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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72화 (7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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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으로 부드러운 곱슬머리가 엉겨들었다.

덩치가 커다란 남자는 스스럼 없이 그녀에게 안겼다.

바로 이 기분이었다. 내내 잊고 있던 무언가, 가슴이 꽉 채워지는 기분.

밀려드는 충족감에 세실레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할게요.”

“약속한 겁니다.”

세실레는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내려 아르베우타의 이마에 입술을 대었다.

그러자 아르베우타가 손을 뻗어 그녀를 힘껏 안았다.

잠시간 따스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

며칠째 내리치던 폭우가 그쳤다.

디젤라는 깨어났고 황궁에도 온화한 온기가 맴돌았다.

덩달아 대륙을 넘실대던 절망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시끄럽게 소문을 퍼뜨리던 이들은 순식간에 입을 다물었고 성수의 힘은 다시 강해졌다.

완전히 일이 틀어진 것이다.

테르델은 궁 너머를 바라보며 짓씹듯 중얼거렸다.

“……아르베우타.”

드디어 둘이 갈라서나 했더니 기어코 결과를 뒤집었다.

전부 아르베우타의 짓이었다.

화가 났지만, 아직 방법은 남아있었다.

겨우 분을 가라앉힌 테르델이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행복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지.”

테르델은 모습을 감춘 채 황궁으로 숨어들었다.

유폐된 황태후의 궁이었다.

그는 텅텅 빈 궁을 둘러보다가 구석에 있는 황태후를 발견했다.

“엉망이군.”

그녀는 사람의 몰골이라 보기 힘들 정도로 앙상했고 차림도 엉망이었다.

곳곳엔 배설물이 널려 악취가 났다.

살라고 이리 둔 것이 아니었다. 죽으라고 방치한 것이 분명했다.

과거 영광을 누리던 황태후의 거처라고는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러나 테르델은 개의치 않고 황태후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곤 그가 왔는지도 모르는 듯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황태후의 어깨를 붙잡았다.

“테르델입니다.”

“…….”

“타리베르 대공이라고도 하지요.”

그제야 황태후가 시선을 돌렸다.

테르델의 말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기척이 나는 쪽으로 반응을 한 것이 전부였지마는.

그녀는 넋을 놓은 듯 보였다.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에 테르델이 눈살을 찌푸렸다.

“쯧, 이래서야 영 쓸모가 없겠군.”

그는 그럴듯한 대역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지를 상실해서야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

더 이상의 짐을 떠안는 것은 사양이었다.

테르델이 막 걸음을 돌리려는 차였다.

순간 안광을 번뜩인 황태후가 테르델의 발치에 매달려 소리쳤다.

“잘못했어! 잘못했다고 했잖아!”

“……누구에게?”

“잘못했다고 했어! 용서해달라고. 나는 그저, 그래, 시키는 대로 해온 것뿐인데!”

“아하, 누군가 당신을 꼬드겼군요.”

“그, 그래. 맞아.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했어. 난 잘못 없어. 있다면 그가…….”

“이런, 그 사람이 접니다.”

테르델의 입가에 상냥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혼란스러운 얼굴을 한 황태후를 마주 보면서 작게 읊조렸다.

“제 얼굴은 처음 보시지요. 이 모습이 더 익숙하시려나요.”

테르델은 선대 타리베르 대공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덥수룩한 흰 수염에 얇게 다물린 입술.

죽은 줄로만 알았던 선대 대공의 모습에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테르델은 말을 잇지 못하는 황태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찌 여기서 이러고 있느냐.”

“……아버지.”

“가문의 수치로다!”

“아, 아버지. 아니에요. 저는, 전, 최선을…….”

“시끄러워! 당장 정신 차리지 못할까!”

테르델의 호통에 황태후가 눈을 번쩍 떴다.

공허하던 눈동자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테르델의 품을 파고들며 속삭였다.

“무섭습니다, 아버지. 무서워요.”

아이처럼 떠는 그녀를 테르델이 다정한 손길로 다독였다.

“이런, 헛것을 본 모양이군.”

“헛것이 아닙니다. 악령들이 자꾸…….”

“악령? 악령이 어디 있다는 것이지?”

테르델의 물음에 황태후가 화급히 손을 들어 허공을 가리켰다.

조금 전만 해도 수많은 악령이 낄낄거리며 그녀를 바라봤다. 사방이 악령이었다.

그러니 아버지도 그녀의 괴로움을 이해해주리라 믿었다.

하지만 지금 악령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던 황태후가 입을 벌렸다.

“어……분명 있었는데.”

“그것 봐라. 악령은 없다.”

“아니에요, 있었어! 있었다고요!”

황태후는 그간의 세월이 분한 듯 발작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테르델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을 뿐이었다.

“아니, 없었다. 원래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것들이었어.”

“……네?”

“신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들을 숭배하여, 인간을 무력하게 하려고. 마치 네가 성녀에게 밀려난 것처럼.”

그제야 무언갈 깨달은 것처럼 황태후가 눈을 크게 떴다. 이어 미친듯한 중얼거림이 흘렀다.

“맞아, 내가 그래서, 성녀, 세실레, 그년 때문에!”

횡설수설하는 그녀를 테르델이 더욱 부추겼다.

“맞아. ‘세실레.’ 근본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고귀한 황후 위에 앉은 여자 말이지.”

“세실레, 근본 없는 년이 감히 황후 위에…….”

“그래. 넌 그 자리에 앉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더냐. 탯줄부터 타고나 뼈를 깎는 각고의 노력 끝에 황후가 되었어. 그런데 그 아이는 성녀란 이유로 호의호식하고 너는 이리되었으니. 어찌 억울하지 않을까.”

“맞아요. 억울합니다. 억울해요! 저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황태후가 테르델의 옷자락에 매달렸다.

절망과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보며 테르델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넌 아무런 잘못이 없지.”

“흐윽! 살고 싶어요, 아버지.”

어느새 황태후에게선 삶을 향한 갈망이 넘쳐흘렀다.

이 정도면 그의 꼭두각시가 되기는 충분했다.

그는 울부짖는 여자를 내려다보며 약병을 들이밀었다.

“가엾은 것. 치료제를 가져왔다.”

“……치료제요?”

“마시렴. 마시고 건강해져야지.”

“아버지, 저는 정말.”

테르델은 더 말할 필요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느새 그의 입가엔 자애로운 미소가 번졌다.

드문 아버지의 미소에 황태후는 울먹이며 치료제를 들이켰다.

비릿한 혈향에 속이 울렁거렸으나 몸에 힘이 돌았다.

정신을 차린 듯 보이는 황태후를 보며 테르델이 조용히 속삭였다.

“가자, 가서 네 자리를 되찾자.”

“하지만 그랬다가는…….”

황태후가 두려운 듯 몸을 떨자 테르델은 대번에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이래서는 안 됐다. 그녀는 이전처럼 집요하게 세실레를 괴롭혀야만 했다.

황태후는 세상에 그녀가 겪은 일을 떠벌리고 귀족들을 모아 황가를 고립시킬 중요한 패였다.

테르델은 정신 차리라는 듯, 황태후의 어깨를 세게 쥐며 외쳤다.

“성녀는 네가 두려워할 것이 못 돼. 내가 그리 가르쳤더냐!”

“……그렇지만.”

“정신 못 차렸구나. 미련한 것!”

테르델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려버렸다.

그러자 황태후가 바닥을 기어 테르델의 바짓자락을 붙잡으며 소리쳤다.

“마, 맞습니다. 아버지 말이 맞아요.”

“…….”

“아버지, 아버지! 저를 버리지 마세요.”

황태후는 여전히 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눈동자엔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테르델은 한숨을 내쉬며 오열하는 황태후를 응시했다.

그러자 황태후의 머릿속에 화려했던 젊은 나날이 떠올랐다.

세력가의 외동딸인 그녀는 모든 걸 가졌다.

기존의 황후를 내쫓고 황제를 죽여도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을 만큼 무소불위의 권력이었다.

과거는 괴로운 기억을 모조리 잊을 정도로 달콤했다.

그간의 고통을 모조리 잊힌 지 오래였다.

그제야 황태후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댔다.

“성녀는……제 상대가 되지 않죠.”

어딘가에 홀린 듯 몽롱한 눈빛이었다.

흡족스러운 모습에 테르델이 자상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네가 군기를 잡을 때가 되었구나. 귀족들이 기다리고 있어.”

“충실한 자들. 그동안 고생이 많았겠습니다.”

“네 말이 맞다. 아, 그러고 보니 선물이 있다.”

“무슨 선물이죠?”

어느새 황태후는 일전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비록 몸은 앙상할지언정 고압적인 태도는 전과 다름없었다.

오만하게 물어오는 황태후의 앞으로 테르델이 중년의 여인을 내밀었다. 도르데아였다.

그녀는 희게 질린 얼굴로 황태후를 보며 안색을 굳혔다.

“폐, 폐하.”

도르데아가 무어라 말을 끝맺기도 전에 황태후가 손을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못난 것!”

강렬한 파열음이 울렸다. 매서운 손이 도르데아의 뺨을 쳤다.

그녀는 도르데아가 고개를 바로 하기도 전에 다시금 뺨을 내리쳤다.

“네가 감히! 나를 배신해?”

그간 쌓인 분노가 하늘에 닿았다.

배신한 시녀의 사지를 찢어도 모자랐다.

증오로 얼룩진 눈이 도르데아를 향했다.

당장이라도 사람을 죽일듯한 눈빛에 도르데아가 겁먹은 표정으로 주춤 물러섰다.

“이, 이러시면 후일을 감당치 못하실 겁니다.”

그러나 도르데아의 말은 황태후의 분노를 부채질할 뿐이었다.

“뚫린 입이라고 잘도 말하는구나.”

“저, 저는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도르데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몇 번을 보아도 이곳은 황태후 궁이었다.

드디어 그녀를 잡아먹은 어둠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옆에 황후궁이 있다는 말이 되었다.

황후 폐하라면 그녀를 구해줄 것이다.

게다가 황태후는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도르데아가 전력으로 달리면, 잡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생각을 마친 도르데아는 날아오는 손을 피하고 곧장 몸을 돌려 달렸다.

하지만 도르데아의 몸부림은 금방 저지당했다.

도르데아는 눈앞의 노쇠한 남자를 보곤 숨을 삼켰다.

“어, 어떻게…….”

도르데아는 제 눈을 의심했다.

죽었던 선대 타리베르 대공이 제 앞에 떳떳하게 서 있었다.

눈빛에 압도당한 도르데아가 주춤 뒤로 물러섰다.

도망치는 그녀를 황태후가 얽맸다.

그러자 도르데아가 질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거 놓으십시오!”

“그럴 순 없지. 날 이렇게 만든 장본인 아닌가. 그렇죠, 아버지? 제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거죠?”

“그렇지. 내 딸이 사람 하나 어찌한다고 무슨 일이 생길까.”

“맞습니다. 역시 현명하십니다.”

황태후가 안광을 번뜩였다.

오가는 이야기에 겁을 집어삼킨 도르데아가 목에 핏줄이 솟을 정도로 소리쳤다.

“황후 폐하! 황후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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