅으로 숨어들 듯 사라졌다.
‘……그렇다면.’
세실레는 이능을 펼치며 아르베우타를 향해 속삭였다.
“내가 위를 맡을 테니 당신은 아래를 맡아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힘끼리 부딪치며 요란한 굉음이 일었다.
폭풍처럼 이는 충격에 테르델의 몸이 일순 공중에 떴다.
아르베우타는 그의 발이 닿기 전, 테르델을 공중으로 밀쳐냈다.
땅에 닿지 못하도록 중력을 교묘하게 변화시키며.
동시에 귓가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실레, 제 기운이 느껴지십니까.”
“……아직은.”
“눈을 감고 집중해보십시오.”
세실레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새까만 어둠뿐일 줄 알았던 시야에 흐릿하게나마 빛 가루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은빛의 힘은 나비처럼 부드러운 선을 그리며 움직였다.
‘이게 내 힘이구나.’
눈을 뜨고 보는 것과 감고 느끼는 것은 완전히 달랐다.
이능의 움직임을 보다 섬세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세실레는 빛의 자취를 좇다, 엉겨 있는 붉은 기운을 느꼈다.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비슷해, 마치 하나처럼 보이는 힘이었다.
그녀의 예상대로 힘은 대지로부터 기원했다.
덩달아 궁 아래의 지반이 더욱 거세게 흔들렸다.
‘이대로면 궁이 무너지겠어.’
잠시 고민하던 세실레가 아랫입술을 물었다.
‘분명 구분이 가능할 텐데.’
쉽지 않았다.
고민하던 세실레는 무심코 엉겨 있는 붉은 기운 사이로 제힘을 흩뿌렸다.
가루처럼 펼쳐진 은빛의 힘에, 얽혔던 붉은 기운 하나가 실처럼 딸려 나왔다.
‘저거다.’
자신과 어우러지는 힘은 아르베우타의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반대는 테르델의 것일 테다.
세실레는 힘의 동선을 주시했다.
그러자 이능에 닿을까 두려워하며 능력을 흩뜨리는 붉은 기운이 느껴졌다.
‘왜 눈을 감으라는지 알겠군.’
이제야 확실히 이해했다.
세실레는 어지러이 흩어지는 기운을 집요하게 좇았다.
그러자 은빛 기운에 닿은 붉은 기운의 색이 흐릿해졌다.
‘……정화되는 건가?’
세실레는 숨을 들이켰다.
그 순간, 방을 맴돌던 테르델의 힘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르베우타의 입에서 지친 목소리가 흘렀다.
“……도망쳤군.”
더 빨리 알았다면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쉬워진 세실레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제야 눈 앞을 가리던 손이 치워졌다.
스미어드는 빛무리 사이로 아르베우타의 얼굴이 보였다.
그가 심란한 표정으로 읊조렸다.
“괜찮으십니까.”
세실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죽었네.’
황태후가 유폐되었다는 소식은 전해 들어 알았다.
하지만 처참한 시신 꼴이 되어 너부러진 모습을 보니, 영 입이 썼다.
황태후는 세실레의 인생을 송두리째 쥐고 흔들었던 사람이었다.
그녀를 고립시키고 핍박하며 보란 듯 자신의 권위와 화려함을 내세웠다.
어릴 적 세실레는 황태후가 영원할 줄 알았다.
자신은 결코 그녀를 넘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무섭고 두려웠다.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랭했고 아무도 그녀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세상에 홀로 남은 듯한 외로움은 면역이 되어 더는 괴롭지 않았다.
그렇게 평생을 살게 될 줄 알았는데…….
‘죽다니.’
전부 이능 덕이었다.
노력으로 일군 것이 아니기에 통쾌하진 않았다.
더불어.
‘난 이번에도 도망치기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자신에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세실레는 황태후에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상대하기조차 귀찮다는 그럴듯한 변명 뒤엔 복잡한 핑계로 가득했다.
껄끄럽고 무섭고 상대하기 번거로운 존재.
그저 이대로 말을 섞지 않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던 건, 자신의 나약함을 증명하는 것과도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죽었구나.’
코끝에 스미는 혈향이 현실로 느껴지지 않았다.
죽음은 여전히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것이 꼴도 보기 싫던 악당일지라도.
세실레가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그녀가 천천히 시신 쪽으로 시선을 돌리려던 차, 아르베우타가 시야를 막아섰다.
그러곤 무릎을 굽혀 그녀와 눈을 마주하며 중얼거렸다.
“그만 보십시오.”
“……도망치는 것 같아서.”
“일부러 눈에 담을 필요 없는 광경입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저런 것을 보는 건, 제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세실레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떨궜다.
그러자 아르베우타가 그녀의 턱을 다시금 들어 올렸다.
어째선지 그는 초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잘 들어요. 당신은 내 신입니다.”
“…….”
“신을 제약할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그러니 무얼 하시든 당신 자유입니다만, 저는 당신이 슬퍼하는 걸 보고 싶지 않습니다.”
“왜…….”
“부족하니까. 지금껏 해주지 못한 것만 생각나서 견딜 수가 없으니까. 이번에도 늦었단 사실에 자괴감이 밀려듭니다, 저는.”
그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정말로 조금 전 테르델을 상대한 것보다 이곳에 늦게 도착한 것이 더욱 분한 듯 보였다.
하지만 이곳은 황태후 궁인 데다 세실레는 계속해서 도르데아의 기척을 좇고 있었다.
거리상으로도 하는 일의 차이로도 세실레가 먼저 도착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아르베우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그제야 허탈함을 털어낸 세실레가 흐린 웃음을 뱉었다.
“정말 나보다 늦어서 화가 난 거예요?”
“……그렇습니다.”
“정말로?”
“그만 물으십시오.”
“정말인가 보네.”
어쩐지 신기했다.
세실레가 웃자 아르베우타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가 주저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비웃지 마십시오.”
진지했던 낯이 어두워졌다.
낯선 모습이었다.
아르베우타의 고백 이후로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냉랭하던 남자는 더는 이곳에 없었다.
도리어 이곳에 저를 더 오래 둘 순 없다는 듯, 그는 세실레를 껴안곤 창문에서 풀쩍 뛰어내렸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짤막한 양해를 구하고서.
***
아르베우타가 걸음을 멈춘 곳은 황후궁의 후원이었다.
외진 장소여선지 처음 보는 곳이었다.
세실레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도 잠시, 아르베우타가 내내 침묵하던 입을 열어 세실레를 불렀다.
“세실레. 어딜 보시는 겁니까?”
정중한 물음과는 달리 그의 눈빛은 세실레를 집어삼킬 듯 빛났다.
집요한 시선이 조금 전과 어찌나 괴리가 큰지, 세실레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곤 변명처럼 뒷말을 덧붙였다.
“황후궁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어서요.”
“황후궁에는 비밀 장소가 많습니다. 정확히는 당신과 제가 만든 곳입니다만, 기억나지 않으시는 모양이군요.”
뜻밖의 답변에 세실레가 아르베우타를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모르는 게 많네.’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어째서 저와 그렇게 거리를 두어야만 했는지, 왜 자신은 기억이 없는데 아르베우타 혼자 과거를 기억하는지.
궁금한 게 많았지만, 시간은 많았다.
‘천천히 물어보면 되겠지.’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세실레는 먼저 손을 뻗어 아르베우타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위로해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