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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70화 (7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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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오시라고 해.”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르베우타가 들어왔다.

그는 일전의 모습과 큰 차이가 없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의 시선이 더는 그녀를 향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르베우타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래왔다. 그러니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외면에 심장이 지끈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당연한 거잖아. 정신 차리자.’

지난번 만남에서 그리 오만하게 굴었는데 이제는 부탁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러니 그가 여기까지 와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마음을 다잡은 세실레가 무어라 입을 떼려는 차, 아르베우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

“디젤라는 내게도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에 온 거다.”

“……그렇군요.”

세실레는 꽉 말아쥐었던 손에서 힘을 뺐다.

다행이었다. 그가 디젤라의 목숨을 인질로 삼지는 않았으니까.

다물린 입술 새로 한숨이 흘렀다.

그러는 사이 디젤라를 살펴보던 아르베우타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무얼 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그의 몸이 흠뻑 땀에 젖어 있었다.

순식간에 노곤해 보이는 그를 보며 세실레가 안색을 굳혔다.

그러나 아르베우타는 쟈르스를 보며 말을 이을 뿐이었다.

“곁에서 지켜보다가 증세가 나아지면 내게 연락해. 그 후에 힘을 관리하지 못하면 폭주하니, 지체하지 않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폐하.”

쟈르스의 시선이 흘낏 세실레를 향했다.

현재 황후궁은 폐쇄 상태였고 황제에게 연락하려면 황후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의 시선을 느낀 세실레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쟈르스가 시선을 거두자 다시금 아르베우타가 말을 이었다.

“지금 황궁이 시끄럽다. 황후궁을 비롯해 전역에 경계를 삼엄히 할 예정이니, 급한 일이 있으면 바로 접근하도록.”

아르베우타는 턱짓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창밖은 신전과 이어진 오솔길이 있는 곳이었다.

그들을 지켜보던 세실레가 눈매를 찌푸렸다.

그가 꼭 지난번 신전에서의 일을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기사에게서 보고를 받은 건가.’

하지만 그녀는 변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신전 주변을 얼쩡거리는 기사를 의아하게 여겨 추궁했을 뿐이니까.

신전은 황후궁 근처였다. 황후인 자신이 기사의 접근을 불쾌하게 여겨도 이상하지 않았다.

‘언질조차 하지 않은 그의 잘못이지.’

세실레는 이 건에 관해선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대신 디젤라를 보았다.

그녀는 전보다 안색이 좋아졌다. 호흡도 고르고 한결 편안해 보였다.

그제야 안심이 됐다.

안도의 숨을 흘리는 세실레를 보며 다시금 아르베우타가 말을 이었다.

“깨어나려면 며칠은 더 있어야 해. 그러니 너무 기다릴 필요는 없다.”

그 순간 세실레는 멈칫했다.

꼭 그녀가 걱정할까 염려해서 하는 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세실레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게 내 착각일뿐이라고?’

내내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테르델이 아르베우타와 같은 편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으니까.

이번 일도 그랬다.

아르베우타가 작정하고 마음을 먹었다면 디젤라를 외궁으로 데려갈 수도 있었다.

그러곤 디젤라를 인질 삼아, 황후궁 폐쇄를 그만두라고 할 수도 있었다.

지금 황후궁이 폐쇄된 것으로도 그가 욕을 먹고 있다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부르자마자 황후궁으로 달려와 묻지도 않은 것들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마치 저더러 들으라는 듯이.

‘기사를 언급한 것도 오해를 풀려는 거였다면?’

그럴듯한 생각에 세실레는 숨을 짧게 들이켰다.

혼잡했던 머릿속이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항상 의아하게 여긴 것들이 저를 위해 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말이 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어릴 적 베풀던 작은 배려처럼.’

과거를 떠올리던 세실레는 주먹을 쥐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단 한 번이라면, 쪽팔림도 감수할 용의가 있었다.

세실레는 불쑥 아르베우타의 손을 잡아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아르베우타가 몸을 굳혔다.

찰나 당황한 낯엔 불쾌함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용기를 얻은 세실레가 나직이 말을 이었다.

“도르데아가 고향으로 돌아간다네요.”

“……그런가.”

무덤덤한 아르베우타의 표정에 세실레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되도록 티가 나지 않도록 노력하며 말을 이었다.

“시녀 일을 그만두는 것이니, 당신에게도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했어요.”

“허락하지.”

담담한 대꾸에 세실레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역시 당신,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아르베우타는 무언가 심상찮은 기색을 느끼고는 표정을 굳혔다.

그러나 세실레는 개의치 않고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곤 불규칙하게 흩어지는 호흡 소리를 들으며 속삭였다.

“거짓말했죠?”

“…….”

“아무리 고민해봐도 앞뒤가 맞질 않아. 테르델, 당신 편 아니잖아요.”

“…….”

“어서 그렇다고 말해요.”

재촉하는 목소리는 아이를 훈계하듯 낮고 엄했다.

아르베우타는 이제 꼼짝없이 굳어버렸다.

세실레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멍하니 중얼거렸다.

“거짓말, 맞네.”

“아니다.”

그러나 세실레는 믿지 않았다.

믿을 수 없었다. 거짓말이 아니고서야 이 모든 상황이 이해되질 않았으니까.

그녀는 내내 속에 엉겨 있던 생각을 토해내듯 중얼거렸다.

“왜 거짓말했을까? 당신처럼, 아무것도 부족한 게 없는 사람이.”

“……거짓말 아니라니까.”

“말 못 할 이유라도 있는 걸까.”

“아니라고 하질 않았나!”

아르베우타가 크게 소리쳤다.

어느새 맞잡은 손이 떼어져 있었다.

세실레는 허공으로 내던져진 자신의 손을 바라보면서 멍하니 중얼거렸다.

“거짓말이 아니면요?”

“…….”

“또 입을 다무는군요. 좋아요. 이제 우리 사이는 영영 틀어질 거예요. 그러곤 끝이 나겠죠. 당신이 바라던 바니, 잘됐네요.”

단호한 음성과는 달리 세실레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가슴이 너무나도 아팠다.

내쳐진 손과 함께 마지막 희망마저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그러나 우습게도 여전히 가슴은 다른 말을 했다.

속이 끓듯 분하고 볼이 화끈거릴 정도로 수치스러운 데도, 그녀는 아르베우타에게 매달리고 싶었다.

지금 한 말이 거짓이라 말해달라고 애걸하고 싶었다.

‘……역시,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더니.’

세실레의 입에서 비소가 흘렀다.

회귀했다. 이능 또한 가졌다.

남들은 단 한 번도 누리기 힘든 기적을 두 번이나 경험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또다시 바보같이 굴고 말았다.

세실레는 저를 향한 시선들을 느끼곤 고개를 돌려버렸다.

더는 아무렇지 않은 척할 자신이 없었다.

몸이 떨리고 눈물이 솟았다. 보는 눈이 많다는 걸 알면서도 저지할 수 없었다.

세실레가 도망치듯 자리를 뜨려는 차, 나직한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

“……세실레.”

아르베우타는 세실레의 앞으로 다가와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정중한 손짓과는 달리 어그러진 낯은 어떤 표정을 지으면 좋을지 모르는 사람처럼 혼란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세실레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더는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간 지금의 침착함마저 유지할 수 없을 테니까.

속살을 고스란히 드러낸 그녀는 참으로 추할 터였다.

싫다는 사람에게 매달려 애정을 갈구하고, 외로움을 토해내고, 서툴고 두려워하는 민낯을 고스란히 보일 테니.

‘그러면 쓸모없게 보일 테지.’

아무에게도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순 없었다.

세실레는 아르베우타를 밀치곤 다시금 이능을 펼쳤다.

아예 숨어버릴 생각이었다.

수도 내에만 있으면 괜찮으리란 안일한 생각을 하고서.

하나 막상 떠나려니, 맞잡았던 손의 체온이 사라져 허했다.

춥고 서러웠다. 그녀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무심코 고개를 들어 아르베우타를 보았다.

“……!”

그 순간, 숨 막힐 듯한 온기가 그녀를 파고들었다.

뇌가 녹아버릴 듯한 뜨거운 숨결이 목덜미를 덥히고 얇은 허리께를 파고든 손이 세실레를 단단히 붙잡았다.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집념이 느껴지는 손아귀에 세실레는 무심코 몸을 떨었다.

등 뒤로 닿은 단단한 몸체에 무너질 듯한 안도감이 느껴졌다.

‘……설마.’

일말의 기대를 품은 세실레는 곧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자신이 또 황궁을 떠나버릴까 두려워서 이러는 것이 빤했다.

그랬다간 달이 사라질 테니까.

세실레는 그를 밀어내고자, 아르베우타의 손을 떼어냈다.

그러나 세실레가 그를 떼어내려 할수록, 아르베우타는 세실레를 더욱 힘주어 안았다.

등 뒤에서부터 얽은 손길에 꼼짝조차 할 수 없었다.

참다못한 세실레의 입에서 고함이 터지려던 차, 아르베우타가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거짓말, 맞아.”

“……지금 뭐라고,”

“거짓말 맞다고.”

세실레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제대로 들었는지 확신조차 서지 않는데도,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이 비틀거렸다.

고꾸라지는 그녀의 몸을 아르베우타가 단단히 고쳐 안았다.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하지만 다문 입술과는 달리 아르베우타의 심장은 재게 뛰고 있었다.

등 뒤로 느껴지는 거센 심장 박동에 제 몸마저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그의 몸이, 심장이 거짓말을 할 리 없었다.

그제야 세실레의 입에서 힘없는 중얼거림이 흘렀다.

“……거짓말쟁이.”

“맞아. 거짓말쟁이지.”

“정말 나쁜 사람.”

“천하에 둘도 없을 못된 놈이고.”

담담한 목소리와는 달리 그의 손끝이 떨렸다.

무언가 초조한 사람처럼 땀이 배어나기도 했다.

세실레는 조심스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아르베우타가 세실레의 어깨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무슨.”

세실레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변명처럼 뒷말이 따라붙었다.

“돌아보지 마.”

“……얼굴 보고 싶어요.”

“안돼. 날 비웃을 거야.”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얼핏 옷깃이 젖는 것도 같았다.

피부를 적시는 뜨거운 감촉에 세실레가 놀라선 중얼거렸다.

“……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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