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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애원은 이어지지 못했다.
황태후가 도르데아의 입을 틀어막은 탓이다.
황태후는 몸을 떠는 도르데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 너를 절대 쉽게 죽이지 않을 것이다. 평생 후회하게 할 것이야. 감히 우리 가문을 모욕하고 나를 배신한 대가를 치러야지.”
도르데아가 숨을 들이켰다.
황태후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애초에 사람 죽이기를 어린애 손목 비틀 듯이 하던 이였다.
배신자를 곱게 봐줄 리 없었다.
‘이젠 끝인가.’
도르데아는 눈을 내리감았다.
새까만 어둠 위로 옛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엄하기로 유명한 훈육법으로 황태후의 총애를 받은 것.
고작 일곱 살 난 세실레의 훈육 시녀가 된 것.
가냘픈 종아리에 회초리를 휘두르고, 제국을 위해서라며 외면한 것.
그리고 마음을 바꿔 먹게 된 것까지.
기억 중 대다수가 황후와 관련된 것이었다.
미련이 남고 후회가 깊다는 방증이었다.
그런 만큼 도르데아는 지난 이 년간 최선을 다해 황후 폐하를 모셨다.
별다른 총애를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황후는 말없이 그녀를 받아주었다.
도르데아는 몇 남지 않은 생, 자애로운 주인을 만나 참으로 다행이라 여겼다.
그 덕에 어둠 속에 갇혀 있으면서도 버틸 수 있었다.
황후가 그녀를 찾으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걸로 끝인 모양이었다.
인생사 인과응보라, 그다지 억울하지는 않았다.
‘과거의 죗값을 치르는구나.’
앞으로 펼쳐질 모든 일은 그녀 혼자 감당해야 할 터였다.
도르데아는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그러곤 그녀에게 펼쳐질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머리 위로 웃음이 너울처럼 흐르는 탓인지, 혹은 업보라 받아들이면서도 미련을 놓지 못했는지.
도르데아는 언제고 황후가 찾아와 저를 구해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어리석구나.’
어찌 주인을 모시는 자가 주인의 도움을 받으려 할까.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죽어 마땅하거늘.
도르데아는 나약해지는 정신을 바로 잡으려 입술을 질끈 물었다.
그러곤 초연해진 낯으로 결심했다.
‘자신이 없다면 자결하는 것이 옳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죽음은 살아온 세월보다 빠를 테니.
내내 저질러온 죄에 비하면 한없이 가벼운 일이었다.
‘먼저 가는 저를 용서하십시오, 황후 폐하.’
도르데아는 눈을 부라리며 잇새에 혀를 물었다.
그러곤 까무러칠 듯 웃어대는 황태후가 눈치채기 전에 조용히 어금니에 힘을 주었다.
툭, 살갗이 찢어지고 비릿한 피 맛이 입안을 맴돌았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더욱 힘주어, 망설임 없이, 단숨에 혀를 잘라내어야 했다.
도르데아는 일말의 미련마저 버리려,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곤 오롯이 제 질긴 명줄을 끊어내는 데 집중하려 했다.
악취가 치밀어 오르던 코끝으로 향내가 스며들지만 않았다면.
“……폐하?”
익숙한 향에 도르데아가 감았던 눈을 떴다.
그새 흐릿해진 시야로 새하얀 형체가 묘연하게 흔들렸다.
황후였다.
놀랍게도 앞에 황후가 서 있었다.
도르데아는 무어라 말을 섬기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차차 시야가 갤수록, 세실레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착각도 환시도 아니었다.
그녀는 지고한 제국의 황후이자 단 하나뿐인 성녀가 맞았다.
덩달아 숨이 막힐 듯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황태후도 테르델도. 누구도 쉬이 움직이지 못했다.
경직된 공기 사이로 세실레의 고요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테르델, 이번엔 진짜 선물을 준비해왔군.”
태연한 대꾸에 테르델이 입매를 비틀었다.
“……선물이라, 그렇죠.”
“고맙군. 덕분에 찾는 수고를 덜었어.”
세실레는 처음으로 테르델에게 감사를 표했다.
테르델은 그 말이 꼭 저를 비웃는 듯 느껴져 입을 다물었으나 세실레는 진심이었다.
도르데아의 기척이 이동하기에 추적해보니 황태후 궁이었다.
수상하게 느껴 찾아왔더니 이런 상황이었다.
이미 누군가에게 맞은 듯 마른 뺨이 퉁퉁 부어 있었지만, 뒤늦게나마 찾아 다행이었다.
“처음으로 도움이 되었군.”
세실레는 싸늘하게 일갈하곤 이능을 펼쳤다.
“……도움이 되었다니 영광입니다, 폐하.”
동시에 새까만 그림자가 방안을 뒤덮었다.
하지만 그림자는 곧 빛무리에 묻혀 사라졌다.
이윽고 빛무리가 도르데아의 몸을 휘감았다.
도르데아는 처음 겪는 상황이 무서워 애타게 울부짖었다.
죽음을 각오했건만, 막상 처음 겪는 상황에 처하니 두려움이 울컥 밀려든 탓이다.
“폐, 폐하!”
그러나 외침이 끝맺기 전에 도르데아는 사라졌다.
그녀는 무사히 황후궁으로 옮겨졌을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두 사람뿐이었다.
세실레는 황태후를 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오랜만입니다, 폐하.”
그러자 몽롱하던 황태후의 눈동자에 다시금 두려움이 서렸다.
황태후는 겁먹은 아이처럼 몸을 뒤로 빼며 중얼거렸다.
“……그, 그만둬.”
“무얼 그만두면 될는지요.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나, 나를 좀 내버려 둬!”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거짓말!”
“거짓말한 적 없습니다. 저는 당신과는 다르니까요.”
황태후는 입을 다물고 도리질 쳤다.
입에선 연신 중얼거림이 흘렀다.
“내가 황태후야. 너는 날 거역하지 못해. 무서워, 무서운데, 거역하지 못해.”
황태후는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무언가에 세뇌당한 듯도 했다.
어린아이 같기도, 고집 센 노인 같기도 했다.
기이한 모습에 세실레가 테르델을 바라보며 물었다.
“네 짓인가?”
“그렇다고 해두지요.”
“정말이지, 답이 없는 사람이군.”
고요한 시선엔 일체의 흔들림조차 없었다.
마치 테르델을 죽였던 예전처럼.
‘당신은 죽어 마땅한 사람이군요. 살려두면 큰일을 저지르겠어요. 그러니 날 원망하지 말고 평온히 잠들기를.’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테르델을 향해 잔혹한 칼날을 휘둘렀다.
‘신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같잖은 신의 축복을 입에 담고서.
분노로 눈앞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지옥으로 끌고 가, 제가 그간 겪은 고통을 알려주고 싶었다.
살려달라 빌게 하고 싶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울부짖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소원이 없을 텐데.
하지만 아직이었다.
테르델은 겨우 마음을 가다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색이 좋아지셨군요.”
“힘도 넘쳐흐르지.”
“그렇습니까.”
테르델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웃었다.
조금도 두렵지 않다는 듯이.
당당한 모습에 세실레의 입가에도 웃음이 번졌다.
세실레가 선선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르베우타가 말하길, 그대가 내게 한 번 봉인됐다는데.”
“…….”
“지금은 더욱 강해졌다고 하더군. 그러니 나로선 그대를 잡을 수 없겠어, 맞나?”
“……물론입니다, 폐하. 제가 곧 오키드리아 대륙. 대륙이 바닷속으로 가라앉아도 저는 살아 있을 겁니다.”
“아하, 그대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로군.”
“그리 말씀하시니 영광입니다.”
테르델이 과장되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러는 사이 세실레는 시험 삼아 가볍게 빛을 흩뿌렸다.
그러나 예상한 대로 이능은 순식간에 흩어져버렸다.
산산이 부서지는 이능에 테르델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소용없습니다, 폐하. 당신만 괴로워질 뿐입니다. 물론, 저로서는 그편이 더 좋지만.”
“…….”
“믿기 힘들다면 여기서 힘겨루기를 해보아도 좋습니다.”
세실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테르델이 저렇듯 여유롭게 굴지만 분명 틈은 있을 터였다.
‘도르데아는 막지 못한 걸 봐선, 분명 빈틈이 있다는 뜻인데.’
세실레는 시험해보기로 했다.
그녀는 테르델의 앞으로 성큼 다가가 그의 시야를 막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테르델이 당황하게도 잠시, 뒤에서 단말마가 터졌다.
“사, 살려줘!”
테르델이 급히 고개를 돌렸다.
뒤에선 빛무리에 휘감긴 황태후가 버둥대고 있었다.
그새 세뇌가 풀렸는지 희게 질린 황태후의 낯은 유폐되었던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아, 아버지.”
눈물 젖은 눈동자를 바라보던 테르델이 혀를 찼다.
“쯧.”
저래선 어디에도 써먹을 수 없었다.
다시 세뇌를 건다고 해도 세실레의 앞에선 소용이 없으리라.
창피만 당할 것이 빤했다.
불명예고 수치였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나았다.
테르델은 단숨에 손을 뻗어 황태후의 목에 단도를 꽂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크윽.”
황태후의 목에서 핏물이 치솟고 몸이 무너져 내렸다.
단도엔 독이 발려 있었는지 순식간에 몸이 푸르게 변했다.
손 쓸 틈조차 없는 맹독이었다.
끔찍한 광경에 세실레가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세실레가 떨리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어떻게 가족을.”
코끝으로 피비린내가 밀려들었다.
구역질이 나왔다.
충격받은 그녀에게로 테르델이 다가와 속삭였다.
“이게 당신과 저의 차이입니다.”
“……뭐?”
“저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각오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내가 필사적으로 당신을 불행하게 만들 테니까.”
그는 즐거운 듯 보였다. 죄책감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모습에 세실레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아르베우타의 말이 맞았다. 그는 죽어 마땅했다.
사람의 목숨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그에게선 일말의 죄책감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도리어 제 선택을 자랑스레 여기기까지 했다.
‘제정신이 아니야.’
세실레는 무너지려는 몸을 기어코 일으켜 세웠다.
저런 이에게 지고 싶지는 않았다.
이럴 때를 위해 수련을 해오지 않았나.
드디어 힘을 시험해 볼 때였다.
세실레는 고개를 들어 이능을 펼쳤다.
방안을 빼곡하게 메운 눈부신 은빛이 황태후의 몸을 덮었다.
모여든 빛무리에 테르델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 소용 없습니다.”
그의 말대로 황태후는 회복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괴로워하더니 기어코 몸을 고꾸라뜨렸다.
세실레는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황태후를 바라보며 눈을 부릅떴다.
황태후가 원망하는 눈빛으로 세실레를 응시하고 있었다.
원망하는 눈빛이었다.
황태후는 이렇게 되고도 저를 원망하고 있었다.
‘지독한 사람이군.’
그녀의 목을 찌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을 원망했다.
한낱 가진 것 없던 어릴 때도 그랬다.
황태후는 세실레를 지극히 증오하고 저주했다.
세실레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