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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정적이 흐를수록, 세실레는 미간을 찌푸렸다.
집중은 금방 흐트러졌다. 아무런 계시도 들려오지 않는데 가만히 앉아서 한 가지 생각에 집중하는 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그럼 그렇지.’
하기야 신탁이라는 것이 그리 쉬이 내리는 것이 아닐 테다.
세실레의 입에서 헛숨이 흐르던 차였다.
불현듯 머릿속을 파고들며 강렬한 음성이 들려왔다.
[너는 나의 딸이다.]
‘……그게 무슨.’
[돌아와라. 내가 너를 위해 나의 전령을 보냈으니. 그들이 길을 열어줄 것이다.]
세실레는 혼란스러움에 두 눈을 떴다. 그러나 뇌를 꿰뚫듯 강렬한 음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의 딸아. 네가 지상에 남으면 결국 모든 생명이 죽고 말 것이다.]
“……죽는다니.”
세실레는 상체를 뒤로 뺐다.
일전에 보았던 핏자국이 신기루처럼 눈앞을 아른거렸다.
환영의 중심엔 아르베우타가 서 있었다.
순간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에 몸이 시렸다.
세실레는 숨을 급히 들이켰다. 그제야 눈앞을 어른대던 장면이 사라졌다.
목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주춤 물러서다, 고개를 들었다.
천장 가까이 나 있는 자그마한 창에서 은은한 달빛이 새었다.
고작 오 분 정도 지난 줄 알았건만, 그새 밤이 된 것이다.
세실레는 초연한 표정으로 창 위를 바라보다, 무언갈 느끼고는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사방에서 친위대의 기척이 느껴진 탓이었다.
‘친위대가 왜 여기에…….’
낯선 인기척에 그녀의 입에서 자조적인 중얼거림이 흘렀다.
“왜 자꾸 이런 짓을…….”
낮에는 신전 주위를 이토록 많은 기사가 둘러싸고 있는지 몰랐다.
그러나 밤이 되고 사방이 고요해지자, 신전을 둘러싼 수많은 기사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들은 모두 황제의 친위대였다.
황명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이들이 은밀하게 기척을 숨기고는 신전을 주시하는 것이다.
세실레의 입에서 허탈한 숨이 흘렀다.
‘전투태세조차 갖추지 않은 신관들이 무어 그리 무서워서.’
신전에는 위협될 만한 인물이 아무도 없었다.
그런 곳에 친위대를 배치하는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인질이라도 잡을 생각인지.’
세실레는 한숨을 내쉬며 기도실을 나왔다. 그러다 뜻밖의 손님에 눈을 크게 떴다.
루베르가 기도실 앞을 지키고 있던 것이다.
그는 졸린 듯한 표정으로 세실레의 팔을 잡아당기며 투덜댔다.
“……엄마.”
“루베르? 여긴 무슨 일이니?”
“잠이 안 와서요.”
세실레는 루베르의 앞에 무릎을 굽혔다.
그러곤 시무룩한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물었다.
“잠이 안 와?”
“네. 엄마가 자장가 불러주면 안 대여?”
올망졸망한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이럴 때면 세실레는 별다른 의심 없이 알겠노라 고개를 끄덕이고는 했다.
이번에도 그럴 생각이었다. 루베르가 흘깃 바깥을 살피지 않았다면.
순간 흐릿하던 눈동자에 경계하는 기색이 어렸다.
의아한 행태에 세실레 또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도 친위대 한 명이 숨어 있었다.
그는 시선을 느꼈는지 은신을 시도했다.
저렇듯 도망치려 드니, 그 속셈이 더욱 궁금했다.
세실레는 이능을 펼쳐 그를 신전으로 끌고 왔다.
얼결에 끌려온 기사가 당황한 낯으로 화급히 고개를 숙였다.
“화,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여긴 무슨 일이지?”
“순찰 중이었습니다.”
“순찰?”
“황후 폐하의 안위를 걱정하신 황제 폐하께서 내리신 조치입니다.”
기사는 당황했던 것과는 달리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
담담한 목소리는 사실만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신전은 명백한 제국 소속이었다.
황후만의 특별한 구역이 아니란 뜻이었다.
그러니 황제가 신전 주변을 경계하라 하면 아무도 거역할 수 없었다.
‘이유 없이 친위대로 경비를 세워도 말이지.’
평소라면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은 아니었다.
꼬아진 심경이 생각을 바로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세실레는 흘러가듯 중얼거렸다.
“다들 날 어떻게 하고 싶어서 안달이네.”
“폐하, 오해입니다.”
“그대에게 물어본 적 없네.”
싸늘한 목소리에 기사가 몸을 떨었다.
세실레 또한 엄한데 분풀이 중이란 걸 알고 있었다.
정말로 화를 내고 싶은 대상은 따로 있었으니까.
‘내가 뭘 하는 건지.’
입에서 한숨이 흘렀다, 무어라 타박할 힘조차 나지 않았다.
세실레는 느리게 눈을 내리깔았다.
‘……붙잡지 않았지.’
아르베우타는 떠나는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온몸이 따갑도록 응시했으면서,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긴장했으면서, 자신과 같이 심장이 뛰고, 붉은 눈에 올곧이 저를 담은 채 애원하듯 바라봤으면서도.
기어코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우습지도 않은 변명 뒤에 숨어서는.
‘차라리 내가 밉다고 말했으면.’
그랬으면 기대조차 하지 않았을 텐데.
세실레는 조용히 몸을 돌렸다.
순간 맑게 개었던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졌다.
***
며칠째 장대비가 쏟아졌다. 그칠 줄 모르는 폭우에 하늘은 먹구름이 가득했다.
낮에도 밤과 같이 어두웠다. 쉼 없이 내리꽂히는 벼락에 사람들은 아비규환이었다.
그러자 폭우마저 황제의 부도덕함 때문이 아니냔 소문이 일었다.
더불어 황후가 엄중한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감정적인 반응을 한다는 소문도 일었다.
황후가 무서워 다들 쉬쉬했으나 내심 불만을 가진 이들이 많은 탓이었다.
“자리만 지킨다고 황후인가?”
“그러고 보니 이번엔 신탁이 늦는군.”
“도대체 나라가 어찌 되려는 건지!”
갈수록 불만이 커졌다.
황제가 강물에 쏟아부은 성수도, 일부러 낸 소문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테르델은 곳곳에 모여 울분을 터트리는 이들을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주변이 불쾌한 기운으로 넘실거렸다.
그는 폭우가 쏟아지는 음습한 거리 한가운데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힘이 넘치고 있었다.
그간 성수로 인해 불쾌하던 것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비릿한 웃음이 그의 입가에 맺혔다.
“이리될 줄 알았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세실레가 추락할 날이.
고대하는 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지척으로 다가온 종을 발견하곤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약을 다시 만들 수 있겠군.”
***
저잣거리와 마찬가지로 황궁 또한 시끄러웠다.
폭우가 내리던 밤, 황후의 여동생이 쓰러진 것이다.
갑자기 몸이 굳더니 열이 펄펄 끓었다.
유명한 의원의 진료도, 신력도 통하지 않았다.
쟈르스를 내내 붙여 놓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는 동안 디젤라는 실시간으로 증세가 심해졌다.
세실레는 안색이 희게 질린 동생을 바라보며 심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쩌면 좋지.”
세실레는 마지막 희망을 붙잡듯 아르베우타가 주었다던 자료를 응시했다.
이미 수십 번 읽은 자료였다.
하지만 아무리 읽어도 단서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저 아르베우타 또한 비슷한 일을 겪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아르베우타의 도움을 받으면…….’
그를 부르는 것만이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방법이었다.
고민하던 세실레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믿을 수 없는 종자였다.
그에게 여동생을 내보였다가 더 안 좋아질지도 몰랐다. 무언가 다른 방법이 있을 테다.
세실레가 고민하는 중에 의원이 진료를 마치곤 고개를 숙였다.
세실레는 지친 목소리로 의원을 향해 물었다.
“어떤가?”
“차도가 없습니다. 해열제를 써도 열이 내리지 않습니다.”
“고열로 앓은 지 꽤 된 것 같은데.”
“……그렇습니다. 이대로면 목숨이 위험합니다.”
세실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가 봐도 디젤라의 상태가 위중했다.
강한 열에 피부가 바짝 말랐다.
마른 입술에 물수건을 대어주는 것도, 얼음을 끼워 체온을 내리는 것도 한계였다.
이능조차 듣지 않는다.
‘디젤라가 각성자이기 때문일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세실레는 각성자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다.
아는 것이라곤 아르베우타와 테르델이 각성자일 지도 모른다는, 추측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실오라기 같은 기대에 매달려 애걸하는 수밖에 없었다.
‘방법은 하나뿐인가.’
영 내키지 않았으나 싫어도 별수 없었다.
세실레는 마지못한 표정으로 쟈르스를 향해 말했다.
“가서 황제 폐하를 모시고 오게.”
엄중한 목소리와는 달리, 낯빛은 힘이 없어 파리했다.
***
집무실은 연달아 쏟아지는 폭우에 대책을 세우느라 바빴다.
연실 자료를 취합한 비서관들의 낯빛이 어두웠다.
그들은 막 정무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황제를 향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민을 수용할 곳이 부족합니다.”
“전 대륙에 비가 내리고 있답니다.”
“역사를 뒤져봐도 이렇게 비가 내린 적은 없었는데, 혹시 황후 폐하와 관련된 일은 아닐까요?”
여러 의견이 나왔으나 아르베우타는 별달리 할 말이 없었다.
당연히 세실레와 관련된 일일 테다.
‘테르델과 만난 이후로 심란한 모양이군.’
그러나 여전히 황후궁은 폐쇄 상태였다. 돕기는커녕,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조차 몰랐다.
그러나 아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황후궁 위를 어른거리는 기운을 바라보았다.
점점 부풀던 기운이 터질 듯 폭주했다.
능력이 발현하기 직전이었다. 이제 곧 디젤라에게 고비가 찾아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세실레는 자신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쟈르스가 찾아왔을 때, 아르베우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표정으로.
***
세실레는 쟈르스를 보내고서도 초조한 마음에 방을 서성였다.
신전에 들렀던 이후로 계속해서 하늘에서 비가 쏟아졌다.
가뜩이나 심란한 상황에 분위기마저 우중충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낮에도 이능을 부리기 쉬워졌다는 점이었다.
세실레는 방 안 가득 일렁이는 아름다운 은빛 무리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햇빛이 약해서 그런가?’
수련의 성과라기엔 비가 내린 이후로 급격히 좋아졌다.
곰곰이 고민하던 세실레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디젤라의 안전이 먼저야.’
하지만 막상 아르베우타를 다시 마주할 용기가 서지 않았다.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지난번 안 좋게 헤어지고 며칠이 지나지 않았다.
각오하라는 따위의 말을 해놓고 부탁을 하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손에 땀이 찼다. 세실레가 몇 번이고 손을 쥐었다 펴는 중에 시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제 폐하께서 오셨습니다.”