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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71화 (7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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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리가.”

“아닌 것 같은데.”

“아니라니까.”

“괜찮아요. 나도 울었으니까.”

“…….”

“또 울려고 하네.”

세실레는 기어코 고개를 돌려 아르베우타를 보았다.

그는 마치 죄인처럼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낯이 어두웠다. 처음으로 보는 나약한 모습이었다.

‘왜…….’

낯선 모습에 세실레는 무심코 손을 뻗어 일그러진 아르베우타의 눈매를 훑었다.

꺼칠한 피부가 손끝에 와 닿았다.

눈매를 쓸던 손이 욕심껏 뺨을 감쌌다.

부드러운 접촉이었다.

녹아들 듯 자연스러워, 아르베우타는 그녀가 자신을 만지고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그러다 해일처럼 감각이 밀려들었다.

갑작스러운 온기에 아르베우타가 몸을 떨었다.

세실레는 조용히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고요한 시선이었다.

조금 전 일은 까맣게 잊은 듯, 잔잔한 눈빛에 보는 사람마저 숨을 멎을 정도로.

아르베우타의 입에서 한숨이 흘렀다.

‘또다시 뒤집혔군.’

언제고 그랬다.

세실레가 나서면 모든 것이 바뀌었다.

악령으로 들끓던 세상도, 철통처럼 숨기던 감정도.

세실레는 언제고 모든 걸 뒤집었다.

이번에도 세실레는 그렇게 했고 결과적으로 그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밀려오는 자괴감에 아르베우타는 내내 숨겨왔던 치부를 무심코 뱉어버렸다.

“나는 그대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나 봐.”

“……무슨 소리를.”

“아무것도 아닙니다.”

바뀐 말투에 세실레가 눈썹을 치켜떴다.

‘왜 갑자기 존대를?’

하지만 무어라 더 캐묻기엔 아르베우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세실레는 침묵했다. 아르베우타가 무언가 결심을 내리려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짧은 정적 후, 마침내 고민을 마친 아르베우타가 느리게 입을 뗐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좋아요.”

세실레는 무어라 더 캐묻지 않고 응접실을 향해 걸어갔다.

아르베우타 또한 그녀의 뒤를 따랐다.

마침내 두 사람이 사라지자, 침실을 지키던 이들이 괴이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 중 누군가의 입에서 의아한 물음이 흘렀다.

“제가 지금 무얼 본 거죠?”

모두가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눈을 뜬 디젤라가 몽롱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됐다, 언니.”

디젤라의 입가에서 웃음이 샜다.

***

두 사람은 빈 응접실로 왔다.

모두가 당황한 탓에 시중들 시녀 하나 따라오지 않았다.

싸늘한 침묵만 내려앉은 응접실에서 세실레는 아르베우타를 쉼 없이 응시했다.

그는 답지 않게 초조한 표정이었다.

‘타고나길 황족인 줄 알았는데.’

오늘 마주한 그는 꼭 다른 사람 같았다. 모든 것이 전과 달랐다.

본래 그는 절대 빈틈을 내어주지 않았다.

말 한 번 거는 것조차 어려웠다.

매번 선을 긋는 그를, 세실레는 제 처지를 깨달으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허울뿐인 성녀였고 새로운 성녀가 간택되면 물러날 예정이었다.

황태후는 공공연히 진짜 황후는 따로 준비되어 있다고 떠들고 다녔고 세실레는 그 말에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

곧 쫓겨날 자리, 일회용뿐일 존재.

그녀는 저들의 구역에 발조차 들일 수 없다고 믿었다. 분명 그랬는데.

‘왜 저러는 거지.’

한참을 기다리던 세실레는 느리게 입을 뗐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요?”

“……어디서부터 말을 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길 잃은 아이처럼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세실레는 찬찬한 목소리로 답했다.

“오래 걸려도 괜찮아요. 횡설수설해도 좋고요. 그러니까 하고 싶은 이야기부터 해보세요.”

그제야 아르베우타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자료를 보셨을 테니, 수백 년 전에 당신과 제가 만났단 것은 짐작하고 계시겠죠.”

세실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궁이 세워지기 전, 이곳은 깊은 숲속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부상을 당한 상태였고 당신은 저를 치료해 주셨습니다.”

“……제가 치료사였나요?”

“아뇨. 당신은 신의 딸이었습니다, 지금처럼. 눈부신 이능으로 당신은 저를 치료했습니다. 더불어 신의 힘으로 오키드리아 대륙에서 악령을 물리쳐 주었죠. 덕분에 제국이 세워질 수 있었고요.”

아르베우타가 애타는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

“제 말을 믿지 못하는군요.”

“아니요, 그냥……. 계속 말해주세요.”

아르베우타는 혼란스러워하는 세실레의 눈동자를 고스란히 들여다보며 읊조렸다.

“그 후로 저는 당신과 계속 함께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테르델을 만났죠. 그는 당시 악령이 들끓던 오키드리아를 지배하던 자였고 신의 힘을 지닌 당신을 경계했습니다. 당신이 그의 힘을 빼앗을까 걱정해서요.”

“……그렇군요.”

“네. 실제로 테르델은 흉악한 짓을 일삼아 신력에 취약했습니다. 오키드리아 대륙이 다른 대륙들과는 달리 신의 축복을 받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고요. 결국, 당신은 테르델을 처벌하였고 그는 척박한 북부의 땅에 봉인되었습니다.”

“…….”

“그러나 봉인 전에, 테르델은 저를 비롯한 몇몇 인간에게 ‘각성자’란 존재에 대해 알려주었습니다. 각성자는 신의 힘을 거스를 수 있는 인간입니다. 그는 인간의 힘으로 대륙에서 악령을 물리칠 수 있다며 신을 죽일 것을 권고했습니다. 당시 당신의 정체를 몰랐던 저는 그러겠노라 했죠.”

“……그럼 디젤라는.”

“마찬가지입니다. 디젤라 양은 아직 각성하지 못했지만요.”

세실레는 눈을 내리깔았다.

눈앞에서 어른거리던 핏물에 젖은 대지, 신을 죽이겠다며 기뻐하던 아르베우타.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그럼 테르델이 보여준 것은 뭐지?’

아직도 그가 선물이랍시고 보여준 광경이 생생했다.

‘세실레.’

‘네가 죽으면 이 땅에 평화가 찾아올 거야.’

기억을 더듬던 그녀는 그제야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그녀가 아르베우타를 보며 회상한 기억과 테르델이 보여준 기억에서의 말투가 달랐다.

테르델이 보여준 기억 속 아르베우타는 경어를 쓰지 않았다.

그런데 세실레가 회상한 기억 속의 아르베우타는 경어를 썼다. 더불어 지금도.

세실레는 떨리는 손을 말아쥐며 물었다.

“제게 갑자기 경어를 쓰는 이유는 뭐예요?”

“원래부터 이랬어야지요. 당신은 나의 신, 저는 한낱 인간에 불과하니까.”

“……그럼 예전에도?”

“물론입니다.”

뜻밖의 결론에 세실레가 숨을 들이켰다.

세실레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테르델과 한 편이란 거짓말을 한 이유가 이거였군요. 내가 그에게 속을까 봐.”

아르베우타의 염려대로 세실레는 테르델이 보여준 과거를 그대로 믿고 있었다.

세실레가 자책하자 아르베우타가 안색을 굳혔다.

“그가 무슨 짓을 했습니까?”

“……과거의 기억을 왜곡해서 보여줬어요.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하죠?”

아르베우타는 일렁이는 세실레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침착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는 원래 오키드리아 대륙의 지배자였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에게 그런 짓을 한 줄은 몰랐는데.”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또한, 그는 제가 처리할 겁니다.”

“하지만…….”

세실레는 말을 삼켰다. 테르델은 세실레의 이능으로도 어찌하지 못할 만큼 강했다.

그런데 아르베우타가 그를 어찌할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

세실레가 고민하는 사이, 아르베우타가 말을 이었다.

“당신이 할 일은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뿐입니다.”

뜬구름 잡는 소리에 세실레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또다시 가만히 있으라고?’

답답해진 세실레가 드물게 소리쳤다.

“이런 때에 그게 가능할 리 없잖아요!”

하지만 아르베우타는 침착한 목소리로 답할 뿐이었다.

“아뇨, 그러셔야 합니다. 당신의 기분에 지상은 요동칩니다. 며칠이고 폭우가 내린 것으로 느끼지 않았습니까.”

“…….”

“당신은 온전한 신으로 발현하기 직전입니다. 앞으로는 사소한 감정 변화에도 많은 것이 달라질 겁니다. 그러니 당신의 안전이 가장 중요한 겁니다.”

“……그런.”

“저를 한 번만 믿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진중한 부탁이었다.

여태와는 달리, 의심도 혼란도 일지 않았다.

결국, 세실레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아르베우타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감사합니다.”

그는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처음 보는 모습에 세실레는 할 말을 잃었다.

목석처럼 딱딱한 줄로만 알았던 남자가 웃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줄로만 알았던 웃는 얼굴이, 시선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눈부셨다.

세실레가 그를 응시하자, 아르베우타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꼼짝없이 굳어 있는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레 그러안았다.

따스한 감촉에 날카롭게 솟았던 감정이 순식간에 무뎌졌다.

“기분이 좋아지는 일을 하다 보면, 기억이 돌아올 겁니다.”

“…….”

“앞으로는 제가 당신을 지킬 테니까요.”

세실레가 고개를 들어 물었다.

“누가 날 위협하죠? 테르델?”

“그도 문제지만, 또 다른 훼방꾼이 있죠. ……당신은 납득하기 어렵겠지만.”

“말 해줘요.”

“그럼, 하나만 약속해주십시오. 절대 기억이 돌아오기 전엔 달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달이라니.”

내내 루베르가 해왔던 말이 아닌가.

신관이나 할 법한 말이 아르베우타의 입에서 나오니 의아했다.

세실레가 놀란 눈으로 아르베우타를 응시하자 그가 애원하듯 말했다.

어느새 붉은 눈동자는 집요하게 세실레를 응시하고 있었다.

“당신은 분명 나와 약속했어요. 자의가 아니면, 달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

“기억을 잃었을 땐, 누구도 당신을 데리고 달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라고.”

세실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기억에 없는 일이었다. 선뜻 그러겠노라 약속할 수 없었다.

그녀가 침묵하자, 아르베우타가 울분에 찬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러니 당신은 테레사도 루베르도 그 빌어먹을 세렌디의 말도 들어선 안 됩니다. 내 곁에 있어 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 당신이 분명, 그렇게 말했으니까.”

세실레는 감정이 고조된 아르베우타의 얼굴을 보았다.

눈앞에서 일렁이는 붉은 눈동자는 간절했고 피부에 닿는 숨결은 더웠다.

그를 보고 있자니 무언지 모를 슬픔이 밀려들었다.

아팠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고 눈앞의 미련한 남자가 안타까웠다.

그녀는 밀려드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손을 뻗어 아르베우타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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